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3월10일/성전을 깨끗하게 하다(요한복음2:13-2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3. 13. 04:0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10일 주일 예배

성전을 깨끗하게 하다 (요한복음2:13-22)

요즘 서울이나 지방이라도 큰교회당에 가보면 예외없이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상점입니다. 편의점이나 찻집, 식당, 서점, 기념품점 같은 것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점들은 본래 교인들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들어 서기 시작해서 이제는 주위의 상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업 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점은 대개 교회 직영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직분자들이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를 위해서 어떤 검은 거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검은 거래가 없을 수도 있고 이러한 상점들이 사람들에게 크게 유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납니다. 고향 교회에서 처음 교회당의 식당 옆에 커피 자판기를 설치하려고 했습니다. 이 식당은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주일날 교인들에게 밥을 주는 곳일 뿐입니다. 주일학교 공과공부도 하는. 커피 한잔에 백원이니까 결코 비싸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수익금은 전액 불우이웃돕기로 하기로 했습니다. 주일날 돈쓰는 것을 막기 위해서 주일은 공짜로 커피를 뽑아 먹게 했습니다. 정말 멋진 의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기서부터 시작한 교회의 ‘장사집 화’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습니다. 제 고향교회는 아니지만 북쪽의 대형교회에서 운영하는 식당 때문에 인근에 장사가 안된다고 상인들이 몰려가 데모를 하는 일이 벌어진게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렴하니까 교회 식당으로 손님이 몰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서 비싸게 받는 일반 식당주인의 탐욕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식당입장에서는 규모의 경제 때문에 도저히 교회 식당같은 단가를 맞추지 못한다고 항변합니다. 제가 관계자가 아니라서 정확히 내부 사정을 알 수는 없습니다. 뭐 이익을 보는 손님들의 입장에서는 좋습니다. 그러면 된거 아닙니까? 글쎄요, 문제는 이러한 청렴함과 봉사정신이 과연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점입니다.

교회에서 순수하게 시작한 상점들이 본래의 의도를 이탈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 돈이라는 괴물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문명 세상의 대부분은 돈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돈이 주인임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잖아요. 그만큼 돈은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핍박과 물리적 박해에는 굴하지 않던 교인들도 돈의 힘 앞에서는 머리를 숙이는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러한 추세를 왠만한 결단없이 돌이키는 것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워낙 여기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이 많아 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러한 것들이 제공하는 편리에 길들여 져서 불편을 참지 못하게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모 대형교회는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만들어서 여전도사를 공급하겠다고 선언하고 학교를 열었습니다. 그 학교는 당연히 성업 중이고 대신에 교단지정 신학교는 학생이 없어져서 개점 휴업상태입니다.
우리교회 일꾼은 우리 교회 실정에 맞게 교육을 시켜야 된다나 어쩐다나...
이제는 개교회의 상업화가 교회연합체의 이익까지 침해하는 실정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형제애 같은건 없습니다. 단지 내 교회, 그리고 나의 이익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두 번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유월절 승리의 행진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기 전에 성전을 정화한 사건에 비해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에 행해진 사건으로서 사람들은 이를 제1차 성전 숙정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혹시 어떤 이들은 성전이 교회냐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성전은 교회가 아니지만 오늘날의 교회당과 옛날 성전이 정말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천만에요. 오늘 교회당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까? 기도하는 집이 아닙니까? 여기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습니까?

교회당이 항상 거룩할 필요는 없지만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는 그 시간은 그곳이 어떻게 생겼든지 그곳은 거룩한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우리와 만나주시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당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들 역시 거룩하고 깨끗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두 번의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 가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성전 정화 사건이 두 번이라는 것은 주님이 성전에 올라 가실 때마다 성전을 정화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성전이 장사꾼들과 온갖 부패와 탐욕으로 병들어 있는 것을 보실 수가 없었고 이러한 악습은 뿌리 뽑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지요.
주께서 오늘 본문처럼 성전을 정화시키셨지만 2년 후 유월절에 올라왔을 때도 여전히 이러한 장사치들이 횡행한 것이 나와 있으니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환전상의 돈을 쏟고 상을 엎으버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유명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생애 3년 반의 기간 중에 주님은 2년 후에 다시금 성전이 더럽혀진 것을 보시고는 역시 짐승들을 내어 쫓고 상을 엎어버립니다. 이것은 성전 정화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룰 내용은 오늘날의 교회는 과연 우리 주님 앞에서 떳떳한가 하는 겁니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에 오셔서 보시면 우리 주님은 채찍을 들지 않으실까요? “내 아버지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추상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요?

사실 마태, 마가, 누가는 이 첫 번째 성전 정화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두 번째 성전 정화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미 세 복음서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삼년 만에 무려 두 번씩이나 성전 정화를 하셨음에도 결국 성전은 깨끗해지지 않았고 여전히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합니다. 그것도 매우 악독한 방법으로 장사를 합니다.

유대인 남자들 에게는 한가지 의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삼대 절기 중에 한번은 반드시 가야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실상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건국절입니다. 우리로 치면 개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지만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정말 성전의 분위기가 말이 아닙니다. 거룩해야할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이 서고 한쪽에는 환전상이 상을 펴고는 세계 각국에서 온 유대인들에게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바꿔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냥 바꿔주는게 아니라 당연히 수수료를 물리겠지요. 12.5%.
또한 소가 울고 똥을싸고 양이 울고 비둘기가 퍼득거리고 난리도 아닙니다. 더운 지역에서 제대로 씻기지 않은 짐승들은 냄새도 심하게 풍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짐승들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이고 더 문제는 짐승들의 가격이 비싸도 너무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짐승들이 성전 안에 있습니까? 그건 성전에서 제물로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산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아래서 예루살렘으로 제물에 사용할 짐승들을 끌고 오기가 불편합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쭉 올라오는 구조, 강도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안인 비유가 나오잖습니까.

더구나 외국에서 배를 타고 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짐승들을 성전에서 바로 살 수 있다면 엄청나게 편리할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사드리러 오는 이들의 편리를 위해서 약간의 수고비만 받고 제물로 사용될 짐승을 팔자는 어느 정도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밖이나 성아래에서 짐승을 사서 온다거나 하는 건 어렵지요. 게다가 외국에서 쓰던 돈을 가지고 와서 이방신의 신상이나 참람한 문구가 새겨진 이방의 돈을 하나님께 헌금할 수 없어서 성전 안에는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은돈이 따로 있습니다. 이걸로 바꾸어야 비로소 일인당 반세겔의 성전세를 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환전상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환전업무의 편의를 위해서 성전 뜰에서 환전상들이 상을 펴고 환전을 해주는 겁니다. 물론 약간의 수고비는 받아야 겠지요.

그런데 당시 성전에서 자행되던 일은 좀더 사악한 방법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처음 멀리서 흠없는 짐승을 가지고 오면 이러한 짐승을 검사하는 제사장이 트집을 잡아서 퇴짜를 놓습니다. “이 제물은 흠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제물을 내어 놓아라” 이렇게요. 그러면 제사지내러 온 사람들은 가지고 온 짐승들을 헐값에 상인들에게 팝니다. 그리고 이걸 산 성전 상인들이 성전 뜰에서 사람들에게 비싸게 되파는 거지요.

그리고 이러한 부정을 위해서 뇌물이 제사장이나 성전의 책임자들에게 건네집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하는 겁니다. 그냥 장사도 아니고 정말 악독하게 하는 겁니다. 문자 그대로 ‘강도의 굴혈’인거지요.

처음 이렇게 시작된 사업은 점점 엄청난 이권으로 변질됩니다. 이게 돈이 된다는 걸 안 상인들은 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제사장이나 고위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경쟁합니다. 상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돈 한푼의 이익을 위해 십리 길을 물속으로 간다고 하는 이익에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는 자기들이 바친 뇌물에다가 이익금을 더해서 폭리를 취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계속해서 성전상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뇌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또 부자가 되는 거지요.

이러한 폭리가 점점 심해져서 제물로 팔려고 가져온 짐승들의 상태가 좋지 못한 것들로 변합니다. 흠없는 짐승들은 다른 곳에 팔고 제물로 팔 것들은 흠있는 것들로 바꾸는 겁니다. 어차피 제물로 사용되면 죽이는 거니까 상태가 좋은 짐승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어차피 제물검사는 제사장들이 하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리 저는 것, 비루 먹은 것, 눈이 실명된 것 등등..........실제로는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 제물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버젓이 흠없는 제물로 인정되어 팔려 나갑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제사장에게 뇌물이 들어 갑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제물로 드리는 소나 양이 완전한 흠없는 것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장사꾼들은 제사장들과 짜고 흠있는 것들로 장터에 내놓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물들을 가져가도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고 그대로 죽여서 제사를 지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동입니다.

서로 환전상이 되려고 상대방을 무고하고 제사장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사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이 아니라 로마의 돈이나 이전에 그리스에서 발행한 돈들이 통용되던 때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이 바꾸는 돈은 다른 곳에서는 유통이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성전 안에서만 유통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사용하는 은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니 수요가 엄청난 것이고 이게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환전상의 자리를 차지하기위해 뇌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뇌물 이상을 뽑아내기 위해서 폭리를 취합니다. 이제 처음의 제사지내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라는 선한 의도로 시작된 제도는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편리가 거룩함과 정성이라는 제사의 원칙을 파괴한 겁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이 장사를 위한 장터로 변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몇몇의 이익을 위해 선량한 수많은 종교심있는 유대인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신 주님께서 그의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짐승들을 내어쫓고 상을 엎으신 겁니다.

물론 이러한 일이 행해진 곳은 성전이라는 건물의 내부 라기 보다는 성전건물의 외부이면서 행각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방인의 뜰에서 행해졌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성전은 원래 이방인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그래놓고는 이방인의 뜰이라니요?

이건 오늘날 교회들이 본당에서 그러한 장사를 하는건 아니다. 우리는 교육관에서 한다. 아니면 문화 센타에서 한다. 이런 식으로 변명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당시도 마찬가집니다. 여기는 성전 건물 안은 아니야. 뜰이잖아. 그러므로 마당에서 장사 좀 하는게 뭐 대단하다고 이렇게 난리를 치느냐? 이방인의 뜰이야. 이방 상인들이 들어가라고 해놓은 곳이잖아

그래요, 그래서 더 웃깁니다. 유대교도들을 위한 성전내에 이방인의 뜰은 뭡니까? 이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이방인의 뜰이 필요하다고요? 하하, 그렇다면 뜰에 세워 놓을 것이 아니라 성전 건물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야지요. 그건 율법에 어긋납니까? 그렇다면 성전뜰에서 큰 의미의 성전을 보호하는 성관안에서 장사하는건 괜찮고요? 넌센스, 한마디로 말이 안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리를 위한 시설들이 과연 하나님의 이름으로 양심적으로만 운영될까요?
처음의 순수한 의도가 인간의 탐욕 때문에 왜곡되지는 않을까요?
자, 일단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강한 의구심을 표명하면서 성경본문을 따라서 앞으로 나갑니다.

아마 예수님은 첫 번째 해, 공생애의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여 성전에 올라오셨다가 우연히 이런 현상을 목도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성전안의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가 이루어 진 것 같습니다.
또 당시 모든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매년 반세겔의 성전세를 바쳤야 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유대인 성인 남성들은 반드시 삼대 절기 중에 한번은 성전을 참배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결국은 성전세를 반드시 내야 된다는 말과같습니다.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실제로 유월절 20일 전부터 환전소가 설치가 되고 수수료는 12.5%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상인들에게 이러한 환전상의 자리를 배분해 주므로 상인들은 앞다투어 대제사장이나 그 일당에게 뇌물을 바치고 환전상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뇌물과 이권으로 치부한 대제사장들은 로마당국에 뇌물을 바치고 자기의 권세를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웃기지요?
이방의 돈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성전에서 사용하는 은돈을 따로 만든 그들이 실제로는 신도들의 헌금을 로마 식민당국에 뇌물로 갖다 바치고는 대제사장의 자리를 사는 겁니다. 얼마나 웃깁니까?

백성들에게는 유대의 독립과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는 로마의 개가 되어 동족들을 착취하는 겁니다. 당시 로마의 개가 되어 동족을 착취한다고 생각되어진 세리는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는 죄인과 세리, 창녀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똑 같은 일을 하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은 거짓된 명예도 누리는 더 추악한 위선자들인 겁니다. 그러니 그런 나라가 망하지 않을 리가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이러한 악행을 보고 과감하게 채찍을 드신 겁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의 의도에서 벗어나 예수이름 팔아서 장사하는, 그것도 악독하게 장사하는 이들은 처음의 순순한 신앙과 의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일 탐욕으로 주의 전을 더럽힌 이가 있다면 깨끗하게 원상회복 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죄는 신성모독으로까지 확대됩니다. 하나님의 전이 계속해서 탐욕과 거짓으로 얼룩진다면 언제든지 우리 주님은 제3, 4의 성전 정화사건을 일으키실 테니까요.

주님께서 채찍을 드셨을 때 하신 행동이 세단어로 표현됩니다.
“내어 쫓으시고.....쏟으시며........엎으시고”
짐승들을 내어 쫓고 환전상의 돈을 쏟고 그 상을 엎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신자들을 등치던 악당들은 혼비백산하며 쫓겨갑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 재물을 숭배하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재산들, 번쩍이는 은돈들이 날라갑니다. 성전밖으로 쫓겨나간 짐승들을 잡느라고 한바탕 난리가 났겠지요.

특히나 환전상의 돈통에서 쏟아진 은화들은 마치 상인들의 피가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만큼 충격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은화가 땅에 떨어진다고해서 상하지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더렵다고 먹지 못하게 되는 음식이 아니라 그냥 먼지만 털어버리고 다시 사용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이 은화를 다른 사람들이 주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요, 바로 이게 문제지요.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은전들이 마구 쏟아집니다. 이걸 줍기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서 난리를 칩니다. 환전상은 망연자실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당한 부를 얻었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환전상의 은전 통을 뒤엎은 행동은 마치 기성의 잘못된 권위를 뒤엎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앞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팔며 뒤로는 로마 당국에 아부하는 위선적인 종교세력들의 거짓된 권위와 권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현상을 개혁하려고 하면 기득권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이용해서 장사하거나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이를 취하는 세력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이들의 항의와 반발을 잠재우기가 어렵습니다. 어쩌면 섣불리 개혁을 할려고 하다가 이들의 음모와 반발을 극복하지 못하고 비명에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가장 직접적인 원인 역시 제2차 성전정화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의를 위하여 관습과 부조리에 맞서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폭력을 행하는 예수님의 행위는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평화와 사랑, 그리고 양보와 희생을 요구하는 주님의 설교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내가 온 것은 화평케하려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고 하신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은 이럴 수 있는 권위나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아직 유명해지기 전의 예수님은 단순히 시골 갈릴리의 지방 랍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 온 것은 유월절을 지키려는 한 유대교 신자로서 의무를 지키려는 단순한 동기에서입니다. 결코 왕으로 온 것도 아니고 메시야로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한 행동도 아닙니다. 성전의 책임있는 자리를 맡아서 부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된 것을 보시고는 견딜 수 없어서 자기 옷의 허리끈을 풀어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슨 모습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악, 보다 정확히는 타락한 종교세력과 투쟁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은 단순히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만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쁨과 평화를 위해서는 먼저 그 기쁨과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을 몰아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기쁨, 그리고 만인의 행복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랑으로 자기를 양보할 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기에 주님은 기득권세력을 징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악당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자기의 악행을 마음껏 저지르게 놓아 둔다면 결코 그 사회는 평화와 행복이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는 먼저 악당을 제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채찍을 휘두름과 동시에 아버지의 집, 즉 정당한 자기집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집을 정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의 탐욕으로 찌든 세력이 아버지의 집을 더럽힌다면 아들 딸된 우리가 그 집에 침입한 사탄의 세력을 내어 쫓고 그 집을 깨끗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일을 보고 참지 않고 분노를 발하는 것, 그리고 그 분노를 행동에 옮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권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의무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면 본문의 “만들지 말라”란 말은 현재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과거 우리 주님의 때에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도 그 명령이 유효함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부탁이 아니라 금지의 명령입니다. 즉 “만드는 것을 중지하라”라는 단호한 명령인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러한 주님의 명령이 지켜지지 않자 다음번 두번째의 성전 정화 사건 때는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란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더 매섭게 징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행동은 상반된 반응을 일으킵니다. 주님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더 격노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세력들, 주님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주님의 행위에 대하여 거칠게 항의합니다.

아마 이들은 성전에서 장사해서 이익을 얻는 상인들이나 그 관계자, 또는 제사장들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장사를 못하게 하는 주님의 행동에 대해서 뉘우치거나 자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이익을 해한다고 원한을 품고 주님에게 거칠게 항의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글 성경본문은 표현이 약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답하여”가 아니라 ‘정죄하여, 비난하여, 송사하여’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므로 그들은 직접적인 항의가 아니라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표적타령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권위를 입증할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니가 뭔데 이러느냐?”
예수님은 성전 관계자도 아니고 왕국이나 로마당국의 고위관계자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세속적인 권위도 없는 주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성전을 정화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권위를 받았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식적인 권위가 없이 성전정화를 위한 운동을 하거나 부패한 교회를 비난하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물어 볼 겁니다. 아니 비난할 겁니다.
네가 과연 누구로부터 그런 권위를 받았느냐?
하하, 누구로부터 받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열심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회복시키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주님처럼 “성전을 허물라 그리하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지으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도저히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주님의 제자이며 그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정화할 책임과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땅의 교회는 심각한 도덕적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대하고 화려함 뒤에 추함과 역겨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의 회인 교회는 마치 사탄의 추악한 탐욕의 교를 신봉하듯이 돈과 물질을 숭상하고 그를 차지하기위한 추악한 음모와 인간적인 질투와 사악한 계교가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는 위기상황입니다. 적어도 이 땅의 교회는 위기상황입니다. 더 이상 성령의 역사를 찾아 보기 어려운 교회
그리스도의 본을 더 이상 따르거나 존중하지 않는 교회
하나님의 법이 땅에 떨어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내재하시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성도가 아니며 더 이상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아닙니다. 거룩한 능력이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하여 권위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위기상황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현실을 정화하기위해 허리끈을 풀어 채찍을 만들어서 부정과 불의를 몰아내고 그리스도를 위한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바로 아버지의 집을 거룩하게 지킬 그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거룩하게 회복시키고 그를 개혁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 교인들이, 우리 성도라고 칭해지는 주의 자녀들이, 그러한 열심으로 세상과 교회의 부패에 대해 분노의 채찍을 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그분의 집이 더럽혀 지는 것을 보아 넘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나님의 전을 성결케 하는 일에 동참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1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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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악"에 대해서 저는 가끔 참 영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망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생명을 불어넣어줬다면, 악은 인간을 유혹할 때, 탐욕을 불어넣어줍니다. 후~ 거봐~ 꿩먹고 알먹고~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돈도 벌고, 봉사도 되고~ 경계선에 아슬아슬 서면서, 매력적으로 유혹합니다. 거기에 자꾸만 굴복하기 시작한 교회는, 현대에 와서, 이렇게 놀림 받습니다. (주) 예수회사. 종교간판을 달고 있는 사업체라는 의미입니다. 조롱받는 교회를 직시하고 있으면, 슬픈 감정이 들고, 먹먹해 집니다.

재벌들이 우리나라에서 욕을 많이 먹고, 존경을 받기 힘든 것은, 자기네들끼리 유대를 형성해서, 서로 밀어주기 때문입니다. 자회사나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가 법적으로 철퇴를 맞자, 이제는 친척 회사와 손을 잡고, 서로 일감을 맡아서 몰아주면서, 서로 잘 살게 되는 탄탄한 구조를 완성해 갑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장사하는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환전하는 사람과 물건파는 사람과 제사지내는 사람이 모두 아는 사이라는 점이 놀라울 만큼 들어맞지 않나요. 그런 구조 속에서, 선량한 사람이 피해본다는 것까지 너무나 일치해서 무서울 정도입니다.

자본의 주특기이자 필살기쯤 되는 것이 몇개 있다면, 끼워서 함께 팔기, 가격을 일정 수준까지 담합해서 균형 유지하기, 시장점유율을 올린 후 수수료율(혹은 가격)을 절대 내리지 않기 등 몇 가지 핵심스킬만으로도, 회사의 위험부담은 전혀 지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에게 부담을 떠넘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자제하느냐에 따라, 더 좋은 회사 혹은 이익에 물든 회사로 선을 나눠보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예수님의 명령은 좀 더 가혹하고, 확실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의 말씀은 높은 기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전에서의 장사를 금기하고 있습니다.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깊게 묵상하게 합니다. 작은 이익이라도 남겨서 함께 나누는 곳이 아니라, 목적 자체가 이윤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익집단이 아니면서도, 매주 모이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속된 말로, 종교환자라는 말까지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핵심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인들이 하나둘 바로 서고 회복되고, 교회가 장사를 그만두고, 올바른 가치들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로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일어나 빛을 발하라 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말을 리모델링 장사 같은 불필요한 일을 하면서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 생각일랑 당장 집어치우고, 정신차리고 일어나 올바른 행동을 위해서 움직여서 빛을 발하라 라고 감히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가끔 이런 황당한 생각까지도 합니다. 재벌이 더 빨리 존경을 받는 날이 올까? 교회가 더 빨리 존경을 받는 날이 올까? 한 쪽은 자본의 지배세력이고, 한 쪽은 종교나, 정신계의 지배세력입니다. 공통점은 부패할수록, 욕먹으며, 깨끗할수록, 사랑받는다는 점입니다. 하기야 거의 모든 지배세력이 마찬가지겠지요. 부패할수록 놀림받고, 깨끗할수록 존경받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또 흘러도, 깨끗한 집단으로 서 있을 때,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맑은 힘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오늘날 기독교가 맑은 힘으로, 세상에 아름답게 서 있는 모습을 간절히 꿈꿉니다. 부질 없는 꿈이 되지 않도록, 고민하고, 행동하고, 죽는 날까지 마주해야 할 문제겠지요. 왜나하면 영리한 악은 오늘도 유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이방인의 뜰을 만들어~ 자본과 나란히 마주 걸으면 폼도 나고 근사하잖아~ 그래서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경고했나 봅니다. / 2013.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