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4월14일/끝나지 않은 길(창세기28:10-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4. 16. 16:36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4월 14일 주일 예배

끝없는 길(재개정 판) 창세기28:10-15

한 사람이 광야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형의 분노를 피해 외갓집으로 도망을 가는 중입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 수시로 불어 오는 모래 바람들, 내리쬐는 햇빛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도적떼들은 그로 하여금 이 여행길을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더구나 동행자도 없이 고독한 길을 걷는 것은 광야를 여행하는 자로서 매우 힘든 일입니다. 더구나 그의 여행길의 목적지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하란입니다. 

그런데 마치 야곱의 여행길이 우리의 인생길과 같습니다. 고독한 여로를 묵묵히 걸어가야하는 우리네 인생길이 오늘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는 광야길 같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길, 때로는 오아시스도 있어 잠깐의 쉼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모랫바람과 뜨거운 태양으로 힘들게 하는, 그러면서도 고독한, 게다가 때로는 강도나 맹수의 위험까지 있는 광야길.

우리네 인생길 역시 따지고 보면 평탄하고 순경의 길보다 어렵고 역경의 길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웃음짓게 만드는 기억보다 힘들게 하고 눈살찌뿌리게 하며 고통스럽게 하는 기억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세월이 더 흐른다면 그러한 것도 다 추억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생길은 결코 만만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압니다.

물론 후회도 됩니다. 그때 이렇게 했을걸.........내가 만일 다시 십년전으로 이십년전으로 돌아 간다면 이렇게 했을 터인데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네 인생길을 잠시 쉬어 갈수는 있지만 결코 되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미지의 길을 끝없이 계속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엄청나게 많이 설교가 되어졌던 유명한 본문입니다. 웬만한 이들은 적어도 대여섯번은 들어본 설교일 것입니다. 한밤중에 빈들에서 하나님과 그 천사들을 만난 이야기는 너무나 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 이 설교본문을 택한 것은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고 넘어 갈 수 없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그냥 무턱대고 본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중에서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성경언어를 공부합니다. 성경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더 자세히 알기를 원함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성경은 단순한 인간의 문학작품이나 기록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의 조명입니다. 성령께서 불현 듯 우리의 눈을 밝히셔야 만이 우리가 성경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도 우리가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보화가 숨어 있습니다. 그 숨겨진 보화 중에 하나를 발견해서 소개할 수 있어서 저도 너무 마음이 설렙니다.

1.한곳이 아니라 그곳이다
28:11에 보면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마치 여행길을 가다가 해가 뉘엿뉘엿해서 아무 곳에서나 길을 멈춘 것 같습니다. 하룻길을 걷고 서산에 해가 뉘엿 뉘엿 지는 때에 주위를 살펴보니 그럴듯한 장소가 보여서 자리를 편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냥 우연히 당도한 장소!

그런데 원문은 조금 다릅니다. “그곳 안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한곳’이 아니라 ‘ 그곳’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기위해 미리 선택하신 장소가 있고 그곳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거칠 것 하나 없는 광활한 사막에도 당연히 길이 있습니다. 망망대해 바다에도 배가 다니는 해로가 있습니다. 뿐입니까? 하늘의 비행기도 항로를 따라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막을 가는 여행객은 길을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방향만을 정하고는 걸어갑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길 어딘가에 나를 만나시기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내가 그곳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당연히 주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나를 만나시기위하여 어떤 때와 장소를 예비하셨고 내가 그 장소에 당도하도록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나를 이끌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보시며 혹여라도 내가 다른 길로 갈까봐 나를 몰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내가 오늘 여기에 당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갈 때에는 중요한 때마다 많은 갈림길을 만납니다. 그러한 갈림길을 몇 번이고 만나서 선택한 결과가 오늘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택이 후회가 되어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껄....껄”할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고 만족하며 주님 앞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르고 한 그런 선택조차도 우리 주님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를 몰아간 결과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오늘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2.첫날밤이 아니라 삼일째 밤에 만나다
실제로 야곱의 집이 있는 브엘세바에서 이곳 벧엘까지는 90km정도가 떨어져 있습니다. 사막의 여행자는 하루에 보통 30-40km정도를 걷습니다. 그러니까 하루만에 벧엘까지 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적어도 삼일길입니다.
지금 야곱은 삼일째 밤에 비로소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곳 안으로 당도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가장 힘들었을 첫날밤에 그를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왜 하나님은 첫째 날도 아니고 둘째 날도 아니고 셋째날 밤에야 비로소 그를 만나셨습니까?

마치 우리네 인생같지 않습니까? 내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는 응답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워서 기도할 때 즉각 즉각 응답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즉각 응답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계시다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가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구나! 아니 아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렇게 외치며 쓸쓸히 세상으로 돌아서다가도 우리는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주께서 지금이라도 나에게 나타나시고 나를 부르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왜 그런지 우리에게 인내하게 하시고 때가 될 때까지 잠잠하십니다. 더욱이 우리는 ‘그 때’가 과연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이 삼일밤에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참고로 우리의 계산법으로는 삼일밤이지만 유대인들의 계산으로는 사일째의 첫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해질 때를 기준으로 하루를 끝내고 밤부터 다음날로 계산합니다.
즉 야곱은 지금 삼일거리를 막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4일거리에 들어왔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지요?

보통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은 해가 져도 완전히 캄캄해 질때까지 계속해서 길을 갑니다. 한낮의 태양이 없는 지금이 오히려 길을 가기는 더 좋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야곱은 지금 마음이 허합니다. 그래서 해가 지자마자 여행길을 접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허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자리에 누운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을 지역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한 신이 보통 삼일거리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각에는 여호와 하나님 역시 삼일까지만 영향을 미치는 신입니다. 이제까지는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 자기 부족의 신이 자기를 보호했지만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길을 가기보다는 일단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 다른 신의 영역으로 접어들기 이전에 시간을 벌기위해 잠자리에 든 것입니다.

3.편재하신 나의 하나님으로
꿈에 본즉 사다리가 땅에 섰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분명히 야곱의 생각으로는 이곳부터는 다른 신의 영역이어야 하는데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랍니다. 너는 아직 모르지만 내가 바로 너희 할아버지 아브라함 때부터 너희를 지켜온 바로 그 신이다. 그리고 여기도 분명히 나의 땅이다. 이제 이곳을 너에게 주마. 너는 ‘네가 혼자인 것 같지. 이제부터 전혀 모르는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텐데 어쩌지 ’이렇게 걱정하지만 여기도 나의 영역이야.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15절에”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자기집안의 신, 여호와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야곱에게 여기뿐만 아니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는 브엘세바에서 삼일거리만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분이 결코 나를 떠나지 않고 지키신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서 함께한다는 말은 운명까지도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그 누가 있어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신의 운명과 나의 운명이 함께라는 말입니다. 게다가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는 포기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는 분입니다.

야곱이 잠을깨고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고 탄식하고는 서원합니다. 21절에“나로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하나님이 그냥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조건이 붙어 있지요? 뭐뭐 해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쓰는 수법입니다. 하나님 뭐 해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주의 뜻대로 무엇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건으로 해석하지 않고 강한 확신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를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과는 전혀 상관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게 갈 축복기도를 빼앗을 흉계를 꾸몄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아버지와 형이 두렵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그 하나님은 , 자기부족이 섬기는 하나님은 아버지의 하나님이고 할아버지의 하나님이지 나의 하나님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거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일거리만 다스리는 지역신이 아니라 전세계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나는 너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너의 하나님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산의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하나님이며 온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운명까지도 함께하신답니다. 인생길을 마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때까지 나와 함께하고 나를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4.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21:1에 야곱이 발행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길을 간겁니다. 그런데 이 ‘발행’은 마치 학생이 소풍을 앞두고 자다가 당일날 벌떡 일어나서 ‘아 잘잤다. 이제 한번 가볼까’하는 즐거운 기분이 드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야곱의 길은 너무나 지치고 고독하며 가기 싫은 길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실에 대한 낙망, 미지의 세계가 주는 공포

그러나 이제부터 야곱은 하나님이 하란에도 계시고 내가 가는 곳 어디에도 함께하시며 나를 지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분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즐겁고 힘차게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세상이 변했습니까? 사막이 오아시스로 변하고 그의 광야길이 수목이 우거진 숲속길로 변했습니까? 아니오 , 아니오. 그의 여행길을 어젯밤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그는 힘차고 즐겁게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5.75세 노총각의 여행길
자, 이제 말씀을 마쳐야 겠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본문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성경을 세밀하게 연구해서 알게된 결과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가 본문을 대하는데 전혀 색다른 시각과 의미를 부여할 걸로 확신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부모의 슬하를 떠나 외갓집으로 피신갈 때 몇 살이었을까요?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이제 겨우 20살을 갓 넘긴 것 같아 보입니다. 쌍둥이 형 에서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야곱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갓집에 가서 사촌들과 결혼을 합니다. 이제까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산 마마보이같습니다. 인생의 경험이 일천해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야곱의 나이는 무려 75살이었습니다. 75!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요즘으로 치면 거의 일생을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살다가 이제 비로소 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순간입니다. 75년의 삶은 지극히 평탄했습니다. 겨우 형과 팥죽 한그릇 쑤어 주는 문제, 그리고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기도를 받은 것. 이게 그의 75년 삶에서 대표적으로 큰 일일만큼 그의 삶은 조용하고 일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평화롭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단 75살에 집을 나서고부터 그의 삶은 사건과 사건으로 점철되어 집니다. 세상의 거짓과 배신에 고통받고 사랑하며 가정을 이루고 생계를 위하여 수고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천사와 씨름하고 등등 다이나믹한 삶속으로 빠져듭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네 삶에서 큰 일은 다 지나갔다. 그래서 나에게 더 이상의 할 일도 없고 낙도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네가 더 놀라운 일을 하게 될 시작의 때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때까지,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는 결코 우리에게 꿈이 사라진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한곳에서 조용하게 그냥 이대로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정해진 일상은 크게 번거롭지 않고 크게 힘들지도 않습니다. 그냥 인간의 삶가운데서 잔잔한 일들이 이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새롭게 나아간다면 이전과 다른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일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끝난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더 놀랍고 더 재미있고 더 신나는 모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멋진 여행길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인생길에, 인생의 여행길에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함께 동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6.하나님의 집
야곱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야곱이 잠이 깨어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지요. 야곱이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난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조금 살을 붙인다면 하나님의 집이 곧 하늘의 문이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의 집’이지요. 그래서 ‘벧 엘’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 벧 엘, 하나님의 집을 보고 하늘의 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를 더 생각합니다.

뭔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때 담이 놓여 있거나 장애물이 놓여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 보다 문에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입니다. 담은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곳이고 문은 사람의 출입을 허용하는 곳입니다. 그러라고 있는 문이 쟎아요. 우리가 어디서나 하나님께 아뢸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과 직통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거대한 건물이나 거창한 조직을 생각합니다. 돌로 된 거대한 기둥들과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돔의 천정, 그리고 돌로 된 벽들. 그리고 그러한 곳에 주님이 더 영험하고 성령님이 더 많이 역사하시는 듯이 느낍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야곱은 자기가 베개로 삼고 누워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서원합니다. 그리고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돌베개를 세우고서는 교회의 기둥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지요. 자기가 어젯밤에 노숙했던 바로 그 장소가 하나님의 집이 될 거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자기 집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어때요, 우리는 야곱의 이 행위에서 결코 거대한 건물이나 장엄한 예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믿는 기도와 간구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고 하나님의 집은 곧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지요. 본문에는 물론 십일조를 드린다는 서원도 있지만 십일조는 다음에 제대로 보기로 합시다.

이제 말씀을 마쳐야 겠습니다. 장소와 때에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만난 그 곳,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나의 운명이 정해지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심을 믿고
반드시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때까지 그가 나를 지키실 것을 믿고
이제까지의 삶을 뒤로하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놀라운 여행길을 시작하는 성도
하나님과 즐겁게 동행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4월 1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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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를 빵터지게 해주는 재밌는 짧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이미 늦은 거다ㅠ.ㅠ" 오늘 본문을 재밌게 이해하자면, 야곱은 지금 큰일 났습니다. 인생길도 늦었고, 75살이나 되어서 길은 떠나야 하고, 게다가 하나님이라는 분도, 어떤 지역만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설마 여기까지 그의 임재가 있겠어? 싶어서, 더 이상 걸어가기가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벧엘에서 하란까지는 머나먼 길이니까요.

이상하지요? 주님은 꼭 그럴 때, 등장해서 위로하고, 격려하고, 다시 일으키십니다. 내가 지금도 함께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계속해서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볼 때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절대로 끝난 것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숫자적 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신체적 건강의 나이, 정신적 열정의 나이 같은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환갑이 넘어서도, 여행을 다니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규정해준 "숫자의 룰"에 동의하지 않고서, 살아가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다르게 보자면, 인생의 절반쯤 지나왔을 때, 돌아보니 이루어 놓은 것이 단 하나도 없으며, 또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할때의 그 막막한 기분을 떠올려 봐도 좋습니다. 얼마나 막막하고, 두렵겠어요. 예전에 자취하던 친구는, 독립하고 처음 자취방에 조용히 누웠더니, 적막함 속에서 마치 감옥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나더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의 두려움도 비슷하지 않았겠어요. 먼 길을 앞두고 있는데, 자신감이 갑자기 떨어진다면, 발걸음을 잘 내딛지 못할 만큼, 갑갑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크게 위로를 건넬 것입니다. "힘을 내라, 계속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할테니", "지치지 말라, 우리가 망설이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을 것이니, 신나게 가보자." 라고 주께서 응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에 대해서, 확신을 얻고서, 걸어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가 와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없다며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패 했다고, 별 볼일 없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롭게 또 걸어가면 됩니다. 우리의 여행길은 끝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삶도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 2013.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