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3월31일/모든 신자들을 위한 예수의 기도(요한복음17: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4. 2. 13:22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31일 주일 예배

모든 신자들을 위한 예수의 기도 (요한17:20-)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왜 부활절이 4월달이 아니라 3월에 있는지 궁금하신 분이 계시겠지만 춘분지나 만월 어쩌고 저쩌고 하는 계산법이 있지만 그건 사실 중요한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 바로 부활절이고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망권세를 깨트리셨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기뻐하며 역시 우리도 영원히 살 것을 감사히 여기는 각종 행사들을 합니다. 왜냐면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사망권세를 깨트리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주님은 지옥권세를 깨트려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땅에 하나님의 법이 통용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행복하며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종이쪼가리(?)와 쇳조각, 돌멩이를 누가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많이 배웠느냐 아니냐를 가지고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외모로 사람을 달리 대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위해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마침내 다시 살아 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이 있기 전에 먼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심과 채찍질과 모진 고초와 무덤 속에서의 삼일간 -어떤 이들은 지옥에서의 삼일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즉 주님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려는 신도는 먼저 그의 고난에도 참예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고난은 싫고 영광만을 누리려고 한다면 부활절의 참된 의미하고는 전혀 동떨어진게 됩니다.
부활이란 죽음이 있어야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려고 하는 설교는 우리 주님이 잡하시기 전날 밤에 하신 기도의 일부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잡하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는데 모두 세가지를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두 번째는 자기의 제자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들을 위한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이 세가지의 기도 중에서 오늘은 마지막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 주께서 잡히시긴 전날 밤에 우리들을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하셨는가?

가슴 아프기도 하고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에게 닥칠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얼굴도 보지 못한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는건 정말이지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위급한 순간에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먹먹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위한 기도는 본문 20절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주님의 기도는 세부분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기도하네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 구절을 조금 바꾸어 다시 번역해 볼까요? “ 이들 제자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전도 때문에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제자들의 말 때문에 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12제자 이외의 신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주를 믿게 될 모든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 믿지도 않았고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장차 믿게 될 사람들인 것이지요. 즉 우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21절에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먼저 주님은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소서!

그래요,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키며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하나된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여러 교파로 나뉘어 있습니다. 수많은 지역교회들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일치는 이런 모든 교파와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안에 있다는 일치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동일한 성경과 신앙으로 일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의 허용범위에 이단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참칭하거나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 어머니를 믿는 그런 사람들까지 허용한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겁니다.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거나 덜 강조하는 정도, 약식으로 세례를 주거나 정식의 침례를 주장하는 정도, 성찬식에 떡이 아니라 빵을 주는 정도, 비록 소소한 차이는 존재할지언정 기본적인 한 성경과 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치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를 수 있을테니까요.

가령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세례를 시행하지만 그 세례가 가지는 의미는 동일합니다. 물속에 온 몸을 담그는 세례, 물을 찍어서 형식적으로 머리에 바르는 세례, 뭐 다른 형태의 세례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세상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하는 표시로서의 세례를 의미하는 것에서는 일치하는 것입니다.

서서 예배드리는 사람, 앉아서 예배 드리는 사람, 눈 뜨고 기도하는 교회, 눈감고 기도하는 교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을 믿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는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 주님은 바로 이런 교회의 일치와 성도의 하나됨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반대로는 우리는 하나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총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기위해, 기득권을 유지하기위해 서로 분리해서 교파와 교단을 나누는 행위는 엄밀히 우리 주님의 몸을 찢는 망령된 행위입니다. 성찬을 오른쪽으로 시작하느냐 왼쪽으로 시작하느냐는 솔직히 아무런 의미가 없음에도 이런 사소한 것 하나를 가지고도 서로 나뉘어 싸운다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분열 때문에 눈물 흘리실 것임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목적이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는 의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것이 어떻게 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이라고 믿게 하는 것인지.

그런데 그것은 간단합니다. 앞에 나와 있잖아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속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하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여기서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서로 서로 에게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속해 있다고 하면 먼저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를 제자 삼으신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인식한다는 겁니다.

내가 만일 그리스도에 속한 자라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나에게 법을 전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과는 상관없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나의 행동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하고 하나님하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해봐야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인식을 세상 사람들에게 심어 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역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보고 “아, 저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더니만 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구나” 이렇게 된다는 거지요.

음, 말로만 설명하려니까 제대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넘어 갑시다.
결론적으로 제일 먼저 주님은 성도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두 번째 기도 역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먼저 언급된 말이 있습니다. 22절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 말을 보다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영광을 이미 제가 성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22절 전체를 해석한다면 “성도들이 하나가 되게 하려고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들에게 주었습니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을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게 의역을 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두 번째 기도는 그냥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세 번째 기도 역시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을 강조하여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조금 풀이한다면 온전히 하나가 된 성도들을 아버지께서 사랑해 달라고 하는 말이 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이 기도가 좀 의아합니까? 별로 중요한 기도가 아닌 것 같다. 그런데요 당시 십자가 형벌에 대해서 안다면 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가 하는 것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의 형벌, 즉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형벌로 인식되어 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이로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것을 사람들이 믿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탄의 자식들이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백성임을 사람들로 알게 하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해 달라고 , 세상이 “아,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들이구나!”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도록 표나게 사랑해 달라는 겁니다.

주님의 네 번째 기도는 24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네 번째기도는 두가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가지입니다.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와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입니다. 즉 신도들이 나와 함께 있게 해 달라는 말과 나의 영광을 신도들이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의 두가지 기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주님이 계신 곳에 주님과 함께 한다면 자연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므로 이 기도는 한가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해 달라는 기도인 셈입니다.

주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주님은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요? 그분은 하늘 보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곧 성도들이 자기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여 천국으로 올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인류구원의 거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되어지는 것이지만 주님의 제자들이나 주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 성도들에게는 거대한 재앙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주님과 같이 있다가, 혹시라도 나사렛당으로 몰려서, 혹시라도 예수쟁이라는게 발각되어서 나도 사형될 까봐서 주를 부인하고 세상으로 흩어질 수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다신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하나 더 생기는것에 관대해야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일파가 아니라 유대교의 이단이라고 인식되어지면 로마의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신교의 교리상 다른 신을 부정하게 되고 이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되기에 국가의 박해를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배교의 위협을 이겨내고 천국에서 승리의 개가를 울리기를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엄청난 박해를 이겨왔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지상의 어느곳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길을 바로 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힘들고 손해보는 일이며 재미가 없는 일처럼 보이며 그러므로 이 성도들이 여전히 주님을 따르고 그의 법대로 행하여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면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 즉 돈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며 공산주의 유물론 하에서는 무신론이라는 신념이 하나님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의 은밀한 죄악된 본성이 , 탐욕의 성품이 하나님의 법대로 이땅에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푼의 이익을 위해 독사처럼 서로 싸우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며 그것도 모자라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면서 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 살았다가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항상 경쟁에서 뒤져서 가난과 고통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성도들을 위한 기도로 이들이 변절하지 않고 , 좌절하지 않고 온전히 주의 길을 따르다가 천국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들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더라도 이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해 달라고 ,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 보호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천국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때까지.

뒤이은 주님의 기도인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이란 말은 앞의 말과 비슷한 전개입니다. 즉 영광을 단순히 보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함께 누린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면 그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과 함께 있게 해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주님의 부활의 기쁨에 함께 참예하기위해서는 결국 이전의 고난에도 동참해야 하며 이땅에서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그의 뜻대로 살아야 만이 결국은 주님과 함께 있어 그에게 주어지는 영광에 함께 참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기도는 조금 더 이어지지만 뒤에 나오는 구절은 본 장의 결론이자 후렴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간구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주님의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크게는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된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해 달라는 것이며 이땅에서의 삶속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힘입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된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되겠지요.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죽어서는 천국으로 올 수 있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밤에 우리를 위하여 , 우리의 전 생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 무지막지한 고해와 같은 삶가운데 저들만 남겨두고 갈려니 너무 저들이 불쌍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지키시고 보하하시며 사랑해 주십시오. 저들을 천국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내용도 그렇지만 기도 자체를 생각해 보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 주님은 일생일대의 대 사건을 앞두고,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솔직히 신이라서 아프지 않고 , 아무렇지도 않고 그냥 마술처럼 십자가 사건이 지나가는게 아닙니다. 그는 채찍에 맞으시고 침뱉으심을 당하였으며 가시관에 피흘리고 창에 찔렸으며 십자가에 못박히는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보내시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이 흩어지는 것을 목도하셨고 그들의 배신을 감내하셨습니다.

어제까지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태도를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외침을 들으셨습니다. 억장이 무너진다고 해야 합니까?
주님은 자기의 사랑을 배신당하셨습니다. 주님의 삽자가 죽음과 부활은 너무나 엄청나고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주님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이 잔을 마시지 않도록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와중에 주님은 신기하게도 제자들과 성도들을 위한 기도까지 하셨다는 거지요.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과 평화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짓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그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모든 신자들을 위하여 하신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그 기도에 맞는 삶을 살아 갑시다. 성도들의 하나됨, 그리고 하나된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제대로 살아 갑시다. 사랑, 그리고 희생, 그리고 양보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죽어서는 하늘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3년 부활절에는 우리 주님의 우리를 위한 기도를 생각하며 더 멋지고 힘차게 그리스도를 좇아 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3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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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상당히 이색적인 부활절 설교라서 들으면서도 깜짝 놀랐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부활절을 기뻐하고, 즐거운 내용의 설교가 나올텐데, 올해는 어쩐지 "의미중심적"인 설교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가? 나아가 하나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하나되는 삶에 대해서는 저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사고의 흐름상 이렇게 연결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여하튼 포도가지가 저 홀로 떨어져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기독교가 욕먹는 이유가 열매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너무 가혹한 표현일까요. 다른 사람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방해가 되고, 짜증이 되고 있다면, 참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요즘은 이런 일이 워낙 일상화 되어 있어서, 조금은 착잡합니다. 열매를 맺기 위한 비결은 다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입니다. 소통입니다. 저는 갑자기 재밌는(?) 개그가 생각이 납니다. 참다못한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아니 성경책이 그토록 많이 보급되었고, 팔리기도 잘 팔린다면서요, 교인도 많다면서요, 그런데 왜 세상이 이 모양인가요?"

그 개그 속의 하나님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아이구야, 그러니까 제발 성경책 좀 펴서 봤으면 좋겠구만,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제발 좀 생각해 봤으면 좋겠구만." 이걸 바꾸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책 들고 다니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교인의 숫자가 많은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성경도 보고, 예수님도 묵상하는, 한마디로 제발 좀 올바르게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영과 육으로 힘을 줄 수 있는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 속성상 더 낮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문화는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높은 곳을 추구할 때, 고생을 자처하면서 낮은 곳을 볼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오늘날 기독교인이 꼭 생각해 봐야할 지점이 아닐까요.

조금 색다르게 생각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가진 게 99마리의 양이 있는데, 저 쪽에 1마리의 양이 있다면, 부자의 경우라면 저 1마리를 어떻게든 차지하고 싶어서 욕망합니다. 오늘날 부패한 거대집단이 다들 그렇게 남은 1마리까지도 싹쓸어가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해 지는 양극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 물결을 막을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다며, 원래 정글이라며 합리화 하면 다 일까요? 저는 우리 모두가, 반칙과 싹쓸이 문화를 끝내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르게 말해, 가진게 많아진다 할지라도,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진게 없다면, 함부로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힘내서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살점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처참한 십자가를 져야 했던 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를 잊어버린건 아닌지, 자꾸만 되돌아 보게 됩니다. / 2013.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