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3월3일/가나혼인잔치 이적(요한복음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3. 5. 21:12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3일 주일 예배

가나혼인잔치 이적 (요한2:1-)

오늘 우리는 이책의 저자인 사도 요한과 같이 예수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하시던 모습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때로 요한이 첫째날 이튿날, 사흘되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마주칩니다. 지금 요한은 주님을 처음 따르던때의 감격을 그대로 가지고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그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줄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가장 신경 써야 될 부분은 왜 주님의 첫 사역이 혼인잔치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물로 포도주를 만든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설교를 듣다 보면 기독교가 무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사흘되던 날에-요한은 어떤 사건을 기록할 때 될 수 있는대로 그 사건이 발생한 시간과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어서 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신을 주려하고 있다. 당시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허구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최대한 자세하게 기록하기를 원했다.

신기하지 않은가? 아직도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했다. 심지어 예수님의 기적에 참예했던 사도가 살아있음에도 단지 자기들이 직접 접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그런데 무려 2000년이 지났고 수만리나 떨어진 오늘날의 한국에서 예수님의 실존성을 부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사흘되던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과 이야기를 나누시던 날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삼일째를 의미한다. 요한은 지금 예수님의 공생애 시간을 날짜별로 적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의 부인에 정면으로 반박하기 위함이다.

1장의 지리적 배경이 유대이며 여기는 갈릴리 가나이다.
즉 1장에 나오는 요한과 제자들의 간접적인 증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이적을 소개함으로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인데 대해 매우 답답해 하며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최대한 자세하게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표적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이는 7대 표적 중 첫 번째이다. 물론 그가 단지 7가지의 이적만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요한은 그중에서 7가지를 특별히 선정하여 여기에 기록하고 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만물에 대한 메시야의 신적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이적이다. 또한 혼인잔치의 기쁨처럼 메시야의 오심이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 즉 하나님과 하나되는 놀라운 기쁨의 일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만드시는 것이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이 우리가 마차 혼인잔치에 참여함 같은 기쁜 축제가 되기를 원하셨다. 고통받고 압제 속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에게 편안함과 풍성함의 그리고 즐거운 축제를 열어 주시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로서 영적인 혼인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는 기쁨과 사랑의 종교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할 때 처절함, 팍팍함, 엄숙함 그리고 거룩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기쁨, 여유로움, 관용과 휴식, 때로는 느슨함까지 뭔가 제도와 형식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간다움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엄격히 적용하며 치열한 투쟁성을 나타내는 것은 같은 형제나 이웃들에게가 아니라 사탄의 권세에 대한 것에 대함이다. 세상과는 치열하게 싸우고 우리들 끼리는 평안과 위로, 그리고 쉼이 있어야만 한다.

더구나 주님이 전하시는 복된 소식은 가난과 고통, 그리고 억울함과 폭압에 대한 해방이며 인간을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귀하게 만드는 나라,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함으로 스스로 존귀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존귀한 대우를 받는 나라를 만들어서 그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지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가난해서 항상 부족하고 절약할 수 밖에 없었던 삶에서 벗어나 풍부하고 여유롭고 그리고 사랑하며 즐거운 가난의 혼인잔치야 말로 우리가 만들어갈 복음의 진리를 그래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의 첫 사역을 가난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는 마치 천국혼인잔치를 예표하는 것 같다.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마리아는 사도 요한에게는 이모가 되지만 그는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기위해 마리아의 이름을 생략했다. ‘계시고’는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적어도 한 주간동안 계속되는 결혼식에 마리아는 계속해서 그 집에 있었다는 말이다. 즉 마리아가 이 집의 주인과 가까운 사이거나 친척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자가 아닐 경우 이 한주간의 축제가 그들의 인생가운데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다.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먹을것이 풍족하고 마실것이 넘치며 새로운 옷과 장신구들이 있고 음악과 이웃과의 유쾌한 주제가 있는 이 시기가 이들의 각박한 삶에 유일한 즐거움이며 안식이다. 그러므로 이 잔치는 괴로운 인생길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리는 복음안에서의 삶,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삶을 나타낸다.

우리가 사람들을 전도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라고 하는게 아니라 보다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안에서 행복을 같이 누리자고 하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땅에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보다 더 완전케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전도가 필요한 것이지 아무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이 복받는 것만을 요구하는 사람들로 교회당을 채우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며 하나님의 큰 일도 아닌 것이다.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예수는 아직 유명해 지기 전이었으므로 아마 친척관계로 인하여 초대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 첫 사역을 혼인잔치에서 시작했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이 사막에서 고행하며 금욕함으로 사역을 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행복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압제아래서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이제 그 사탄의 압제의 사슬을 끊기위해 주님이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 그것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 될 때에야 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마치 혼인자리에서 신랑과 신부가 하나로 맺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혼인잔치에 모두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우울하며 엄숙한 검은 법의와 같은 침울한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쁘고 즐거워해야 하며 우리가 간 곳은 항상 기쁨과 소망이 넘쳐야 된다. 모든 오락과 웃음이 사라지고 오로지 엄숙함과 애통함과 회개만 있다면 이것은 주님이 이땅에 오신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것이다.

주님은 스스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셨지만 자기가 구속한 우리들은 행복해 지기를 위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의 삶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데는 얼굴에 지옥의 심연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의 모습을 비치고 있는 밝고 온유하며 항상 긍정적인 사람이 더 적합하다. 예수님은 항상 온유하여 어린아이 조차도 그에게 오는 것을 좋아 하였다.

교회 역시 사랑과 긍휼이 넘쳐서 그곳 안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행복해지고 소망이 넘치도록 해야 할 것이며 도를 넘지 않는 한 기쁘고 즐거워야 한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이 포도주는 갈릴리 지역에서는 갈증을 해소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당시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으면 기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포도주는 중요했다. 포도주가 바닥이 났다.
포도주가 모자란다는 것은 즉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것은 포도주가 형상화하는 기쁨을 상실한 인간현실을 비유한다. 인간은 물질에 매료되지만 물질의 속성상 영원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욕망에 쩔어서 탐심을 부린다.

포도주는 소비됨으로써 인간에게 쾌락을 주지만 포도주가 소진되어 인간의 쾌락이 중단된다. 그리고 인간들의 흥은 깨어지고 지독한 숙취만이 남는다. 어쩌면 술이 취해있는 동안 좋지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술이깨고 맨정신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은 자기네가 누렸던 비정상적인 쾌락의 뒤치닥거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세상의 물질이 주는 쾌락에는 분명한 한계, 즉 물건이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그들이 포도주를 가진 것이 없다. 즉 더 이상 잔치에 가지고 나갈 포도주가 없다.

그러면 왜 마리아는 예수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을까?
혼인하는 집과는 친척이었으므로 마리아가 자연스럽게 예수님에게 이 사태에 대해서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 기사에서 요셉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미 아버지는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면 예수님을 잉태했을 당시의 특별한 경험으로 보아 예수께서 메시야임을 마리아가 알고 그의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여자여(귀나이, 귀네) 이 말은 장성한 여자를 호칭하는 말이지만 귀부인을 호칭하는 존경의 어법이다. 단지 이 말을 우리말이나 영어로 번역할 수가 없어서 여자여로 번역했을 뿐이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란 말은 나와 당신에게 있어 그 일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저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시 마리아는 인간적인 정 때문에 단순히 예수에게 이 일을 부탁한 것이다. 즉 광야에서 사탄이 예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고 하는 것과 유사한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 일이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대신에 메시야적 소명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실 것을 밝힐 목적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이일은 이미 작정된 것을 행한 것이지 마리아의 부탁으로 즉석에서 예수가 행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리아 숭배의 근거인 마리아의 부탁을 예수가 잘 들어준다는 말은 전혀 아닌 것이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이 말은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위한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때는 결정적인 때란 의미와 규정되고 지정된 특정한 때란 의미가 있다. 결정적인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적을 행하신 것은 구속사가 완성되어 이루어질 그날의 영광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이다.

여기서 이 세계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들이 시간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의 뜻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인들에게-여기서는 협조자 정도의 의미다. 돈으로 고용된 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잔치를 돕는 자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가 어떤 말을 해도 거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사전에 이들에게 실수가 없도록 당부를 한 것이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사실 우리는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기적을 맛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으로서 노예의 율에 따라 주인의 어떠한 명령에도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앞에서 겸손히 순종하고 청종하는 것이어야 만이 더욱 가치있고 귀중한 것이다. 만일 종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처벌을 받을 일이다.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유대인들은 세정식을 중시한다. 즉 외출에서 돌아오거나 식사 전후에 부지런히 씻었는데 위생적 차원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집마다 약100리터정도 들어가는 항아리들이 있었다. 돌항아리의 개수를 여섯이라고 밝힐 수 있는 것은 당시 요한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미 일부에서 예수님이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부인하고 또는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실존인물임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기위해 이 책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기술은 지나치게 자세하며 마치 그 옛날 주님과 함께 있을때를 회상하듯이 눈앞에서 그일을 보듯이 생생하게 기록함으로 회의론자들의 의심을 잠재울 결심을 하고 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물을 아구까지 채웠다고 한 것은 물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제는 떠서-시간적으로 물을 채우자 마자 곧 떠 주기를 바랐다. 봉사자들의 입장에서 자기네가 물을 떠넣었는데 그것을 포도주로 여기고 연회장에게 떠다 주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집안 어른으로 특별히 부탁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봉사자들의 순종을 유도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적권위에 억압된 이들이 물을 퍼 넣은 걸로 해석한다.

연회장은 집주인으로부터 잔치를 배설하고 주재하는 책임을 맡은 자이다. 따라서 연회장은 손님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는 일을 하고 당연히 새로운 먹거리가 나올 때는 연회장이 먼저 맛을 보게 된다.

갖다 주었더니-자기가 분명히 물을 채웠는데 그것을 떠서 가져다 주라는 명령을 받고 의아한 봉사자들
물로 된 포도주-원문은 포도주로 변하여진 그 물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이것은 당시의 관례와는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즉 사람들은 질좋은 포도주로 그들을 취하게 하고 난 다음에는 그보다 못한 것을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포도주의 맛을 잘 분별하지 못하도록 한다.

요한은 연회장의 반응을 소개하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생략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까지 예수가 메시야로 대중 앞에 나설 때가 아님을 말해준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적을 표시라고 한다. 즉 메시야인 표시, sign. 요한은 이 표적이란 말로 예수님의 하나님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사용한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에 대한 믿음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즉 예수가 메시야임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은 아닌 것이다 처음 표적을 보기 전에 제자들은 예수를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지 그를 진실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명확한 표적을 봄으로 그들은 지식적으로 알뿐만 아니라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고 말한다. 그렇다. 그들이 단순히 본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은 경험한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은 주님을 의심하지 않고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표적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지만 하인들도 사람들도 아무도 그를 믿지 않고 오직 제자들만 주를 믿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12예수의 여자형제들은 나사렛에서 결혼하여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고 예수님과 남자형제들 마리아만 가버나움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 집에서도 예수는 몇일만을 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집이 없었다. 그는 순회전도자요 노숙인이며 길위의 사역자였다.

1.예수님의 사역이 혼인잔치에서 시작된 것을 유의하라

2.항아리에 물을 퍼 넣어라는 명령을 거부할 자유가 그들에게는 있었다. 왜냐면 그들은 종이 아니라 단순한 잔치집의 봉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순종을 위해 마리아가 특별히 당부를 하는 것이다.

3.여자여 라는 말은 결코 무례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헬라어로 쓰인 이 말은 헬라의 귀부인에게 바치는 존칭이다. 단지 우리 말로 번역할 말이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여로 번역한 것이다.

4.예수님의 이 이적을 본 사람들 중에서 제자들만 주님을 믿었다. 직접 이적의 역사에 참여한 하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은 이는 없다. 이는 이적이 모든 것을 다 뛰어넘어서 사람들을 바꿀 수는 없음을 말한다. 그 마음을 바꾸는 것은 지식도 아니고 논쟁도 아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인 것이다.

5.예수님은 집에서 몇 일만을 유했을 뿐이고 그는 노숙하는 길 위의 유리하는 사역자로 일생을 보내셨다. 이땅의 사역자들은 얼마나 부유하며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는가? 내가 오늘 그 돈을 받음에 부족함이 없는지 스스로 돌아 보아 반성해야 할 것이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3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가볍고 경쾌하게 덧붙이자면, 점점 나쁜 술을 꺼내오는 전략은 동서고금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서, 놀랍기도 합니다. 남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방법은, 앞으로 2천년 정도 지나면 사라질 수 있을까요? 여기서 좀 더 생각을 밀고 나가면, 이러한 전략은 타인을 얕잡아 봄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습니다. 취해있으니 넌 모르겠지 라면서 싸구려 물탄술을 꺼내오는 것이지요. 취한 사람도 모르면서 먹으니, 서로 쿵짝이 잘 맞는 것인가요. 그런데 기독교의 이야기는 이와는 반대방향으로 흐릅니다. 타인을 우대하고 높임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령 인간이 못나고 취해있고 엉망일지라도, 정중하게 대하라 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합리적 사고방식 대신에, 인간 자체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셈이지요. 선조들의 풍습 중에는 노인들을 활용가치가 없다며 버리고 오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치매로 고생중인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괴롭습니다. 가끔은 애정보다 미움이 차오를 때가 있겠지요. 그럼에도 사랑하라는 명령은 굉장히 절대적인 느낌마저 줍니다. 좋은 것을 대접하고자 노력하라, 이것이 기독교의 이야기 입니다.

 기본적으로 기쁨이고 행복이어야 한다는 것도 참 좋습니다. 그 길이 강요 대신에 선택이라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천국의 이미지야 당연히 즐거움 이겠지요. 부족함 없는 상황에서, 마음껏 놀 수 있는 곳은 어디라도 천국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근심없는 해맑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더 자주, 더 많이 웃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우울함과 비참함에 물들어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영혼을 맑게 하도록 더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일이 뭐 있어야 기뻐하지! 라고 반문하겠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매일 감사의 기도를 하고, 기쁨을 찾을 수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밥벌이에 녹초가 될지라도, 오늘 하루도 힘껏 응원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적을 직접 보고도 예수를 믿지 않는 하인들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지도 않을까요. 그들은 이것을 우연으로 돌렸을 것이며, 어떤 일에도 놀라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심드렁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즉, 감탄하지 않는 인생이란, 변화하지 않는 인생과도 같습니다. 호기심을 간직하고, 자주 놀라는, 아이들의 커다란 눈동자를 예수님이 사랑한 것은 당연할 테지요. 무감각한 인생이 되면, 무엇을 봐도, 아무런 재미가 없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점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은 축제이며, 즐거움이다 라고 담대하게 선언한 것이 아닐까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인생에게, 비싼 차, 좋은 집, 고급스러운 물건들이 필요할까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먼 길의 여행을 떠날 때, 수백, 수천권의 책이 필요할까요. 읽고 싶은 좋은 책 한 권만 품에 안고 있어도 그는 세상에서 제일 풍요롭고 즐거운 여행자가 될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서 제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며, 목사님처럼 박사님도 아닙니다. 하하. 그럼에도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과의 동행하는 삶은, 즐거운 일이며, 만족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에게, 다른 그 어떤 누구도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렇게나 많은 것이 아닐까요. 부자일 필요도 없고, 잘날 필요도 없고, 그저 축제에 참여만 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즐겁게 살면 되니까요. / 2013.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