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3월24일/예수와 세례 요한(요한복음3:2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3. 26. 12:4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24일 주일 예배

예수와 세례요한 (요한복음3:22-)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는 주님의 부활절입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주님의 부활절에는 기쁨으로 참여하지만 주님의 고난은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에 참예하려면 그와 함께 고난에도 참예해야 함을 잊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 대형교회 목사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자기가 그리스도인 듯 합니다. 그들은 신도들이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영광을 훔치고 엄청난 부를 향유하며 마치 자기가 중세의 종교 귀족이나 신흥재벌인 듯이 여깁니다.
오늘날 공공연하게 자기를 그리스도로 포장하는 사이비 교주들을 제외하고도 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실상은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주께 가야할 영광을 가로채고 주께 갈 돈을 가로채고 주께 갈 칭송도 가로챕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모든 돈은 신도들의 헌금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더 이상 낮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정치권과 유착하여 신도들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종교를  이용하여 권력과 부를 누리는데 이것이 부족하여 자기들의 생각에는 ‘남주기 아까운 너무 너무 좋은’당회장의 자리를 세습시킵니다. 사람들이 비난을 해도 전혀 거리끼지 않습니다.

그런 세태에 실망해서 사람들은 교회를 등지고 세상은 더 교회를  욕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달이지 그리스도나 그의 몸된 교회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전혀 이러한 비난과 질책을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께서 다시 오셔서 이들을 욕해도 이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자기네의 이익을 챙길 사람이라고 평가되어 집니다.

이러한 삯꾼 목사들을 향한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여기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오늘날 “나는 흥하여야 하겠고 그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며 행동하는 목사들은 심각하게 자기를 반성해야 합니다.
자,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월절을 맞이하여 성전으로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벌인 성전 정화사건과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바로 갈릴리로 돌아 간게 아니라 유대의 시골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물론 영구히 이주하신건 아닙니다. 그곳에 가셔서 주가 하신 일은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뭔가 좀 연결이 됩니까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 물이 바로 세례를 일컫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물로 죄를 씻음의 표시인 회개의 세례를 주러 가신 겁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으러 주께 나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런 식의 세례를 이미 주고 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이지요. 당시 세례 요한은 살렘 가까운 곳에 있는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와서”와 “세례를 받더라”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과거부터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가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즉 세례 요한을 찾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고 사람들의 반응도 열광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아직 끝이 난게 아닙니다.

‘애논’은 아랍어로 ‘샘’이란 뜻입니다.
지금 가까운 곳에서 두 사람이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마치 세례 주기를 경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원조는 예수님이 아니라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원조일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공식적으로 공생애 첫출발을 위한 세례를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흡족해 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에도 주님에게 자신의 제자 두명을 보내어서 주님이 본격적으로 제자단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원조가 세례를 주고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데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마치 불공정 거래인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배은망덕! 애를 먹고 키워 놨더니만 선배의 뒤통수를 치는 ......... 자 , 우리는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던 때, 즉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은 때가 주후27년 가을이고 요한이 사형당한 때가 주후29년 겨울이었다고 추정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주님과 요한과는 거의 2년간 사역 기간이 겹치는 셈입니다.

그런데 아마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세례가 더 나은 것인가에 대해서 세례 요한의 제자 하나와 한 유대인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본문으로는 ‘변론’이란 말이 ‘아주 비생산적이며 감정이 섞인 격렬한 논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의 제자 입장에서는 황당할 겁니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보 내신 어린양, 곧 메시야라고 증거한 이가  자기들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 조금 도의에 어긋나는 일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아마 유대인과의 변론이 감정적 비난과 격렬한 논쟁으로 변한 것일 겁니다.

이 논쟁이 끝나고 그 제자는 스승인 세례 요한에게 말합니다.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물론 사람들이 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으러 간 건 아닙니다. 왜냐면 세례 요한에게 오는 사람도 여전히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이 많아 져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본문에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요한의 제자의 말을 잘 살피면 아마 요한이 세례를 주는 곳으로 가는 길목쯤에 예수께서 자리를 잡고 세례를 주었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선생님에게 오는 사람들을 도적질 한 것처럼 묘사하쟎아요.
예루살렘에서 요한의 세례장소로 가는 길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세례를 주니까 자연적으로 사람들이 몰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때요? 인간적으로 조금은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사역하고 있으면서 유대의 시골로 와서 그것도 세례 요한이 세례 주는 곳 가까운 곳으로 와서 세례를 줄 필요까지는 없읕터인데 말이지요.
요즘 말로 하면 서울과 부산에서 나뉘어서 목회를 해도 서로 경쟁하지 않고 충분할 터인데 말이지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에게는 지극한 공경의 의미를 담아 “랍비여”라고 부릅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에 대해서는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라고 칭합니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 때문에 출세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게다가 ‘증거하시던’ 이란 말 속에는 아직도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영향하 에 있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별볼일 없었던 사람이 지금 스승을 뛰어 넘는 인기를 누리게 되자 요한의 제자들은 질투의 감정으로 속이 상해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에게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합니다.
제자들의 말도 참으로 과장스럽지요?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당연히 모든 사람이 다 예수께로 간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간 겁니다. 그리고 이 말속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처음부터 온 것은 아니고 요한을 만나러 오다가 인근에 있는 예수를 만나서 그곳에서 세례를 받는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람을 도둑질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먼 곳에서 따로 떨어져 활동한다면 그곳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과 이곳으로 오려고 하는 사람으로 처음부터 확연히 나뉘어 있을 것인데 그렇지 않고 비슷한 곳에서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이리로 오다가 저리로 가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의 지도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과 가까운 지역에서 세례를 주신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면 당시의 물세례는 요단강을 따라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물이 풍부한 지역에서 세례를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막지역이고 물이있는 지역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세례는 장로교의 약식 세례가 아니라 몸이 물에 푹 잠기는 침례를 의미했기 때문에 사람이 물에 푹 잠기려고 하면 요단강의 물이 많아야 합니다.

왜 애논에서 세례를 주었는지도 여기 나와 있잖아요. 그곳에 물이 풍부하다고. 사실 요단강의 전 구간이 한국의 낙동강이나 한강처럼 물이 풍부하지가 않습니다. 이 강물의 깊이는 매우 얕고 때로는 걸어서 충분히 강을 건널만큼 수위가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주려고 하면 풍부한 수량, 그러나 물살은 그렇게 세지 않은 곳이 필요하고 이곳은 요단강의 몇몇 지점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요단강을 따라서 세례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구간에서는 세례 요한과 세례를 주는 지점이 겹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주로 이용했던 것 같습니다. 요단강을 따라 내려 가서 여리고를 거쳐 산길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이 길의 중간에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던 애논이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일부러 요한과 경쟁하려고 그 옆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이 다음 장에 보면 주님은 사람들이 ‘예수가 요한보다 세례를 준 사람이 더 많다’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시고 갈릴로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를 맞이해서 세례 요한은 제자의 말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가 자기의 라이벌로서 자기에게 오는 신자들을 빼앗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많은 사람들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자기보다 많은 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하튼 그리고는 세례 요한은 다시 한번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겁니다. 아무개 목사도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종이며 나도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우리는 동일한 주인을 위해서 봉사하므로 우리교회 교인들이 얼마인가하는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을 마음대로 펑펑쓰고 마치 거대한 권세를 가진 것처럼 목에 힘을 준다면 그건 종이 아니라 주인의 자리를 훔친 도적떼에 불과합니다. 결코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주님은 결코 그러한 사람에게 끝까지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소문이 좋지 못했던 많은 목사들을 알고 있습니다. 한때는 왜 저런 사람들은 저렇게 큰 교회를 하고 벌을 받지 않을까하는 의아심을 가졌을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몇 년전부터 우리 하나님이 교회를 정화하시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서너명의 유명한 목사들의 추문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심지어는 감옥에 까지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팔아서 장사하는 강도요 전체 교회를 해하는 사탄의 이중간첩입니다. 사탄의 밀명을 받고 교회안에 몰래 들어와서 전체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려 교회를 멸망시키려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탈을 쓴 사탄의 졸개들인 것이지요.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에 좌절해 있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메시야가 와서 자기들을 이전의 다윗왕국처럼 멋지고 강대한 나라로 이끌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서 자기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행복해 지는 걸 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부패한 권력자와 부자를 질책한 요한을 그리스도라고 여겼습니다. 아무리 요한이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냥 확 그리스도 해버려?’ 권력과 출세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면 충분히 빠질 수 있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처음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그가 그리스도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님이 처음 개척교회를 여셨을 때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신선하고 그의 이적이 굉장한 것에는 놀랐지만 그를 그리스도로 따르는 제자들이 아무도 없어서 자기의 제자 두명을 예수님에게 보내 주기 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요한은 여전히 강력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이제 겨우 랍비행의 초보입니다. 물론 정식 랍비도 아니고 그냥 랍비라고 일컬어질 따름이지요. 요한처럼 제사장의 가문이 아니라 목수의 자식이며 갈릴리 나사렛이란 삼류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명문가의 후손이 아니기 때문에 가문을 따지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사장같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보통 돈없고 병든 사람들이며 무식한 자들이었고 억압받으며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굉장한 거물입니다. 심지어는 왕궁과 제사장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들에게는 메시야로 여겨지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세례 요한은 단순히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에 볼과합니다. 사람들이 한없이 약세라고 생각한 예수님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요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세례 요한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내세우려하고 포장해서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주님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소리로 규정하고 자기의 모든 영광을 뺏어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주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내게서 도적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에게 보내 주셨기 때문이다’ 27절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제자들이 라이벌로 여기는 예수를 그는 그리스도라고 단언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러한 사실을 너희가 증거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단언컨대 우리는 이런 멋진 사람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젠가 주님은 세례 요한을 평할 때 “인간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우리들, 특히 현대의 목사들이 가져야 할 가장 확실한 자세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게 해야 할 겁니다. 그것이 나에게로 와야 할 영광을 뺏어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인간과 신은 경쟁하거나 싸우는 관계가 될 수 없지요.

단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간이 살아가는데 불과한 것을요.
종종 하나님과 대결하려는 인간이 있습니다. 그걸 성경은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의 나중은 파멸이며 죽음입니다. 사탄 역시 교만함으로 넘어진 것이 아닙니까?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엄청난 지지자를 확보한 목사나 능력자들이 종종 빠지기 쉬운 유혹이 바로 그런겁니다. 그냥 내가 확 그리스도 해버려?

지금 보면 한국에도 스스로를 선지자로 표명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인 것처럼 행동하는 많은 종들이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흥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죽음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멸망하지만 그를 몰라서 따랐던, 속았던 불쌍한 신도들은 지나간 청춘을 어떻게 보상받겠습니까?

젊음을 다 바쳐 사이비 교주를 따랐는데 그가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죽고 났을 때 이미 그 신도들도 노쇠하고 재산은 사라지고 미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하고 그냥 세월만 보냈다면 뒤늦게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기뻐하는 이유를 비유로 들어 설명합니다. 자기는 신랑의 친구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여기서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를 자처합니다.

우리가 이 설정을 조금 분석한다면 신랑은 예수님을 신부는 기독교인을 그리고 신랑의 친구는 신랑과 신부를 연결한 중매쟁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신부와 신랑을 연결해 준 것에 기뻐하며 잔치의 주인공 자리에서 물러나 둘의 결합을 한없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가 비록 결혼잔치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친구의 결혼을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처럼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요한 대신에 목사인 우리를 넣어 볼까요? 우리는 세상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개가 마침내 결실을 맺어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중매쟁이거나 소개자인 우리 목사들은 결코 주가 차지해야 할 영광에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우리 목사들이 가져야할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랑이 신부를 맞이 하도록 그리스도에게로 사람들을 인도해 주는 소개자의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 목사의 역할을 제한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목사나 능력자라도 결코 신랑이 되어서 스스로 신부를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거짓 신랑은 신부를 취해서 좋겠지만 거짓 신랑에게 간 신부는 인생을 파멸로 몰아 넣을 것이고 눈물과 후회와 통분으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단이나 사교집단에 속해 있는 자들은 즉시 뛰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자못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걸 조금 더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저분은 반드시 강하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명성은 계속해서 작아지고 나를 따르는 자도 계속해서 감소해야 한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예수님과 요한을 라이벌처럼 묘사했지만 요한은 결코 자기와 예수의 관계를 경쟁관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경쟁이 되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요한의 존재 의의가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사교 집단의 교주나 이단의 수괴들 역시 요한의 이런 겸손과 자족함을 배워야 합니다. 결코 분수를 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인기있는 인간 목사도 결코 하나님을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인들을 신랑의 친구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에게로 바르게 인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한 일과 말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태도는 실로 이땅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어지는 완벽한 귀감입니다. 모든 이들이 닮고 싶어할 수는 있지만 결코 닮을 수는 없는 그런 인물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주인공이되고 싶어 하고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큰 교회의 목사라면 그리스도의 보좌에 스스로가 앉아서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사람들의 칭송과 경배를 받고 호화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유혹에 빠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인데 행동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보좌에 앉은 주인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혹에 빠질 때 그의 삶은 파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요즘 대형 교회 목사들 가운데서 잘못된 처신으로 비난을 받아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난 이단들이 이런 사람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이들의 잘못으로 이들이 비난받는 것이야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들의 패가망신은 이들이 가진 상징성 때문에 전체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해가 돌아 옵니다.

이단 역시 세상사람들이 볼때는 기독교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단들의 잘못된 행태 역시 그 비난은 교회로 돌아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개 목사 한명의 잘못은 세상사람들에게는 모든 목사들의 잘못으로 여겨지고 이는 결국 그리스도에게까지 해를 끼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내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단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그래서 그들을 결혼하도록 맺어 주는 중매쟁이, 소개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겸손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낮추어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난주일을 맞이 하여 과연 내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서 역할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도 모르게 그리스도가 되어서 그의 보좌를 차지하고 그에게로 가야할 영광을 훔쳐가고 있지 않은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과연 어느 길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은 고사하고 그에게로 가야할 영광만을 도적질 한다면 그의 결국은 영벌일 것이며 그가 인도하는 자들 역시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드는 큰 해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한번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2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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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지난 밤 저는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당연히 꿈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도 않는데, 아침에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사익과 공익에 관한 생각들이 계속 당황스럽게 겹쳐 지나갑니다. 개인이 사익을 좇아서 사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개인이 남의 이익을 좇아서 살 때, 그 노예근성이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고 따를 때, 혹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을 때, 사익을 좇아서 산다면, 그 때부터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 권력남용이 되는 것이며, 마치 자신이 "신"처럼 대우받기를 즐기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호화로운 대접에 익숙해져가고, "어딜 감히" 라는 막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내가 ㅇㅇ인데...", "아니, 이것들이" 라고 목에 힘주고, 어깨에 힘주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추악하게 몰락해 갑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특히 좋은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몰려들고, 따르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 낮은 곳"을 추구하면서 움직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경쟁의 룰을 파괴하는 심각한 행위입니다.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식으로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내가 지금은 인기는 있는지 몰라도, 주인공은 결코 내가 아닙니다. 저 사람을 봐주세요. 내 역할은 여기까지 입니다. 라고 스스로 조연을 자처하는 셈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기독교 전반의 가장 큰 문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서, 크고 화려하게 떠들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이렇게 잘 나가고 있습니다. 이 사진들을 보세요. 라면서 호화로운 마케팅을 하는 것이 종교입니까? 그렇게 폼잡는 것은 기업 마케팅이나, 광고에서나 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1등입니다. 라는 멋진 말은 종교가 가져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종교가 향해야 하는 곳은, 저기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든 줄 보세요.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키고, 다시 세워나가며,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보다 행복한 삶을 향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1등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사람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 있습니까? 슬픈 일입니다.

기독교인은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묵상하며"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고통을 받았고, 비난을 감수하며, 자신의 할 일을 잔인하게 피흘려가면서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통의 순간을 어떻게든 회피하며, 즐거움과 유희만을 좇아가지 않습니까. 비록 할 수 있는 일이 적더라도, 올바른 행동들을 계속해서 해나가며, 잘못된 것에 손대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하나 둘 많아지기를 조심스레 소망합니다. / 2013.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