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4월28일/진정한 예배(요한복음4:20-)/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4. 29. 14:0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4월 28일 주일 예배

진정한 예배 (요한4:20-)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본문에 연결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즉 지난 주와 같은 상황, 같은 시간에 일어난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만 제가 따로 떼어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주제인 참 예배,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의 처지를 영안으로 꿰뚫어 본 주님의 신통력에 놀라서 주님을 선지자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되자 이 여인은 갑자기 참 ‘선지자’인 주님에게 도데체 예배를 그리심 산에서 드려야 되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되는지를 물어봅니다.

1.어디가 진정한 예배장소인가?

아마 이 여인은 어디서 예배들 드려야 참된 예배가 되는지에 대해서  궁금했나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은 좀 뜬금 없습니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주님의 요구와 이에 답하는 여인의 대답, 그리고 주님의 여기에 대한 부연 설명처럼 지금 대화의 주제는 남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편을 데리고 오기 싫어서 갑자기 예배를 어디서 드려야 참 예배인지를 물어본 것이므로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입니다.

왜냐면 사마리안 인들은 수가성 옆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참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유대인에게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그 답이 뻔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질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BC322년에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그리심산에 세웠고 이 성전은 BC129년 유대의 힐카누스 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네의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여인이 또 은근슬쩍 물타기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 좀 달라고 할 때부터 이 여자는 계속 말로 얼버무리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물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물 한잔을 주고 이야기를 시직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물을 주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자를 앞에 두고 뭐하자는 짓인지..........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역시 남편이 없다면서 남편을 불러 오지 않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하여 주님을 선지라로 부르면서도 역시 이 여인은 남편, 또는 동거남을 불러 오지 않고 주님의 요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기위해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여인은 주님을 완벽하게 하나님으로 믿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만 많고 행동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심지어 교회나와서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교회안에서 말로 모든걸 다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요. 전적으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그럴듯한 말로 자기를 핑계하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원하기는 하지만 결코 스스로는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귀찮은 것도 싫고 수고도 싫습니다. 다만 이득만을 얻으려고 입에 발린 소리만 하고 앉아 있습니다. 일단 주님의 말을 들었으면 먼저 일어서서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을 요구해야 합니다.

여하튼 이 여인은 지금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함인지 주님에게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되는지를 물어 봅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장소가 중요합니까?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참된 예배입니다. 

우리 주님은 뭐라고 답하시는지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21절에 주님이 그 여인에게 “여자여(귀나이)”라고 부른 것은 결코 그녀를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조차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에는 친밀함과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여 뒤에 이어지는 말입니다. 한글본에는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말’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여자여 나를 믿어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지자가 아니라 신이다. 즉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믿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때요? 예루살렘이냐 그리심산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이냐 그리심산의 기도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올바른 신앙대상을 믿는 것이 참예배의 전제 조건이라는 주님의 대답.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참예배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예배의식에 따라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아니라 다른 신을 섬긴다면 그건 참 예배가 아닙니다. 그건 단순한 우상숭배에 불과합니다.
여인의 질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이어 집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주님의 대답은 어법에는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이나 장소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정어 뒤에는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라고 하는 장소가 나와야 되는데 주님은 장소 대신에 ‘아버지께 예배할 때’만 이야기합니다. 장소를 물었는데 주님은 지금 시기를 이야기합니다. 말이 앞뒤가 안맞습니다.

주님에게는 사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과거에 너희들의 성전이 있었고 지금도 기도처가 있는 이곳이나 현재 성전이 있는 그 곳 역시 참된 예배의 진정한 조건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와 건물을 연결 짓고 참된 예배와도 연결 짓는 통념을 깨는 얘기를 지금 하고 계시는 겁니다. 강단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다. 성가대가 없으면 예배가 아니다. 반대로 피아노가 있으면 예배가 아니다. 또 드럼을 치면 예배가 아니다. 시작종을 치지 않으면 예배가 아니다. 뭐 등등의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숭배 대상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느냐?

‘이르리라’는 말에는  동작의 진행을 나타내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앞의 말씀과 합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무슨 건물이 있느냐 없느냐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인 나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예배할 때가 오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참 예배를 소망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변입니다.

2.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주님의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당시 사마리아 인들 역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은 마찬가지 였지만 이들은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 모든 구약 성경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에서 밝힌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서나 선지서나 시가서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이 된 겁니다.

물론 당시 유대의 사두개인들도 모세 오경만을 믿었습니다. 제사장 계열들이지요.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의 믿음 형태도 뭔가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이들의 예배에 이방신의 제의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이들이 혼혈인들이기 때문에 이교적인 문화가 많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모세오경이외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어둡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완전한 신지식에다가 우상숭배가 혼합되어 그만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상태가 되고 만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의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되고 유일한 신을 섬기고 있다면 다음으로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예배에 이교적 요소나 세상적인 문화가 많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 가고 싶은 것이 바로 헌금봉투에 구멍을 내는 겁니다. 처음 시작의 이유는 무엇이든 간에 지금 그 봉투의 구멍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그걸 거두는 교회가 욕을 먹고 있습니다. 마치 돈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식 같습니다.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네가 스스로 세상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에 제대로 살펴 보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눈으로는 참된 예배에 미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우상숭배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면 그건 참된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3.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글쎄요, 주님이 유대인이라고 너무 유대인 편만 드는거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이 본문을 대한다면 조금 곤란합니다.

우선 ‘구원’이란 말은 헬라어로 ‘소테리아’라고 합니다. 근데 이 말을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예솨’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을 다르게 번역하면 ‘이는 예수가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는 말이 됩니다. 원래 성경을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읽으면 이처럼 단어를 가지고 재미있는 장난(?)을 쳐놓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글번역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모를 수 있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만의 독특한 암시법이 곳곳에 스며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예배를 드리기위한 조건은 우리의 구원이 예수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일 처음 제가 진정한 예배는 그 숭배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요 바로 예수를 주로 섬기는 예배가 중요한 것입니다.

4.신령과 진정으로

비록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되었지만 이제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진짜 참 예배를 드리기위한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먼저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령은 사실 뭔가 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는 먼저 성령으로 인한 진실된 감동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높과 화려한 천정, 돌로된 고딕양식의 예배당, 붉은 카페트, 고급원목으로된 강대상,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합창단, 돈을 주고 고용한 아르바이트 연주자들이 모인 오케스트라, 그리고 십억도 넘어가는 파이프 오르간이 예배를 웅장하고 멋있게 보이게는 할 수 있지만 참된 예배의 조건은 전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교있는 찬양 인도자,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한 율동팀의 화려한 몸짓같은 것도 예배의 참 요소가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 예배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목사가 검은 까운을 입었느냐 아니냐도 전혀 참된 예배의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피를 상징하는 붉은 카펫을 깔고 앉아있느냐, 강단뒤의 십자가가 있느냐, 엄숙하고 분위기있는 건물과 시설들이 결코 참된 예배의 조건이 아닙니다. 참된 예배의 조건은 바로 성령으로 감동된 예배를 말합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지 않는 예배는 전혀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치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우상을 부르는 헛된 몸짓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첨언하자면 성령님은 서로 분열되어 싸우는 곳에는 임하시지 않습니다. 당연히 썩어서 냄세나는 심령들 가운데도 임하시지 않습니다. 진실된 회개와 하나된 마음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만일 주일날 예배로 한곳에 모인 교인들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한다면 그건 결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사랑없는 그곳에 성령께서 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은 ‘진정으로’입니다. 진정은 다른 번역으로는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성령과 예수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만이 참된 예배를 아버지께 드릴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어때요? 주님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직접 ‘진리’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예수안에서 성령안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또 우리는 예배의식은 어떻게 되어야 하고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하고 어떤 형태의 옷과 기구가 필요하고 같은 황당한 생각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요즘 말로 한번 바꾸어 볼까요?

회개하여 깨끗해진 심령을 가지고 주님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갈 것을 소망하며 온맘을 다하여서 아버지께 간구하며 그의 가르침대로 살 것을 다짐하는 예배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체의 형식이 없는 예배, 즉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 우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참되게 예배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혹 어떤 이는 형식적인 예배행위만 계속해서 많이 드리면 뭔가 일이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말이나 허식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진정한 예배의 조건에 장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참 예배에 장소나 의식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보통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상 사람들 역시 영혼과 육체로 인간을 나누는 이분법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성경에서는 영과 혼을 분리하여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서신에 주로 사용되어 있는데 여기서 영은 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사용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처음 우리 인간이 만들어 질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몸에 들어옴으로 우리가 ‘생령’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안에 들어온 영은 자기의 영원한 고향을 항상 그리워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성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해도 그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의 영이 나온 곳으로 돌아 가고자하는 본능적인 경향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란 말은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외형이나 의식이나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를 경외하며 사랑하여 예배해야 비로소 진정한 예배가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때가  지금 오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수가성 여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그가 오시면 알게 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메시야는 헬라어로 그리스도입니다. 아마 여자는 그냥 메시야라고만 말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 역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에서 천대받고 인생이 꼬일대로 꼬인 이 여인에게 메시야는 말 그대로 구원입니다. 자기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말은 ‘언제든지 저분이 오실 때에 저가 선포하실 것입니다’란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미 오셨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경으로 이미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가 그로라.’
 이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말의 헬라어 번역이거든요. 갈릴리의 물위에 걸어오시면서 역시 이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에고 에이미.

우리 주님은 지금도 나를 찾아 오셔서 ‘내가 그로라(나는 나다)’ 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모세에게 나타났었던 바로 그 하나님, 갈릴리 호수 물위를 걸었던 바로 그 하나님, 수가성 여인에게 메시야임을 밝혔던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분은 나에게  찾아 오셔서 나를 믿어라. 내가 바로 그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 명령을 준행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묻습니다. 주께서 뭐라고 하셨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 내가 사랑해야 하는 나를 만드신 내 영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모티콘이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자 비로소 여자는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과의 대화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첫 번째는 참된 예배에 장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참된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겁니다.
네 번째는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섯 번째는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장황하게 참된 예배에 대해서 나열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말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예수안에서 예배해야 하고 허식과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된 예배는 단순히 예배당에서만 예배행위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행해야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한 그러면서도 장엄한 예배의식에 많이 참여해도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예배를 많이 드려도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면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에 대해서 들어 보셨겠지만 예배당 안에서의 생활과 예배당 밖에서의 생활이 다르거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결코 참된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나 행동하지 않고 말로서 은근슬쩍 넘어 가려던 수가성의 여인은 결국 자기가 우몰가로 나온 목적인 물동이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고 동네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보다 행동입니다. 말로만 그럴듯한 예배행위자가 아니라 우리의 신실한 행동으로,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실천하는 삶으로 주님이 요구하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4월 2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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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누군가 나에게 아주 잘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 친절의 동기가 불순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다가오는 친절입니다. 나를 이용해 먹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누구라도 강한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아마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간판을 걸었지만, 입으로는 예수를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예수를 마음의 위안처로 여기며, 행동은 초라하고 형편없지 않은지요... 사람들의 비난에 같이 맞서서 욕하며, 한 푼의 이익이라도 더 탐하며, 위선으로 무장한 교인. 그래서 틈만 나면 편을 가르고 싸우기를 즐기며, 세상과 나는,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특권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자아에 갇혀버린 교인. 이건 냉정히 볼 때, 자기만족을 위해서 믿음을 가지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더욱 만족스러워야 하므로, 자연스럽게 "있어 보이는 것들"에 신경쓰게 됩니다. 삐까번쩍한 건물과, 천상의 노래를 들려주는 듯한 성가대와 웅장한 음악, 그곳에 있다보면 저절로 "아, 나는 바로 살고 있구나" 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쉽지 않을까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채로, 뻔뻔하게 각종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객관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제3자의 눈에서 스스로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과연 예수님이 보실 때 나의 행동이 올바른 것일까? 과연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나의 만족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교인으로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외면하고, 종교생활에 빠져 있다면, 그것 자체가 모순이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저는, "지인들에게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이라서 종종 마음이 흐트러진다고 할지라도, 그 때마다 스스로의 태도를 바로 잡아서, 온화하게 살아가는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무엇인가를 해줄 때는, 그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잘해주고, 친절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마음은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인이라면, 그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행동과 태도로 나타날 것입니다. "친절한 삶", "타인을 배려하는 삶", "인간을 무엇보다 귀중하고 여기고 아끼는 따뜻한 마음", 이러한 예수님의 흔적들이 우리 삶에 조금이라도 묻어 있어서, 사회를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갈 수 있기를... / 2013.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