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대 국가의 성격, 고구려의 초기와 미천왕

시북(허지수) 2013. 3. 22. 17:46

 이제 본격적으로 삼국시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왕 이름들이 나올테고, 여러가지 제도가 등장할 테고, 한국사가 "벽"으로 느껴질 수 있는, 첫 위기(?)이기도 합니다. 우선 고대 국가의 성격 및 고구려와 가야의 발전에 대해서 살펴볼텐데, 일단 배경지식으로 고대국가의 성격에 대해서 세심하게 생각해 보고 간다면, 한결 삼국시대를 이해하는데 큰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연맹왕국과 달리, 고대국가로 들어오게 되면, 가장 먼저 왕권이 강화되고, 1인 지배 체제가 된다는 것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맹 왕국은 자치를 하고, 각각 신념이 따로 있었다면, 고대 국가로 들어오면 중앙 집권 국가 가 되어서, 위에서부터 질서와 법, 종교 등이 뚜렷하게 제시되는 셈입니다. 이제부터 좀 재밌게 써야 할텐데... 하하.

 

 예컨대 특징 중 하나인 "세습"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기분 좋게, 내가 1인자라고 상상합시다. 이제 나의 시대가 끝나고, 내가 누리던 것을 누군가에게 줘야 합니다. 이 때 그 자리를,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바로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내 형제, 혹은 내 아들에게 바로 줄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게 가능하려면, "아주 강력한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의 반대를 압도할 만큼 힘이 있어야, 세습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연맹 왕국처럼 이름뿐인 허수아비 왕이라면, 그 왕은 역할이 끝나면 즉각 교체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이 들어올 뿐이겠지요. 그런데, 고대 국가는 왕이 계속 세습됩니다. 쉽게 말해, 고대 국가의 왕은 "절대자"인 셈입니다. 내 사람을 계속해서 왕으로 세워나갑니다. (권력이 집중되다보면, 나중에 서양사 16세기에는 엄청난 명언도 등장합니다. "짐이 곧 국가다")

 

 잠깐 생각해보면, 오늘날 한국에서 일부 종교와 재벌 등에서 세습이 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권력이 막강하다 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타, 닌텐도, 소니 등 유명기업의 최고자리는 세습되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 유리하냐의 측면이 아니라, 그만큼 한국에서 재벌 (혹은 일부종교집단) 이 누리는 파워가 막강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거대한 자리의 세습은 아무나 하는게 아닙니다. 막강한 권한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나도 왕, 내 아들도 왕, 아들의 아들도 왕이 되는 고대 국가는, "중앙 집권 국가"다 라는 것이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

 

 물론 왕 혼자서 모든 지역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이 천하를 얻는다는 식의 말은 로망일 뿐, 실제로는 주변의 측근 혹은 세력자들과 함게 통치를 하게 됩니다. 왕은 기존의 지역 족장들을 잘 달래서, 내 말을 듣도록 당근+채찍을 동시에 제공합니다. 가령, 신라 같은 나라는 골품제도를 통해서 지역의 장들을 육두품이니 오두품이니 자리에 앉혀서 통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 번 좋은 자리로 올라서면, 이 관료화된 족장 집단들은 왕이 아주 형편없을 때가 아닌 이상, 사회가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일조합니다. 또한 일종의 법이라고 볼 수 있는 "율령"을 선포해서, 왕과 귀족들은 이처럼 튼튼한 통치체제를 굳혀나가는 셈이지요. 고구려, 백제, 신라 처럼, 정치적으로 강한 힘으로 중앙 집권 국가에 성공한 나라들은 위기 속에서도 몇백년씩 유지되며 때로는 엄청난 전성기를 달리기도 합니다.

 

 한편 일반 민중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거의 마약 같은 종교"가 동원됩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제가 종교에 대해서 심한 표현을 하는 것은, 종교가 "생각하는 기능을 마비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맹목적인 종교신봉은 당연히 부정적인 점이 많고, 심지어 권력층에게 이용당하기 까지 합니다. 고대 국가 초기에서는 "불교"의 왕즉불 사상이 왕권 강화에 기여하고 맙니다. 왕이 곧 부처이므로, 신성시 하는 셈입니다. 부처에게 무릎 꿇듯이, 왕에게도 무릎 꿇는 것이지요. 지배층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마웠을테고, 덕분에 적극적으로 불교를 수용합니다.

 

 이제 고대 국가의 성격, 하이라이트로는, 왕은 자신이 힘이 있음을 계속해서 증명하고, 귀족과 민중들을 압도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정복 활동"이 되겠지요. 힘을 과시하고 있으면, 감히 대들지 못합니다. 고대 국가들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서로 진출 방향을 정하고, 기회만 되면 그야말로 거침 없이 밀어붙이지요. (여담 - 왕과 민중을 동일시 하는 시야에서, 각 나라의 전성기 때, 그 지역의 사람들이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복 업적들이 안정적인 삶과 언제나 연결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4~6세기 경에 통치자가 자주 바뀌었던 한강 유역의 사람들은 조금 정신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나라의 수도들이 그 나라의 경계선에 있기 보다는, 훨씬 안정적이고 계획적인 중앙 무렵에 많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지요. 권력은 가급적 안전한 지대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 듯 보입니다.)

 

 중앙 집권, 율령, 정복활동, 종교. 이것들은 고대 국가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현대사회와의 유사점까지 찾을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1인자, 리더는 반드시 있고, 법과 시행령이 있습니다. 직접적인 영토정복활동은 없더라도, 간접적인 경제전쟁, 주도권전쟁은 오늘도 각각의 필드(영역,무대)에서 치열하게 진행 중입니다. 종교의 자리에는 이제 이성과 합리성, 과학과 상식이 차지해 들어서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 상식적 사고, 이성적 사고, 합리적 사고, 나아가 비판적 사고 정도가 우리 모두가 통용하고 인정하는 마음가짐이 되었지요. 그래서 오늘날은 역으로 "낮에 산에 올라가 자연과 대화하며, 나무의 이야기를 들어볼래." 라고 이야기 했다가는, "이상한놈" 소리를 듣습니다. 고대에 기존 종교에 반대되는 사상을 이야기 했다가, 이상한놈(혹은 사교邪敎)으로 취급받는 것과 유사하지 않나요? 저는 어쩐지, 고대나 현대나 마이너한 시선을 갖고 있다간 욕먹는 것이 공통점으로 느껴집니다. 하기야 예나 지금이나 다름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쉬운게 아닐지도요.

 

 긴 서론과 기본 배경 이해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어쨌든 국가마다 성장 곡선이 있고, 전성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서 고구려 부터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가슴 뛰는 고구려, 용맹한 고구려, 드넓은 벌판을 달리는 그 느낌의 고구려에도 아니 위기가 있었나 싶지만, 하나 하나 살펴보면 쏠쏠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선 고구려는 1세기 초반에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깁니다. 수도를 살짝 동쪽으로 옮긴 셈인데, 아무래도 동쪽 지대가 탐이 났나 봅니다. 1세기 후반의 태조왕으로 오면, 아예 동쪽의 고대국가 옥저를 정복하고, 외부적으로 상당히 위세 좋게 출발합니다. 삼국 중 가장 빠르게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고, 2세기 후반에는 고국천왕이 내치에 힘을 쏟아서, 내부적으로도 탄탄한 국가를 이룹니다. 부족적 성격인 5부를, 이참에 행정적 성격의 5부로 나누게 됩니다. (이걸 예를 들어 표현하자면, 김가네 지역, 박가네 지역, 하다가 이제는 여긴 경상도 지역, 여긴 전라도 지역, 이런 식으로 행정적 의미로 지역을 나눈 셈이지요. 당연히 기존의 부족들의 힘은 줄어들고, 왕권은 더 강해져서, 눈치 보지 않고 부자세습을 할 수 있을만큼 내부의 힘이 집중됩니다.)

 

 1~2세기 고구려가 이처럼 로켓스타트를 하면서, 패기 좋게 출발한 이유가 뭘까요. 아무래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닿아 있으므로, 제도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중국의 침입으로부터, 백제와 신라를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강한 나라 고구려는 3세기에는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그 위나라의 공격을 받아서 움찔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고구려 입장에서는 중국의 드넓은 땅을 차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무리였을테고, 자연스럽게 남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당시 고구려 바로 남쪽에는 중국이 설치한 낙랑군 세력들이 있었단 말이지요. 이 만만치 않은 세력을 접수하는 주인공이 바로 "미천왕" 입니다! 잠시 그 파란만장한 삶부터 살펴봅시다.

 

 한 때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던 그 사람 을불 미천왕. 사람들이 사랑했던 을불은, 300년경에 고구려의 관리 창조리의 도움을 받아서 고구려의 15대 군주가 되었습니다. 그전의 군주였던 봉상왕이 화려한 궁궐을 짓고 토목공사를 강행하자, (←어딜가나 이런 사람들 꼭 있네요;) 이에 반대하며 임금에게 대들었던 충신 창조리는 을불을 찾아갑니다. 을불은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창조리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리고, 300년 마침내 고구려의 미천왕이 되었지요. 미천왕은 즉위하자마자 미친듯이 중국의 군현 세력들과 대립합니다.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는데 앞장서며, 지금의 평양일대로 추정되는 중국이 설치한 낙랑군 세력을 완전히 축출해 버립니다. 4세기 초반에 일어난 이 거대한 사건 덕분에, 삼국은 이제부터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낙랑세력은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인데, 이게 완전히 축출되고 나니, 4세기 부터는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이 맞닿게 됩니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에 이르러 엄청난 발전을 이루는데, 백제는 거침없이 고구려로 공격해 들어옵니다. 강력한 정복 군주로 지금도 이름이 높은 백제 근초고왕은 그야말로 장난 아니었습니다. (수년전에는 드라마로도 있었지요!) 근초고왕의 맹렬한 기세 앞에, 고구려는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 앞에 서는데... 근초고왕에 맞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의 장렬한 모습은 다음 시간에 계속.

 

여담 - 오늘 잠깐 등장하는 신하 창조리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궁궐을 개축하던 봉상왕] : "임금은 백성을 우러러 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을 보이겠는가" [창조리] :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어진 임금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신이 아닙니다" 저는 지속적으로 고대 사람들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왕 앞에서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할 말을 하는 창조리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아부가 많으면 결국 집단은 몰락하는 것이고, 백성은 살기 힘들고, 반대로, 할 말을 제대로 하고, 제대로 들을 때, 집단은 일어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맹목적인 사고 방식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 왜 라고 묻는 방식, 나의 의견을 가지고 있는 방식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