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 2012) 리뷰

시북(허지수) 2013. 4. 5. 16:06

 90년대 영화 딥 임팩트에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요즘은 (책을) 읽는 시대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시대 라고요.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도 이제 읽어서 즐기는 만큼이나, 보면서 즐기는 분들도 많을 듯 합니다. 그야말로 글자문화를 압도하는 영상문화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인 중에는 제발 블로그에 각종 장면이나 영상클립이라도 넣으라고 권유하는 분들이 있는데, 꿋꿋하게 글자만 쓰고 있는 저도 참 고전적인 스타일입니다. 하하. 여하튼 안나 카레니나 참 좋았습니다.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점이라고 한다면 화면의 화려함과 각종 연출력이 매력적입니다. 각 장면들을 상당히 정성스럽게 찍었다는게 느껴집니다. 단점은 조금 산만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이랄까요. 당연히 장편 소설의 내용을 전부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압축 되어서 휙휙 지나간다는 인상을 간혹 줍니다. 톨스토이의 장점이 치밀하고 정중한 심리표현 이라면, 영화 안나 카레니나는 아름다운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각 인물의 세밀한 감정까지 모두 읽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금 빠르게 진행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평점을 살펴보면 재밌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체로 여성 분들이 이 작품에 우호적이고, 영화의 시선 역시도 안나의 감정을 묘사하는데 많이 할애되고 있습니다.

 

 

 사실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불륜이나 이혼, 혹은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에만 머무르지 않으며, 이런 질문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람이 무엇인가 용기를 내어서 결정했을 때, 타인이 거기에 대해서 심판하는게 정당한 것인가?" 조금 다르게 써본다면, 우리가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보란듯이 비아냥 하는게 올바른 것인가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비극에 속하는 이야기지만, 우리의 행동이 "혹시 누군가의 비극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하는 묘한 매력도 있습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자, 영화 초반, 정계에서 잘나가는 정치가의 아내인 안나는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면서 부족할 게 없이 사는 듯 보입니다. 아들도 있고, 남편은 유능하고, 한 가지 빼고는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없는 것 한 가지"가 아주 위력적입니다. 바로 일상의 행복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녀에게 일상은 답답함이고, 지루함이고, 반복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탈을 꿈꿀 수도 없고, 일탈을 해볼 수도 없습니다. 외부적으로는 만족스러울지라도, 그녀의 내면은 마치 황량한 사막 같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통찰은 상당히 유용합니다. 물질적 성공은 결코 행복의 완성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안나에게 과감하고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남자가 있으니 바로 젊은 장교 브론스키 입니다. 우아한 안나에게 반해서, 브론스키는 거침없이 적극적으로 표현을 합니다. 더욱이 말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확실하게 애정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안나를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가지도 않고, 그녀와 함께 있기만을 생각합니다. 애정에 충실한 것을 넘어서, 거의 안나에게 충성하는 수준입니다. "당신과 있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젊은 남자의 훈훈한 공세에, 안나는 마음이 서서히 움직이고, 결국 두 사람의 금기된 사랑이 시작됩니다. 숨길 수 없는 만남은 결국 드러납니다. 여기서부터가 본편이라고 봐도 좋겠지요.

 

 안나는 굉장히 용기 있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브론스키의 아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정치가 카레닌, 그러니까 남자 입장에서 볼 때, 안나는 분명히 불륜을 저지른 "나쁜 여자"가 되었지만, 안나가 감정을 표현하는 대목도 매우 선명합니다. 그녀 입장에서 본다면, 젊은 연인 브론스키가 내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제대로 숨을 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빈껍데기 같은 결혼 생활에 지쳐 있던 그녀는, 이제 브론스키로 인해 활력 넘치는 삶의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아! 이게 사랑이구나!" 라고 외치는 그녀의 각성된 모습은, 그야말로 다층적입니다. 어쩌면 안나에게 브론스키는 "새 삶을 향한 구원"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안나의 용기는 계속 됩니다.

 

 더 이상 안나는 딱딱하고 고정된 삶을 살아가지 않고자 발버둥 칩니다. 당당하게 브론스키와 새 삶을 위해서 전진하려고 마음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요. 주변의 냉소적이고 따가우면서도 잔인한 시선들이 거침없이 밀려 들어옵니다. 몸을 함부로 굴린다느니, 부도덕한 여인이라느니, 명예를 손상시켰다느니... 등등 저마다 안나를 향해서, "심판관"이 되어서, 마치 아주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인것 마냥, 타인의 마음을 완전히 뭉개버립니다. 또박또박 들으라는 식으로 못박는 대사들은 엄청납니다.

 

 안나는 다른 삶을 시도해볼 용기가 있다지만, 한편으로는 강철 같이 강인한 마음만 있던 여인은 아닙니다. 그녀도 사람인데, 그런 험한 말에 왜 속상하지 않았겠어요. 자신의 사랑이 사회에서 멸시와 냉대를 받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쯤에서 안나의 입장이 잠시 되어보면 어떨까 합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이쯤에서 그만 끝내고 남편에게 용서를 빌고, 감정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충분히 현실적이지만, 어쩐지 굉장히 슬픈 선택입니다. 이렇게 산다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병으로 먼저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둘째, 위험을 감수하고 끝까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오래도록 이어지겠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있다면야...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사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변화무쌍한 마음인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 또 다른 연인이 되어가는 레빈과 키티가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너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땐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어요" 이렇듯 마음이라는 것이 내 마음 조차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속성상 한 곳에만 고정되거나 영원하기란 굉장히 어렵거나 불가능한 건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안다고 단언하는 것은 거의 오만한 판단에 가깝습니다. 사랑이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그것이 영원할 수 없기에 치명적이고 아픕니다. 이렇게 상황을 놓고 본다면, 레빈과 키티는 천생연분 입니다.

 

 서로 호감이 있었는데다가, 날이 갈수록, 서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키티가 정성스럽게 레빈의 형을 간호하는 장면은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레빈 역시도 "삶의 의미"를 탐구해 나가는 태도가 진지하고 멋집니다. 문제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펼쳐지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위험한 사랑 외줄타기 입니다. 아슬아슬 합니다. 급기야 안나가 브론스키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비극의 절정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이 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야 다양합니다. (내가 사랑을 깨고 빼앗았으므로, 그 반작용으로 "나도 혹시.."라는 불안이 커져가는) 불륜극이 가지는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고, 또는 안나 스스로가 애정에 대한 욕망이 너무 컸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도 접근해보면, 그 탓을 안나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브론스키가 계속 뜨겁게 안나를 향해서 애정을 과하게 표하지 않았고, 현실적 문제로 서서히 애정의 모습이 변해갔던 게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애정의 변질이 아닙니다, 안나는 이제 내 사람이 되었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을 찾아보던 브론스키 였으므로, 그는 좀 더 현실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봐야합니다. 가령 살 곳도 찾아봐야 하고, 먹고 살 방법도 생각해야 하고, 브론스키는 힘든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조금 바빴던 셈입니다. 바쁘다 보면, 세밀하게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기 힘들어 지고, 보통은 이게 싸움으로 변하기 마련인데, 이 다툼이 결국 안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는 모양이 됩니다. 안나의 작은 의심은 점점 자라서, 브론스키의 마음이 돌아섰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안나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녀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멈추었다고, 영화는 근사하게 말해줍니다. 절망 속에서 안나는 열차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다른 세상으로 가보고 싶어했던 안나는, 그 열차를 타지 못한 채, 오히려 그 열차에 의해서, 끝나는 삶이 되고 말았기에, 정말로 극적으로 슬프게 다가옵니다.

 

 애정을 끝내 채우지 못했던 안나의 삶을, 과연 우리는 재판관이 되어서 "더러운 불륜녀"라고 돌을 들고 던질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 비극인 것은 원작에 따르면 브론스키는 사랑하는 사람 (안나) 을 잃고 완전히 실의에 빠져서, 의용군을 편성해 전쟁터로 향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간 셈이지요. 가정법을 쓴다고 해도 의미는 없겠지만, 안나와 브론스키가 서로 미혼인 상태로 만났더라면, 그들 역시도 레빈과 키티처럼 천생연분으로 생의 기쁨을 미친듯이 누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사랑 없이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나 카레니나는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재밌을까를 생각해 보기에도 좋습니다. 사람은 공교롭게도 환경에 적응해 나갑니다. 그토록 화려해 보이고 근사해 보이는 사교계 무도의 장도 막상 자꾸 경험하다 보면 "평범하고 지루한 일"이 될 수 있다는 통찰도 큰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좋은 물건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분명합니다. 원하던 것을 마침내 가지게 되면, 너무너무 설레고 좋다가도, 일주일만 지나면, 뭐 또 다른 신상이 없는지 살펴보기도 합니다. 주어진 것에 대한 만족은 그토록 갖기 어렵습니다. 가령, 잘 걷고, 잘 보고, 잘 듣는 것에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 부자인 굉장한 사람입니다.

 

 많이 가져도 창백하게 불행할 수 있고, 누추하고 적은 삶으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경이로움을 화려한 무도회가 아닌, 마치 변방 같은 시골 구석에서 발견한다는 게,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안나를 통해 볼 수 있는, 적당하게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었으나, 불행에서 출발해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고, 그 짧은 행복은 더 깊은 불행으로 움직여 가는 모습 역시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결론 내리면 보수적일지 모르겠지만, 마무리를 한참 고민 끝에 써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 혹은 사귄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애정 없는 만남이라는 것은, 혹은 차가운 이성만 있는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삶을 불행으로 끌고 갈 수 있는지 경계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서, 그는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입니다. 그의 삶은 어쩌면 빠른 출세와 빼어난 성공이 기다릴지도 모릅니다. 한편 안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있어서,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당당하게 공연장에 나타났다가 온갖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놀라운 점은, 세상이 조금씩 새롭게 바뀌거나, 세상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들로 인해서 입니다. 저는 안나같은 극중 인물들로 인해서 용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껍데기로 살래, 상처투성이로 살래. 저는 차라리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윗대목은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서 빌려와 변용했습니다)

 

 현명하기에 안주하면서 의미 없이 살기 보다는, 적극적인 용기를 언제나 열망합니다. 저는 스스로가 봐도 참 나약하기에 안나처럼 치명적인 삶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레빈처럼 말을 건네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 2013. 04.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