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고려의 경제 생활 - 소를 이용해 다들 농사를!

시북(허지수) 2013. 4. 19. 23:17

 입에 착착 감기는 유행어, "소는 누가 키우니~" 농사하면 역시 소입니까? 물론 처음부터 이러한 우경이 발달한 것은 아닙니다. 우경은 고대로부터 있어왔지만, 일반화 되어서 다들 소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은 것이 고려 시대 였지요. 이것을 우경의 일반화 라고 하는데, 어쨌든 이번 문서에서는 각종 경제적인 생활 모습들을 살펴봅니다. 빠르고, 쉽고, 편안하게, 중요한 것만 쏙쏙 이해해보면 좋을 듯 합니다. 상식적으로 느껴본다면 더욱 간단할 것입니다. 이름만 살짝 다르지, 지금도 있는 것들이 많을테니까요.

 

 우선 수취제도는 기본적으로 뭐 같습니다. 조세 - 공납 - 역 이렇게 있습니다. 조세는 1/10세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주현에서 걷은 다음에, 조창을 거쳐서, 조운로를 통해서 경창으로 옵니다. 세금은 다 정부로 가는 것이지요. 공납은 특산물을 걷는 것인데, 중앙에서 각 주현에다가 할당해 줍니다. 주현은 이제 특산물을 걷어와야겠지요. 향,부곡,소,속군,속현에 있는 각 호에다가 특산물 내놓으라고 재촉합니다. 주로 이 악역(?)은 향리가 담당하지요. 쇠가죽, 쇠심줄 등 희한한 공납도 있었다니 농민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힘든 공납이었지요. 역은 16-60세까지의 정남에게 부과되는 것으로서, 군역과 요역(각종 공사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수취제도를 어떤 기준으로 세울 것인가 입니다. 국가가 관리하는 장부가 있어야 겠지요. 조세와 공납을 위해서 양안이 만들어졌고, 역을 위해서 호적이 만들어 졌습니다. 이원화된 관리를 했고, 호부와 삼사에서 관리하면서 국가의 재정(회계)을 꾸려나갔습니다. 호적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있던 말인데, 이 기원이 고려시대니까, 참 기네요.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파버린다는 경고도 이제 추억이 되었습니다 :) 이걸 바꿔 말해버리면 호적파기 = 너는 16-60세의 정남도 아니야 이 짐승 같은 인간아! 라는 욕설일까요. 하하.

 

 자, 그런데 고려는 이렇다 치고, 고대에는 그럼 어떤 기준으로 조세-공납-역을 부담시켰을까요? 이게 시험의 단골인데, 고대에는 민정문서로 관리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이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문서에 따르면, 통일신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고요. 서원경(청주)에서의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이 때만 해도 지방관이 아닌 촌주가 직접 작성을 했고, 매년 조사해서, 3년마다 기록을 세밀하게 작성해 놓습니다. 특히 노동력은 중요했으므로, 자세히 조사되었습니다. 고대에는 노동력이 중요했고, 발전할수록 토지가 더 중요해지고, 생산량이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고대에는 민정문서로, 고려에는 양안과 호적으로 관리했다. 이 정도가 핵심.

 

 이제 농민안정책! 농사라는 것은 고려 시대에도 여전히 커다란 근본입니다. 중요하게 다뤄졌고, 농민들을 어느 정도 지원하려는 경향은 있습니다. 고려 태조는 조세를 1/10세로 통일시켜 부담을 감면해주는 성격이 컸고, 흑창도 운영합니다. 흑창은 후에 의창으로 변경되어서 운영되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돕습니다. 흑창과 의창은 고구려의 진대법과도 유사한데요, 춘대추납 시스템으로서, 굶기 직전의 농민들에게 먹을 것을 빌려주는 제도입니다. 농민이 쓰러지고 굶어죽는다면 국가 입장에서도 곤란하니까요. 엄밀히 보면, 복지라고 보기는 어렵고, 말그대로 농민 안정을 위한 마지노선(최후의 선)을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요즘도 생활보호대상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죽게 생겼는데, 그런 아주 힘든 상황마저 국가가 외면한다면, 그건 진짜 깡패 국가 아니겠어요.

 

 경제 활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상대적으로 생산력이 올라갔고, 기술도 발전되었음은 당연합니다. 앞서 언급한 우경의 일반화 도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겠고요. 농업은 시비법(비료기술)이 발달해서 휴경지가 감소되었습니다. 게다가 고려말부터는 최신기술인 이앙법(이모작)이 도입되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남부 일부 지역에서만 시작 되었다는 점도 고려해 두시고요. 원나라에서 들여온 농상집요(이암이 소개)도 있습니다.

 

 밭의 경우는 윤작법이 보급되어서 2년 3작을 할 수 있었고요. 목화도 들어왔습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거의 밀수로... (목화는 반입이 금지되었는데, 문익점이 해낸겁니다!) 물론 혼란스러운 원말기 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목화를 쉽게 들여올 수 있었겠지요. 덕분에 목화로 인해서 사람들의 의복생활은 한결 편안해 졌습니다. 이런 것이 기술에 의한 인간의 편리가 늘어난 대표적 사례지요. 그렇다면 유머지만, 목화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대체 뭘 입었을까요, 속옷도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기술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만들 수 있기에, 이런 것이야 말로 진정한 "창조경제!" (...응?) 어쨌든 우리의 가까운 선조만 하더라도, 화장실을 보고 나서, 지푸라기로 뒷처리를 했다고 하니까요. 생각해본다면, 생활의 편리함은 최근에 정말 놀랄만큼 발전하고 있습니다.

 

 상업과 수공업을 살펴봐야겠네요. 고려 초기에는 관영수공업과 소수공업으로 운영됩니다. 보통 초기에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수공업이나 상업 활동을 관리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후기로 가면, 고려 역시도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이 활발해지면서, 민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후기에는 민영수공업과 사원수공업이 발달 한다는 점. 역시 시험에 자주 나오니까 체크해 둡시다~

 

 도시의 모습은 수도 개경에 시전이 설치됩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서 경시서도 설치 되었고요. 또한 상평창이라고 해서 물가조절을 하는 기구도 있습니다. 관영상점이 있었고, 비정기적으로 시장도 열렸고요. 시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와서 교환하고, 자꾸 반복되다보면, 점점 기술도 발전하고, 그렇습니다. 교류는 다양한 발달을 낳으므로 참 중요하지요. 지방의 경우는 비정기적 시장이 열렸고, 행상이 존재했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 국가에서 재정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관리한 것 두 가지는 중요합니다. 첫째는 소금 전매를 통해서 핵심 생필품 소금을 국가에서 관리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화폐 발행을 시도합니다. 결론적으로는 실패하지만요. 화폐 통용은 조선 후기쯤 가야 교환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지, 그 전까지는 화폐 보다는 주로 옷감과 곡식으로 거래를 했습니다. 화폐는 일을 많이 한 성종이 철전 건원중보 (=우리나라 최초 화폐) 를 주조했고요. 숙종 때 다양한 동전을 주조합니다. 삼한통보, 해동통보, 해동중보... 이거 이름까지 전부 다 외울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선생님들도 다 못 외운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하. 다만 몇 가지만 핵심을 기억하면 됩니다. 소금은 국가가 관리했다, 화폐 발행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정도. 활구라고 해서 은으로 만든 고액화폐까지 시도했으나 역시 화폐의 통용까지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가무역은 교류한게 많았는데 다양한 물자를 모두 파악하고 외우다간 죽어날테고, 중요한 대목인 은의 경로 정도만 확실히 파악해 둡시다. 거란과 여진, 일본에서 은이 고려로 들어옵니다. 댓가로는 각종 곡식 등을 주었겠지요. 그럼 고려의 은은 어디로 가느냐? 선진국격인 송나라로 흘러 들어갑니다. 은을 주고 고려는 각종 사치품이나 서적 등을 구입해 왔고요. 송나라와의 꾸준한 교류를 통해서, 고려는 많은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바꿔 말해, 많은 양의 은과 금들이 계속 송나라로 갔겠지요.

 

 경제생활은 크게 어렵지가 않습니다. 귀족은 뭐 계속 잘먹고 잘살고, 농민들은 어휴... 것참 살기 어려웠더라 입니다. 배경을 복습하자면, 귀족에게는 공음전이 있었고, 관직 나가면 전시과(수조권) 있었고요. 따로 녹봉(일년에 두번 정기적으로 국가에서 주는 옷감과 곡식)까지 나오고 있었으니, 귀족의 경제 생활은 윤택합니다. 생활서비스를 알아서 해주는 노비들도 있었고요. 특히 귀족들은 사유지와 공음전이 결합하면서, 세습되는 부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귀족들이 너무 많은 땅을 가지는 고려 후기가 멸망의 징조라는 것, 벌써 몇 번이나 보았지요. 대농장이 확대되면서 농민들은 더욱 몰락하며 비명소리와 곡소리 나는 겁니다.

 

 농민은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고리대에 삥뜯겨가면서 힘겨운 날들을 보냅니다. 요즘에도 TV에 대출광고가 참 많은데, 대출 문화가 많고 널리 퍼져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서민들이 돈 빌릴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은행에서는 낮은 금리와 높은 대출 이자를 유지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으니, 참으로 서민들은 힘든 환경이지요. 그럼 돈을 안 빌리면 되지! 라고 가볍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제발 아프지만 말자는 바람으로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나가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커다란 경제적 위기가 닥친다면, 빚이 없이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 하지 않겠어요. 그럴 때 고리대가 유행한다면, 정말 끔찍하고 잔인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더욱 심했겠지요. 한 순간 삐끗해서 이자를 못 갚았다가는, 노비로 몰락하고, 자식을 팔고, 서글픈 농민들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몰락한 사람들을 구하는 제도가 2개 정도 있는데, (복습겸) 기억해 둔다면 좋겠습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 공민왕의 전민변정도감, 개혁적 성격이 강하고요. 여하튼, 고리의 대출 대신에 공익적 사업을 통해서, 돈을 저리에 빌려주고, 한편으로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고 엄격한 철퇴를 날리는 것이 국가 입장에서도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고려시대 왕실이나 사원 등 지배층들이 앞장서서 고리대업을 일반적으로 하면서, 짭짤한 이익을 챙기기 바빴는데, 이런 모습은 반드시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높은 지위가 고리대 하라고 있는건 아니잖아요 :) 높은 지위를 즐기고 악용해 가면서, 사채놀이를 즐긴다면 갱생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영감 - 최근에 제가 너무 신경써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초반의 가벼운 취지에서 점점 벗어나는 것 같아서, 초심을 기억하고, 반성하면서, 빠른 속도로 무심한듯 다다닥 핵심적인 대목만 이번 문서에서 정리했습니다. 초심이라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생각해 볼 때면, 자꾸 거품이 끼고, 욕심이 들어가고, 적당히 안주하려는 성향이 강해지면, 그 때부터 흐트러지는 거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잡고, 매일 저녁 일과를 돌아보는 태도를 가져보는게 중요하구나 싶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이만.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