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려의 토지제도 고찰 - 전시과의 한계와 변화

시북(허지수) 2013. 4. 18. 23:32

 정치와 경제(및 토지)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고려시대 복습의 느낌도 납니다만, 하나 하나 그 시대의 분위기를 살펴본다는 느낌으로 접근해 보면 좋겠습니다.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를 큰 흐름으로 본다면, 전시과 시행 - 대농장 등장 - 과전법 시행 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농장은 권문세족이 누렸던 호화로운 깽판이니까 -_-;;; 사실상 중요하게 배워야 할 부분은 전시과라 할 수 있습니다.

 

 전근대, 사람들이 국가에 열심히 일하면 근무대가로 얻게 되는 것은 수조권 이었습니다. 수조권은 토지의 생산량 중 일부를 받는 것인데, 주로 직급에 따라 받게 되었습니다. 쉽게 생각한다면, 각 호봉에 따라서 수조권의 규모가 정해져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아직까지는 화폐경제가 아니라, 사회가 농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곡식과 옷감 등으로 거래를 했다는 분위기를 염두해 본다면 좋겠지요. 즉, 국가에 대하여 일한 대가로, 월급을 화폐로 받는 것이 아니라, 수조권의 형태로 "농민들이 내는 세금을 대신 받아갔다" 라고 보면 됩니다. (수조권은 지금은 없는 개념이다보니, 설명할 때마다 길어지네요. 하하.)

 

 고려가 세워지고 태조 때에는 역분전이 지급되었습니다. 얼마나 공을 세웠는가? 그 역할에 따라서, 개국공신들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주었지요. 예전 통일신라시대 였던 거 같은데, 김유신 같은 장군은 공이 커서 수조권(당시 식읍)만 500호나 받았다고 했는데요. 그와 비슷한 느낌이라 보면 됩니다. 태조 역시도 개국공신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해줘야 했고, 따라서 공을 세운 것에 따라 역분전을 지급 해주었습니다. 이걸 다르게 말하자면, 고려 초창기는 호족 연합 정권이었으며, 왕권이 강하지는 못했다, 호족들의 눈치도 분명히 봐야만 했다, 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초, 피바람이 불어닥치며 개혁을 하지요! 광종입니다. 개국공신을 죄다 숙청해버린 무시무시한 군주 광종이 등장해서, 왕권을 철저하게 강화 했습니다. 복습하자면, 노비안검법도 꼭 광종과 연결해 놓으세요~ 어쨌든 공복도 4색으로 제정하고, 이제 광종 때가 오면, 왕의 힘이 상대적으로 부쩍 강해졌습니다. 호족의 눈치를 보면서 입맛을 다 맞춰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마침내 경종 때가 되어서, 결정타! 시정 전시과가 본격적으로 시행 됩니다. 이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따라서 수조권을 주겠다 고 정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전시과 라는 말은 토지(=전)와 임야(=시)에 대한 권리를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토지를 통해서 세금을 걷어갔고, 임야를 통해서 땔감을 획득합니다. 전시과를 많이 받으면, 먹고 살 걱정은 끝이겠지요. 즉 고위 관직에 오르면, 풍부한 혜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특히 전시과를 자세하게 살펴볼 텐데요. 숫자로 특징을 좀 구분해 볼까요.

 ① 직역(근무)에 의해서 주는 대가, 일반 전시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양반 전시 를 들 수 있겠지요. 문반, 무반, 그러니까 양반에 오른 사람들에게 줍니다. 근무에 의해서 주는 것이므로 세습되지는 않습니다.

 

 한편 군인전시와 외역전시도 있습니다. 풀어쓰면 직업군인과 지방향리에게 주는 수조권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일반적으로 군역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군인 아들은 군인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방도 비슷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향리의 아들 역시도 그 지역의 향리로서 지위가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근무자체가 세습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토지도 세습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또한, 한인전시라고 해서 6품이하 예비 관직자에게 생계 보장용으로 임시로 주는 수조권이 있었는데, 이 정확한 기능에 대해서는 논란 및 연구 중이라고 합니다.)

 

 ② 신분에 의해서 주는 대가가 있습니다. 이게 꼭 문제가 되기 마련이지요. 대표적으로 악명 높은(?) 공음전이 있습니다. 공음전을 통해, 5품 이상의 고위 관료는 대대로 세습 되는 수조권을 받았으므로, 생계가 해결되고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귀족으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공음전으로 땅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고위직에 진출해서 직역의 대가로 또 일반 전시까지 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이들이 받는 수조권의 혜택은 엄청났습니다. (희박하지만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호화로운 생활도 마음만 먹으면 평생 즐길 수 있었지요.)

 

 한 가지 더, 구분전이라고 해서 6품 이하의 하급 관료라고 해도, 그 유가족들에게는 구분전이 지급되어서, 생계가 보장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벼슬 얻고, 출세 하면, 괜히 잔치가 열린게 아니라니까요. 평생의 가난 탈출!) 사실 전근대 사회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보편적인 복지가 아니라, 특정 계층만을 위한 복지 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최상류층은 저절로 아주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고, 중상위 계층도 어느정도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 받쳐주는 것은 처참한 농민들이었지요. 심지어 한 땅에서 조세를 5명~6명씩이나 달라붙어서 수조권을 뜯어가기도 했다고 하니, 자꾸 이렇게 가다보면, 농민들이 몰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휴!!!

 

 ③ 기관에 제공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관청사람들, 궁궐경비, 사원(절) 에게는 각각 공해전시, 내장전시, 사원전시라고 해서, 수조권을 지급하였습니다. 궁핍하게 생활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국가에서 챙겨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 어느정도 대우를 해주었다는 것도 알 수 있겠고요. 사실 굳이 따로 따로 하나씩 다 외운다는 것은 조금 버겁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토지 시스템을 착착 완성해 나갔을 만큼, 고려는 상당히 안정화를 추구했다고 본다면 좋겠습니다. 부패와 외세침입이 없었다면, 고려는 사회기반이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물론 신분제 사회이며, 모두를 대우하면서 돌보지 않았다는 점은 전근대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참, 이중에서 중요한 것은 세습되는 공음전과 양반 전시의 변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시과는 시간이 흐르면서 커다란 모순과 갈등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점도 살펴봅시다. 전시과는 경종에 의해서 시정 전시과가 시행되었는데, 이 때까지는 전직과 현직 모두에게 과전(수조권)을 지급했습니다. 요즘말로 한다면, 국가에서 직역의 대가로, 월급도 주었고, 퇴직금도 잘 챙겨주었다고 볼 수 있지요. 흥미롭게도 이 때는 관품 외에도 인품을 감안해서 전시과를 주었다는 건데요. 인품이 측정되는 것은 아닐테고, 일종의 평판이나, 예우적 성격이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힘있는 집안에 더 챙겨주었다는 느낌이랄까요. 정작, 전시과 제도의 결정적 문제는 시행해보니까, 점점 토지가 부족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고려의 완성으로 불리는 성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중앙제도 확립 2성6부, 전국 12목 규정 및 지방관 파견,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는 등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해 나갑니다. 뒤이어 이 되자, 가만보니 이 토지제도 역시, 손을 보고 뜯어고쳐야 함을 느낍니다. 이제 개정 전시과가 시행됩니다. 인품을 폐기해 버리고, 18등급으로 나누어 관품에 의해서만 지급 을 하게 됩니다. 토지가 부족해 지다보니, 받게 되는 수조권도 축소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갈되어 가던 토지 수조권은, 전시과 시행 100년만에 마침내, 문종에 이르러서, 경정 전시과가 등장합니다. 다시 정하는 전시과 라는 의미인데, 그야말로 전시과 완전판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직들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했거든요. 왜냐하면!!!! 토지가 부족하니까요 ㅠ_ㅠ... 관념을 현대적으로 이해하자면, 국가에 돈이 없으니 연금제도를 손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넉넉히 주다가, 개정 되면서 줄였는데, 이마저도 고갈되자, 아예 연금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역사를 배우면 이런 것을 알게 됩니다. 공무원 연금사태는 고려, 조선, 그리고 지금까지도 슬슬 논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고려는 100년만에 대개혁을 맞게 되는데, 과연 우리나라의 연금제도도 무한하게 갈 수 있을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 중 하나 입니다. 결코 쉽지가 않다니까요. 그러므로, 이제 공무원이나 교사, 공직에 헌신하는 분들은 어쩌면 대민봉사를 열심히 하고, 훗날 적은 연금으로 고생하게 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고, 지혜로운 해결책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모순은 반드시 터지기 마련이니까요.

 

 어쨌든 행정조직이 안정화 되고, 경제적인 정책의 변화를 통해서도, 사회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려는 이렇듯 점점 고위 귀족들의 나라가 되어갔고,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백성들의 세금 부담 (수조권 납부) 도 점점 커져갔습니다. 소수 귀족들의 땅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고,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주는 것 조차 어려워 지기 시작합니다. 전시과의 붕괴가 시작되었지요. 지탱하던 룰이 파탄나자, 마침내 대농장이 등장하고 소수만의 천국이 이루어졌고, 농민들이 빚쟁이가 되고 노비로 몰락하기 까지 합니다. 사회모순이 심해지자, 심금을 울리는 명언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라면서 노비 문서를 태우는 난도 일어납니다. 민중을 끝없이 괴롭히기만 하던 소수 귀족의 사회는, 위로도 붕괴, 밑으로도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이쯤에서 저는 배가 떠오르는데, 배의 한쪽에만 모든 것을 실어놓으면 뒤집힐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문제점들이 등장하기 마련이지요. 물론 지배층이 백성들에게 관심을 안 가지고, 제압하고 회유하기에 힘쓰지만, 언제까지 그게 통하지는 않더라고요. 누군가는 들고 일어나서 결국 바뀝니다. 영원하지 않으니까요.

 

 역사는 먼 옛날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좋은 혜택이라도, 재원이 부족하다면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또한, 바닥난 재정은 한계를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반발은 일어날 것이고, 서로 타협점을 찾아내지 못하면, 일방적으로 비난 받기도 쉽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고, 경제적인 문제가 들어가면, 이러한 갈등 들을 얼마나 조율해 나갈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고려의 붕괴는 토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농장의 거센 입김을 끝내 잡지 못했기에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득권이 신뢰와 존경을 잃어버리자, 그 나라가 안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강한 인상을 줍니다.

 

 오늘의 영감 - 역사에서는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가끔은 좋은 취지 조차도, 한계에 부딪히며 변화를 맞이합니다. 결국 세월에 발맞춰서 계속해서 개혁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수 특권층의 입김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의 큰 문제는 계층이 분리되고, 세대가 분리되어서, 서로를 비난하느라 바쁩니다. 이렇게 계속가서는 곤란합니다.

 

 개혁에 실패했던 고려가 몰락했다면, 우리나라도 부패로 오염되어가면 몰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혜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도전 정신과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며,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갈 때, 할 수 있는 올바른 개혁들에 힘을 실어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괜찮은, 아니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선진국인 척만 하는, 위선의 척척 나라에서는, "나만 왜 이런 걸까"라는 의문 속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시들어갈 뿐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