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5월5일/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요한복음4:2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5. 5. 23:0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5일 주일 예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 (요한4:27-)

이번 주도 역시 지난 주에 이어서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중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 주에는 등장인물들에서 차이가 좀 납니다. 등장인물이 많아 졌습니다. 수가성내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고 수가성의 사마리아인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물론 주님과 수가성의 여인은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주님은 이번에는 참된 예배를 넘어서 참된 양식에 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이건 주님이 아마 우리들에게 뭔가 중요한 교훈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참된 예배에 이어서 참된 양식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이 대목은 기독교의 진수를 풀이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한참 사마리안 여인과 이야기를하고 계실 때 수가성내로 먹을 것을 찾으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 왔습니다. 제자들이 돌아와서 보니 예수님이 사마리안 여자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왜냐면 유대인들은 보통 여자와는 대화를 하지 않으면 심지어 자기의 아내와도 공공장소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남존여비사상은 너무 심해서 여자하고 대화를 하는 것을 멸망의 지름길로 여기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와 대화하는 것은 매우 신기한 일이기는 했지만 제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전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무슨 생각이 계시겠지 이렇게만 여긴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한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성내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옵니다.
이 여자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사실 헬라어로 보면 이 말은 약간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고 확실하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일 수도 있지 않느냐?’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날의 세상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책을 배웁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이들은 교회와 교인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부정적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예수를 믿으라고 강압적으로 단정적으로 이야기 하지 말고 이들이 주께 나아와서 예수를 직접 만나보고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응용한다면 무조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칠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교인들의 행동을 보고,
예수를 믿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세상사람들과 달리 착하고 사랑이 넘치는 지를 보여주고
과연 예수교가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싶어하도록 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이 여자는 왜 물동이를 버려두고 수가성내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만나보라고 외쳤습니까?
예수님이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이 여인을 감복시켰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이 여인을 설득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 여인의 감추어진 비밀을 파헤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이 주효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각종 전도 전략을 내세웁니다. 이슬비 전도니 고구마 전도니 관계전도니 이름도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전도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전도하는 이가 세상사람들로부터 비난 받는 악당이거나 비열한 사람이라면 전도의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하는 이가 세상사람들에게 뭔가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뭔가를 주지 않고서는 결코 세상사람들에게 교회와 하나님을 어필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힘든 원인이 뭡니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지요? 그것은 교회가 여전히 죄악 속에 있거나 하나가 되지 못했거나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희안하게도 교회내에서, 세상사람이 아니라 목사와 신학교 교수들 사이에서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듯한 많은 발언들과 행동들이 보여집니다. 그래놓고 교회의 부흥을 바란다면 그것이야 말로 어처구니 없는 행동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개개교회의 상황이 아닙니다. 전체 한국교회를 말하는 겁니다. 사실 지금 부흥하는 대형교회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중소형교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며 그들의 희생으로 성장하는 것이므로 결코 부흥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는 전체 한국교회를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 사탄의 계략에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자, 이제부터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를 메시야로 소개하는 사이에 제자들은 가지고 온 음식을 잡수시기를 예수님에게 청했습니다.
그러면 그냥 드시면 될 터인데 주님은 또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이 음식을 구해오기 전에 누가 예수님에게 음식을 갖다 드린 걸로 생각합니다.
주님은 사실 영적인 양식을 말한 것이지만 제자들은 단순히 육적인 음식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앞 절에서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인 물과 육적인 물을 가지고 서로 대화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하고 영적인 양식과 육적인 양식에 대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그래요, 세상사람들과 주님의 생각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세상은 항상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이고 무엇을 마시우게 할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세상의 그러한 근심걱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심할 수 없이 육체적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육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가지고 있는 생령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 속에 젖어 있기 때문에 육적인 것에 영적인 것을 종속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적인 삶을 개선하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삶이나 이웃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만일 이웃에 관심을 가진다해도 이것은 이러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나를 더 복 주시도록 하나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목적에서 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라고 착한 일을 많이 한 가정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는 할 겁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나머지는 따라오는 것이지 나머지를 위해서 나에게 하나님이 필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영적인 무지가 한심스러워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무엇인지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34절에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이는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뒷부분에 추수얘기가 나온걸로 봐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목적은 바로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들을 다시금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화해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기위해서는 우리의 죄가 사해져야 하므로 죄없으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비밀스런 양식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양식으로 삼을 수가성 주위의 밭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사실 곡식은 이제 푸른빛을 띠고 있어서 아직 추수 때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에도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말합니다. 이는 분명히 모순입니다. 곡식이 희어졌다는 것은 이미 익어서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아직 밭의 곡식들은 익지 않고 푸른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육의 눈으로가 아니라 영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뭘보지요?
성주위의 밭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수가성에서 여인의 전도를 받고 주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미 영적으로 추수할 때가 된 상태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에 대해서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이어서 육적인 밭이 아니라 영적인 밭에서 추수되어지는 것을 말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인간들의 영혼이 바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란 말입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았답니다. 어때요?
거두는 자는 누구지요? 추수할 일꾼입니다. 씨뿌리는 자는 주님이시고 거두는 자는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추수할 일꾼들인 우리가 이미 삯을 받았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삯은 보상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께서 말씀하신 우리는 알지 못하는 참 양식입니다. 이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죄된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할 자의 받는 삯이 이처럼 영적인 것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들, 추수할 우리들 역시 이 땅에 살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육신을 가진 인간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삯을 이야기할 때는 뭔가 이 지상의 물질적인 것을 내포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된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면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무한대로 공급하실 것이기 때문이며 그는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추수, 즉 이미 익어버린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게 참 양식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물질적인 보상뿐만 아니라 영적인 기쁨까지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구원사역에 동참하는 자는 영육간의 보상을 누리게 됩니다. 천국에서의 상급을 받을 소망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보상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이미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우리의 추수할 일이 매우 시급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미 밭에는 희어져 익어서 추수만 기다리는 곡식들이 가득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께서 말씀하실 때 주를 그리스도로 소개받은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주께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함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를 한번 봅시다. 보통은 씨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같습니다. 씨를 뿌리지 않는 자는 거두지도 못합니다. 씨 뿌린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수하는 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뿌리는 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을 제자들이 거두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 주닙은 자기가 직접 거두지 않아도 우리가 추수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거두러 간 사이에 주님은 한 수가성 여인에게 씨를 뿌렸고 이제 그것이 열매를 맺어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주께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주가 씨를 뿌리고 제자들이 거두는 겁니다. 씨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한사람 한사람 천국 알곡을 거두는 것은 우리가 씨뿌려서가 아니라 주님이 미리 그들의 마음밭에 씨를 뿌리셨기에 가능합니다.
우리의 전도가 성공한다는 것은 주가 이미 그들의 마음밭에 뿌린 씨앗이 우리의 전도로 깨어난 것 뿐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사람들과 우리가 성령의 인도로 만나게 된 것이지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심어 준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 인간이 세치 혀로 엄청나게 황당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자도 함께 즐거워하게 하실겁니다. 사실 목사의 일이나 전도자의 일이나 주의 길을 가는 자의 일들이 힘들고 지치며 경제적으로도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지상의 것이 주지 못하는 큰 기쁨뿐만 아니라 현세의 삶에서도 주님의 보호와 공급하심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수할 동안에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가 주시는 양식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흥청망청 ‘써 재낄(?)’ 정도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너무 곤궁하지 않으며 약간은 남도 돌아보며 살 정도는 될겁니다. 그러므로 뭐 먹을까 뭐 입을까 어디서 살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걱정이 필요없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므로 그가 공급해 주시는 것을 내가 사용하는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십시오. 주의 일을 하고 그의 뜻을 온전히 이루도록 걱정하십시오. 그게 우리가 스스로 의식주를 걱정하는 것보다 먼저 되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의식주 걱정을 해결하는 지름길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뀌면 안됩니다.

그런데 더 즐겁고 황송한 일은 그 추수의 기쁨을 누리기위해 우리가 노력한 것이 없다는 거지요.
다른 사람의 노력이 씨뿌려져서 내가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보면 내가 잘나서 부흥이 되고 전도가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 신앙 선조들의 피와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가령 본문에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그리고 수가성 여인이 동네사람에게 씨를 뿌린 것이지만 이제 주께로 오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을 추수하는 것은 제자들이 할 일이 됩니다. 물로 주께서도 하시지만 제자들 역시 이 일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세계최대의 교회들이 여기저기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신앙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입니다. 그들의 헌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어제의 부흥은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저들의 씨뿌림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씨뿌리지 않습니다. 그냥 열매만 모으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 씨뿌리지 않는다면 이후의 열매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급속하게 팽창한 한국교회는 열매만을 추수하고 더 이상 심지 않았기 때문에 점점 성장동력이 쇠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오히려 있는 것도 까먹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씨를 뿌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도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의 뜻을 행하지 않고 그의 뜻을 이루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한 이웃을 돌보려 하지 않고 내교회만을 생각하며 우리는 더 이상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맞서서 싸우지 않고 내 일신의 안락과 나의 가정을 위한 축복에만 매달립니다. “예수 믿고 복받으세요”란 말 속에서 우리가 의미하는 복은 물질적이며 세속적이고 나만을 위한 복입니다. 그래서는 결코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빈민선교로 큰 교회를 이룬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어있고 더 이상 빈민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게 씨뿌리지 않는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만 모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에 거름을 주지 않고 씨도 뿌리지 않고 열매만을 모으려 하면 어때요?
열매의 개수도 열매의 크기도 당도도 점점 떨어지고 결국 나무는 말라 비틀어지고 늙어서 죽어 버립니다.

한국에서 교회가 쇠퇴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며칠전에 나온 통계로는 한국 천주교인이 무려 522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천주교인이 12억을 넘었답니다. 제가 어릴 때 한국의 천주교도는 겨우 150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려 세배하고도 반이나 됩니다. 같은 기간에 개신교도는 1200만에서 860만으로 1/3이나 감소했습니다. 천주교는 성장하는데 왜 한국의 개신교는 죽을 쑤지요?

왜냐면 열매를 따먹기만 하고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도시의 빈민을 위해 사회 정의를 위해 싸울 때 개신교는 도시의 부자를 위해 개인의 영달을 위한것에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엄창난 돈을 목회자의 사치와 교회의 치장에 사용했지 가난한 이웃에게 뿌릴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핍박받는 자를 외면하고 나만 , 내교회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겁니다.

뭐 어제 신문에 보니까 가나안 교인들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디다. 예수는 믿는데 교회에 실망하고 안가는,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교회에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교인들.
왜 이런 교인들이 생길까요? 현실교회가 저들의 이상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지를 나누며 사람들에게 예수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씨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바로 씨를 뿌리는 것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씨는 이미 우리 주님이 뿌리셨습니다. 그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는 사실 일으키기 어렵습니다. 여인을 한번 보고 남자가 다섯이니 여섯이니 말할 수 있는 신전 통찰력도 없고 손을 얹어 기도한즉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보게 되고 하는 기적의 주인공도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땅에서 씨를 뿌릴 수는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서 씨를 한번 뿌려 봅시다.

이땅에 하나님의 뜻을 한번 이루어 봅시다. 내가 쓸 것을 절약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목전에 있음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절제하고 항상 반성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듬뿍 나누어 줍시다. 나에게 베풀어진 은혜에 감사하고 삽시다.

길을 물었을 때 상대방이 가르쳐 주면 “아, 예”하고 가지 말고 “감사합니다” 한마디 합시다.
남의 발을 밟고 모른척 하지 말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한마디 합시다.
애기 엄마가 힘들어 하면 자리도 양보하고 산모를 보호합시다. 그리고 거꾸로 자리를 양보받았으면 “감사합니다” 한마디 합시다.

남을 보면 말이라도 한마다 칭찬을 해주고 그를 기쁘게 해줍시다. 아주 작은 일이지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씨뿌리는 행위입니다. 이런 씨를 마구 마구 뿌려 줍시다. 기쁨으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한번 거두어 보겠다고 사람들에게 막 친절을 베풀다가 교회 안간다고 안면을 몰수하면 더 큰 역효과가 납니다. 그러지 말고 댓가없이 사랑을 베풉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바르게 살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믿음 속에 행한다면 반드시 주가 뿌린 씨를 우리가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가 거두는 자에게 삯도 주실 것이고 보호하실 것이며 행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일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좀더 심하게 한마디 할까요? 교회에만 헌금을 하지 말고 주위의 가난한 이에게 헌금하세요. 그것으로 씨를 뿌리세요. 십일조의 삼분의 일을 헐어서 이웃과 나누세요. 사회와 나누세요.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추수하는 자의 삯도 받고 기쁨도 누릴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 더불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우리가 모르는 영적 양식으로 배부르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5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일요일날 거리를 걷다보면, 심심찮게 전도지를 나눠주는 풍경을 만나곤 합니다. 예전에는 전도지만 있었는데, 요즘에는 캔디 하나 정도가 같이 딸려 있는 경우도 있고, 휴지 같은 것을 주기도 합니다. 같이 길을 걷고 있는 지인에게 물어봤습니다. 이런 거 받으면 기분이 어때? "아무 생각도 안 드는데..."

음... 교인이라면 감사하게 받을지 모르고, 일반인이라면 별 생각 없을테고, 반기독교의 사람이라면 짜증이 났을 법도 합니다. 저는 오늘 조금 격문을 써볼까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너무 쉬운 형태로 전도를 하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 정직을 추구하며, 이웃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려는 마음은 별로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순수한 신앙이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고 보장해 줄것이라는 믿음이나 확신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실 거라 확신한다면, 당연히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줄텐데, 대부분은 그러지 못합니다.

오히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사회가 부패하든 말든, 내가 가진 것의 가치가 더 상승하고, 남들보다 더 비교우위에 서서 폼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즐기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대학에 떨어졌다거나, 취직이 잘 안 된다거나, 내세울 게 사라지는 순간, 교회 가는 것을 꺼리기 시작합니다. 교회는 벽을 세워서, 높은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축복의 세례 (자리를 하나씩 줘가며) 를 베푸는 공간으로 몰락해 갑니다.

거리에 나가서 차를 나눠주고, 커피를 나눠주며, 전도지를 돌리는 순간에는, 무엇인가 멋진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작은 일에 짜증을 낸다거나, 정작 가까운 사람들에게 못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어버린건 아닐까요? 남보기에 좋은 교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적당히 위로하며 부도덕한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닐까요?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으면 합니다.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 휙휙 쓰레기를 버릴 때라도, 나만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었으면 합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서 꾸미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아갈 때라도, 나만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한 켠의 여유가 있어서,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멋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결단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쉬운 게 아니라서,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시선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올바른 행동을 계속해서 추구해 나가는 모습이 되어가기를 소망합니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것은 머나먼 길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덧 나만의 생각과 고민으로 깊어져 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나의 화려한 성장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이웃과 사회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유명해지고 거대해지기 보다는, 이름 없이 선한 일을 해나가는 단 한 명의 교인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며... / 2013.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