리뷰[Review]/영화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 (The Patriot, 2000) 리뷰

시북(허지수) 2013. 3. 5. 22:00

 전쟁을 테마로 하고 있는 명작 영화들은 많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그 까닭이 극한의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들은 자발적인 의사인 경우도 상당합니다. 돈에 미친다거나, 약에 미친다거나, 섹스에 미친다거나, 자신이 선택해서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은 셈이지요. 그런데 전쟁은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소용돌이 속에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과 죽음 앞에 마주서야 합니다. 가만히 서서, 나는 참가하지 않겠어요 라고 외쳐봐도, 그 말에 전혀 상관없이 희생양이 될 수 있는 것. 그래서 전쟁은 금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영화 패트리어트는 조금은 이색적인 입장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주인공 벤자민 마틴(멜 깁슨)은 전쟁이 정말 싫은 아버지 입니다. 벤자민은 거의 비겁해 보일 만큼, 전쟁에 대해서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더욱이 벤자민의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전쟁영웅 출신이고, 뛰어난 군사전략을 자랑하는 천재군인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마치 관객에게 이야기 하듯 그는 털어놓습니다. "(전쟁이 왜 싫냐고?) 자네도 가정이 생기면 이해하게 될거야." 하지만, 시대 상황은 벤자민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갑니다.

 

 

 살고 있는 동네가 이제 더 이상은 전쟁의 피바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결단의 시간 앞에 섰습니다. 영국군 앞에 굴복하며 살아갈 것인가, 독립을 외치며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할 것인가. 보기에도 후자가 훨씬 좋아보이잖아요,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투표결과도 역시 독립을 향해서 싸우는 쪽으로 나옵니다. 이런 상황 임에도, 놀랍게도 벤자민은 가족과 함께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총검은 다시 손대지 않겠다는 지독한 결의까지 느껴질만큼, 그는 단호합니다. "아이 러브 패밀리!" 다른 그 무엇도 원하지 않는다는 그의 마음은, 좋게 말하면 소박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비겁함이겠지요.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참다못한 장남 가브리엘은 나라도 새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며, 독립전쟁에 참가하는 대담한 용기를 보여줍니다. 영화 초반부는 이렇게 묘한 구도로 흘러갑니다. 뛰어난 전쟁영웅은 지금 숨어서 전쟁을 피하고 있고, 풋내기 아들은 뜨거운 혈기를 품에 안고서, 총검을 집어듭니다. 둘째 아들 역시, 어떻게든 독립전쟁에 참가하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에게 전쟁이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피와 죄악으로 물든 지옥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지요. 자, 어쨌든 영화는 영국군대가 벤자민의 집 앞까지 쳐들어 오게 되면서, 아주 커다란 변화가 시작됩니다.

 

 벤자민은 끝까지 평화를 원했지만, 군대가 원한 것은 복종이었지요.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꿈꾸었던 벤자민 일가는 핏방울 떨어지는 총성과 함께 격동의 전쟁 한복판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사랑하는 둘째 아들은 영국군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죽어버리고, 큰 아들은 스파이 혐의를 받으며 곧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입니다. 끌려가는 장남을 보면서, 벤자민은 다시금 손에 피를 묻힐 각오를 합니다. 정말 하기 싫었지만, 지금 끌려가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서, 그는 악마가 되기로 했습니다.

 

 늪 속의 여우라고 불리는 벤자민, 영국군대는 이제 그를 "고스트"로까지 부릅니다. 거의 혼자서, 약 20명의 영국군을 학살하고, 그는 교수대로 끌려가는 큰 아들을 구해냅니다. 하지만 벤자민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피범벅이 될때까지 검을 휘두르는, 거의 절규에 가까운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묘하지만, 사람이란 얼마나 약하고 선한 존재인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을 죽이는게 너무 싫어서, 매일 반성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는 벤자민은, 이번에는 독립 전쟁에 뛰어들면서, 또 다시 그 끔찍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되므로, 현실에 절망하며 뛰어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치명적이고도 무거운 슬픔"의 옷을 입고 있는 듯 합니다.

 

 적어도 벤자민에게는 훗날 빛나는 역사로 기록되는 "미국 독립을 위한 전쟁" 이, 지금 그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괴롭고, 어떻게든 끝을 봐야하는 전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 가치관을 흔듭니다. 독립전쟁이라면 정말 멋있고, 용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역사의 진보에 헌신하는 고결한 행위로 인식할 때가 많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압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용감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모두가 용기로 완전히 무장한 것이 아니라, 처절한 괴로움 속에서 올바른 길을 위해서 힘겹고도 어려운 선택을 했음을, 다시금 이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독립"한다는 것은 그토록 힘든 일이고, 괴로움을 견디는 대단한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독립은 완성된 영웅들의 행위가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 함께 나아가는 모두의 노력, 그 자체가 위대한 것입니다. 영화 패트리어트를 보면 이런 생각을 계속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벤자민은 늘 누군가와 함께 있으니까요. 때로는 용기 넘치는 장남 가브리엘과, 때로는 총을 들고 있는 목사님과, 때로는 상처투성이의 민병대원들과, 말하자면 벤자민은 늪 속의 한 마리 여우이기 보다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쏟아붓는 지도자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도, 이 전쟁이 끝난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믿으며, 매번 일어서는, 그의 결의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많은 민병대원이 대포와 총성에 질려서 물러설 때에도, 벤자민은 미국 국기를 들고서, 앞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죽음을 맞이할 지언정, 짓밟히는 인생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그의 모습은 용기를 줍니다.

 

 좋은 말은 여기까지 하고, 회의형 인간인 저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과연 영국군대가 처음부터 벤자민의 평화를 존중하고, 그들의 식구를 따뜻하게 대했다면 이야기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적어도 벤자민은 총을 들지는 않았을테고, 역사는 흘러가서 어쨌든 미국은 독립했겠지요. 그런데 문득 부질없는 의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군대는 당시 시점에서 "갑"인 존재입니다. 영국군대의 악당으로 묘사되는 "태빙턴 대령"은 소름돋는 대사를 합니다. 그는 자꾸 이짓(사람죽이기)을 하다보면 쾌감을 느낀다고 표현합니다.

 

 이짓을 권력을 휘두르는 행위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실험인데 - 감옥의 교도관역, 죄수역을 단지 역할극(연기)로만 해보면, 멀쩡한 사람도 교도관을 역을 맡으면 행동을 함부로 하며 죄수를 막대하기 시작합니다. 환경이 인간을 그렇게나 쉽게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태빙턴 대령도 그렇게 악마화 되어가면서, 인간의 선을 넘어가는 것을 영화는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오늘은 마이너적인 마무리를 해보자면, 영화에서 느끼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갑의 입장을 만에 하나 가지게 된다면 정신줄 놓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멀쩡한 사람도 흙탕물에서 뒹굴다 보면, 권력의 달콤함 앞에서 악마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뻘 되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용기를 배우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벤자민식의 겸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영화 후반부에서 마침내 말합니다. 용기 있는 아들에 비한다면 나는 별볼일 없는 군인이었다 라고. 그가 추구했던 현실적이고 평화로운 결심은, 아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이고 힘든 길에 비해서, 별볼일 없었다고 고백하는 벤자민. 그리고 알다시피 미국은 그렇게 독립국가를 세웠습니다.

 

 싸우지 않고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면 정말 평화롭고 좋은 일이지요. 부딪히지 않고도, 넘어지지 않고도, 잘하게 된다면 정말 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자유라는 것을 생각할 때, 자유는 고생을 해야 맛볼 수 있는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 미디어로부터의 독립, 경제적인 독립, 생각의 자유로운 독립, 무엇하나 쉬운게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현실에 눈을 뜨면서, 더 비겁해질 때도 많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에 나오는, 임금님을 비웃던 그 주인공은 어린 친구였지요.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이처럼 자유로운 생각과 독립적인 이야기들 입니다. 자유의 깃발을 들고서, 삶의 끝날까지 살아간다면, 참 멋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 2013. 03.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