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5월19일/오병이어의 기적(요한복음6:1-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5. 20. 23:49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19일 주일 예배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6:1-15)

오늘날 우리가 돈을 벌어야 하는 근본 이유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염려하고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동양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높은 산위에 도사가 산다고 생각했고 이들이 도를 닦아서 신선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선이 가지는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뭡니까?

첫째는 죽지 않는다는 거, 둘째는 안먹어도 산다는 거, 셋째는 병이 걸리지 않고 도술을 부리고 뭐 이렇게 기타등등의 특징이 나올 겁니다.
저는 그 중에서 안 먹어도 된다는 것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안 먹어도 된다!

안먹어도 되면 뭘 먹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먹거리 걱정에서의 해방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돈으로부터의 해방, 생계유지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류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된 후 끊임없이 가지게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의 형벌인 육체적 노동에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며 다시금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로 인류 역사는 먹을거리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도 원시 부족들을 보면 아침부터 하루종일 사냥을 나가고 사냥에 실패하면 산과 들로 양식이 될만한 나무 열매나 뿌리, 풀등을 채취하는 걸로 시간을 보냅니다. 이들에게는 돈도 필요없고 그냥 이러한 식량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면 안먹으면 죽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한번 먹는다고 배고픔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슬프게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먹어 치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죽지 않고 생존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먹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는 이 불완전함이 우리로 하여금 온갖 재앙과 질병을 불러 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도 역시나 먹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오늘날과 달리 하루에 두끼로 버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두끼를 해결하는 문제도 결코 쉽지 않아서 이들은 항상 생계에 대해서 전전긍긍했습니다.

더구나 척박한 팔레스타인의 사막 땅은 수고는 많이 하고 결실은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음식이 공짜로 제공됩니다. 그러니 이들이 주님을 따르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폭발적입니다. ‘이분이 우리의 왕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분이 우리의 왕이 된다면 더 이상 우리는 병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그렇다, 이분이 바로 메시야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5장에 이어서 일어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이것은 사도 요한이 글을 쓰는 버릇일 뿐 정확하게 5장에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5장과 6장은 약 일년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의 시간적 배경은 주님의 공생애 기간에서 맞는 세 번째 유월절 즈음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한번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적이 있는데 바로 이때입니다. 참고로 유대의 모든 남자는 의무적으로 일년에 한번은 예루살렘성전에 가야했고 그 대부분은 유월절에 갑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휴식하러 가버나움을 떠나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벳세다로 가신 것으로 시작합니다. 벳세다는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의 고향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벳세다까지 거리는 약 6.4km랍니다. 이 먼 거리를 배를 타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 건너편 산에 올라 앉아서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옵니다. 그래서 그만 제자들을 위한 “교역자 수련회”가 대규모 군중집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는지 저녁때쯤 되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산은 마가복음에 의하면 ‘한적한 곳’으로 ‘광야’를 말합니다. 즉 벳세다 인근이기는 하지만 제법 떨어진 황량한 곳이라서 시장이 주위에 없습니다.
도저히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집회를 마치고 사람들을 돌려 보내서 각자 음식을 사먹도록 하자고 건의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처럼 주님은 빌립에게 어디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왜냐면 빌립의 고향이거든요. 아마 빌립이 고향사정을 잘 알겠지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일시에 20000명이 먹을 분량의 빵을 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어 보신 겁니다. 제자들이 각자 알아서 음식을 사먹도록 돌려 보내자고 하니까 주님이 고향인 벳세다를 잘아는 빌립에게 물어 본 겁니다. “어디서 사먹을 수 있니?”
제자들은 몰려온 군중들이 스스로의 일을 스스로 하도록 하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우리가 이들을 책임지자고 말합니다.

이게 하나님과 사람의 방식의 차이입니다.
빌립은 예전에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청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조금 육적인 냄새가 진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빌립을 시험하려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제자교육차원에서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라 그냥 고향이니까 빌립에게 어디서 사먹어야 될지를 물으면서 영적인 시험도 병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 채지 못하고 그냥 돈을 계산합니다. 이백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하다.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의 가치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땅의 가치로 따지면 1200만원에서 이천만원정도겠네요.
물론 그 당시의 가치로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리야가 깬 나드 향유 옥합과 기름이 삼백 데나리온도 더 한다고 한 걸 보면 대강 유추할 수 있습니까?

어쨌든 이백 데나이론어치의 빵을 사도 조금씩 밖에 돌아 가지 않는다는 계산을 내놓습니다. 여기서 ‘조금씩’은 ‘최소량’을 말합니다.
당시 제자들의 회계는 가룟 유다였습니다. 이 사람이 돈궤를 맡고 있는데 항상 간당간당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백 데나리온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백 데나리온으로 빵을 사도 모자란다는 거지요.

그러나 주께서는 이런 식의 해결책을 원한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군중들에게 빵을 해결해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병행기사인 마가복음6:38에 보면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이때 떡이 몇 개나 남았는지 가서 알아보고 온 제자가 바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이고 형제 베드로를 전도한 사람이지만 수제자의 명단에는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나중에는 아가야에서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한 사람입니다. 안드레 역시 빌립과 마찬가지로 벳세다가 고향입니다.

베드로를 제외한 두 고향 친구가 벳세다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선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보다 벳세다를 더 잘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벳세다에서 벌어진 먹는 문제, 음식을 어디서 사야 되는가 하는 문제에 나선 겁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빌립이 한 말을 봅시다. “이백 데나리온이 부족할 겁니다. 각 사람에게 조금씩 먹게 할 지라도”
안드레와 빌립 둘다 부족함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안드레는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덩이가 부족하다고 하고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으로 떡을 사도 부족할 거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손에 가진 것으로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손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부족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을 가져와서 “이걸로는 부족하겠지요?” 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부족할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돈궤에 이백 데나리온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 예수님의 재정상황을 본다면 아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의 말은 단순한 세상적인 셈법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한참 부족한 최소한의 해결책입니다. 아직 손에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손에 가진 것을 가지고 해결책이라고 제시합니다. 당연히 턱없이 부족한 경상도 말로 “‘택도 없지만’그래도 이걸로 뭔가 해보세요”라는 겁니다.

여기서 믿음이 가진 묘한 속성이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믿음은 또 한편으로는 세상적인 당연한 법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돈을 가지고 떡을 사서 먹이는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떡을 살 돈이 없는게 문제지요.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돈문제가 아니라 갑자가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떡을 벳세다의 시장에서 살 수 있느냐가 문제인듯도 보입니다. 결국 빌립은 현실적인 계산을 한 겁니다. 거대한 행사에 들어가는 돈을 계산하고 이걸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빌립의 이런 계산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신이 아니라 세상의 지배를 받는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안드레 역시 세상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는 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면서 “이걸로는 해결이 어렵겠지요?”라고 이야기 합니다. 만일 그가 정말 이게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다면 가져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얘야, 너무 고맙지만 이걸로는 어떤 도움도 안되니까 가서 너나 먹어라”이렇게 말이지요. 그래도 그가 가져온건 이게 군중의 식량문제 해결에 뭔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턱도 없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에게 가져가면 그가 뭔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것이지요.
물고기 두 마리하고 보리떡 다섯 덩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결코 합리적이지도 않고 충분치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진 것은 지금 이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이 저들에게 공짜로 음식을 나누어 주어야 되냐?
그렇지 않습니까? 모여든 무리가 모두 가난한 것도 아닐 것이고 벳세다나 인근에 살아서 자기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도 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또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다 공짜라니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은 과연 도시락이 없을까요?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교회에서 가장 손쉽게 돈을 마련하는 비결이 뭡니까? 헌금이잖아요. 헌금. 이만명이 천이백만원, 천사백만원을 마련하려면 일인당 육칠백원씩만 내면 됩니다. 아니 어른들은 천원씩 내고 애들은 안내도 됩니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돈천원이 없겠습니까? 어때요? 상당히 합리적인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헌금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사역에도 분명 엄청난 돈이 들었을터인데 열세명의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적어도 삼년반이상 살려고 하면 엄청난 돈이 들었을 것인데 어디서도 헌금 이야기는 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아마 몇몇의 부유한 후원자들이 그돈을 부담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어디에도 예수님이 헌금을 거두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전에서 헌금내는 이야기는 있어도 예수님의 집회에서 헌금을 거둔 기록은 없습니다.

폭발적인 수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거나 아니면 목적지를 알고 걸어서 주님이 가신 곳으로 가면서까지 주를 따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때가 유월절 즈음이기 때문이지요.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심이 가장 고취되는 시기입니다. 더구나 민족의 염원인 메시야의 도래는 유월절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 옛날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해방되어서 나라를 만든걸 기념한 명절이 유월절 아닙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 참배하기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예수라고 하는 기적의 사나이, 메시야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순례자들에게 진정한 메시야의 출현이 얼마나 소원이었겠습니까? 이제 그 소원을 이루는 마당에 예루살렘이고 뭐고 무작정 주님을 따라서 바다를 건넌겁니다. 원래대로 하면 거꾸로여야 합니다.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벳세다로 가면 예루살렘과는 더 멀어집니다.

정말 이들은 지독스럽게 가난해서 노잣돈 한푼없이 몇날 몇일을 걷고 노숙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을까요? 남자 성인들은 반세겔의 성전세를 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돈이 한푼도 없었을 까요?
왜 주님은 이들에게 헌금을 거두라는 말씀을 안하실까요?
그런데 왜 오늘 우리는 헌금을 거둘까요?
헌금 이야기는 다음에 한번 할 기회가 있으리라 보고 오늘은 본문을 따라서 계속 가봅시다.

본문의 ‘산다’는 말에는 ‘시장에서 산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에서 사야 되느냐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앙시장이냐 서문시장이냐? 시장에서도 누구네 집에서 사야 하느냐? 뭐 이런 장소에 대한 질문이란 겁니다.
아니면 어떻게 사야 되느냐고 물었을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본문의 ‘어디서’라는 단어가 ‘어떻게’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빌립은 장소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돈의 액수를 이야기합니다. 빌립은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돈의 액수만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해도 부족할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안드레도 “~도 부족하겠지요?”라고 이야기해도 뭔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뭔가를 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한 생각이 이겁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예배건물이 따로 없습니다. 가정이 교회당입니다. 물론 가정집이라고 해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보리떡 다섯덩이하고 물고기 두 마리가 마치 우리 가정집같습니다. 초라하지요.

거대한 대저택도 아니고 따로 예배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들이 부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이게 부족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가진 것이며 이것을 주께서 주셨으므로 나머지는 주께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결할지는 우리는 모릅니다. 그냥 주님에게는 해결책이 있을 것 같아서 주님에게 가져온 겁니다. 집의 거실에서 예배드립니다. 부족한 의자는 후원금으로 삽니다. 그 후원금으로 낮예배 후의 식사도 준비하고 심방비로도 쓰고 사람에게 투자합니다. 비록 미미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입니다. 안드레가 제시한 해결책 같지 않습니까?

어떤 분들은 얘기합니다. “그러지 말고 은행에 돈이 많으니까 돈을 좀 빌려라. 그리고 예배처소를 얻어라. 하나님이 주실걸 믿고 담대하게 저질러라.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오고 그러면 그 헌금을 가지고 빚을 갚고 그렇게 하면서 교회가 커진다” 상당히 그럴듯한 말입니다.

그래도 돈을 빌리기가 어려워서 기존의 대형교회처럼 대형의 건물을 짓기는 어렵습니다.  설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저희들에게 수십억을 빌려 주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게 빌립의 말과 같지 않습니까? “이백 데나리온이 있어도 모자랄 겁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는 정말 가난한 이의 식사입니다. 보리떡은 그냥 밍밍한 부푼 전(지짐)같습니다. 물고기는 손가락 두마디 정도 될까요?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배를 채우기위해 먹는 겁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보리 떡을 무화과 쨈이나 꿀에 찍어 먹겠지요. 조금 더 나가면 신선한 야채와 과일 그리고 요구르트같은게 첨가되고 포도주가 올라올 겁니다. 더 나가면 소고기같은 육류가 오르겠지요.

안드레는 지금 가장 가난한 소년의 도시락을 받아 온 겁니다.  왜 이 소년은 자기가 먹지 않고 이걸 안드레에게 내어 놓았을까요? 본문의 ‘소년’은 아주 어린아이가 아니라 판단력이 있는 십대 청소년을 일컫는 말입니다.
소년이 도시락을 가져 온 걸 보면 아마 많은 이들이 도시락을 챙겨 왔을 겁니다. 그러면 이 소년은 다른 이들도 챙겨온 도시락을 내어 놓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솔선수범해서 도시락을 내어 놓았을까요?

주님은 안드레의 말을 듣고 그 떡과 물고기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식사준비를 시키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를 합니다. 그렇게 기대어 앉도록 시킨겁니다. 우리네 헌금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주는 것을 받기는 하지만 내라고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요즘 돈내라고 해서 교회를 못가겠다고 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돈 때문에 시험들어서 교회를 떠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게 다 거대한 건물과 목회자들의 호화스러운 삶과 최신 설비 때문입니다. 여기에 돈이 다들어 갑니다. 자중하고 절제해야 하며 근신해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비록 턱없이 부족한걸 바쳤는데 주님이 나머지를 해결하십니다.
10절에 ‘사람’이란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는데 앞의 ‘사람’과 뒤의 ‘사람’이란 단어는 다릅니다. 앞의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뒤의 ‘사람(안드레아스)’은 성인남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성인 남자만 오천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께로 가져오면서 안드레(안드레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런데 어때요? 안드레의 걱정에도 무색하게 무려 5000이 넘는 안드레아스가 먹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성경의 워드플레이(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근심하며 걱정하는 우리를 말로써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의 손에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주님앞에 있음에도 염려하고 걱정하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 주님의 놀라운 신성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영적 무지를 비웃고 후세에 교훈을 주려 함이지요. 마치 그 옛날 안드레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주께서는 주어진 오병이어를 가지고 어떻게 하셨지요? 11절에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그러니까 보리떡 다섯 개를 손에 들고 축사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이 축사가 뭔가 특별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그냥 보통 유대인들의 가정에서 드리는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린 겁니다.

사람들이 수천명이 넘는 어쩌면 이만의 사람들이 식사를 기다리며 식사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겨우 보리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뭔가를 염려하거나 요란을 떨지 않고 그냥 식사를 차리고 감사기도를 하듯이 기도한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마음껏 먹고도 남은 떡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합니다.
역시 병행기사인 마가복음6:41에는 여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떡을 떼어”

이 말은 예수님이 주인으로 잔치를 베풀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주인이나 가족의 웃어른이 식사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떡을 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를 하고 떡을 뗀 것은 무리의 주인으로 잔치를 배설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일의 진행은 이렇습니다. 오십명 백명씩 식사대형으로 앉은 이들에게 제자들이 계속해서 주께서 나누어 주신 떡과 고기를 그들 앞에 갖다 나른 겁니다. 배불리 먹도록.

12절에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하라 하시므로”
우리말이 아니라 원문으로 보면 “ 얼마라도 잃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남은 조각들을 너희가 모아들여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라는 말도 되고 또 다른 뜻도 있습니다. 원문에는 “너희가 모아 들여라”는 말이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게 가장 강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이는 종들을 위해서 잔치의 음식들 중 일부를 남겨 두는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비롯된 말씀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잔치 때 수고한 종들에게 주려고 남은 음식을 거두어 가지라는 말이 된다는 거지요.
어때요? 요즘 말로 하면 헌금도 안 거두었는데도 기부금과 후원금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마시고 또 남아서 잔치를 준비한 종들에게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부족함이 없이 풍부하다는 말입니다.

열두 바구니란 말도 역시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바구니는 유대인들이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제자들 역시 한 개씩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각자 한바구니 가득 떡을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신기한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위해서 행한 일은 별다를게 없습니다. 특별히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음식에 축복을 퍼부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신비한 요술빵을 만든게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신 양식에 감사하고 평소처럼 먹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그 기도를 우리 주님이 드렸다는 것하고 주의 능력을 믿고 안드레가 보리떡 다섯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이거라도 주님께 드려서 식사 문제에 도움을 주고 싶어한 한 소년의 헌신이 어우러진 결과물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게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다는 거지요. 왜냐면 소년이 가져온게 바로 이 보리떡과 물고기거든요. 만일 여기에 누군가가 고기를 가져왔다면 그걸들고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를 했다면 사람들은 고기를 배불리 먹지 않았을까요?

이 식사에서 사람들은 배불리 원없이 먹기는 했지만 고기나 포도주, 치즈, 과일같은 걸 먹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보면 예수님의 은혜는 딱 배고파 죽지 않을 만큼만 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박한 음식도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걸 아껴서 제자들을 위한 양식으로 삼습니다. 알뜰하게 살림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우리는 귀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필요를 절제하고 최소한의 삶이 충족되면 남을 위해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분히 주실 것입니다. 비록 사치하고 화려한 삶은 아닐지라도 배곪지 않고 먹고 살도록 주시는 주인을 모시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보리떡 하고 물고기 식사가 뭐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식사를 먹은 군중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지금 우리네 현실로는 줘도 안먹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의 삶에서 이런 식사라도 배불리 마음껏 먹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굉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 기적에 지극히 만족해서 예수를 메시야로 여기고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나 예수를 메시야로 믿어라고 해도 안믿던 사람들이 떡과 물고기를 원없이 먹고 나더니 곧바로 주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왕을 삼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군중들의 입장에서는 유월절 즈음에 메시야가 나타나셔서 사막에서 자신들을 위해 새로운 만나와 메추라기를 베푸신 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며 병과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진정한 해방자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그만 따라다니면 모든게 해결됩니다.
자, 어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믿음과 당시 군중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수에 대한 믿음이 뭔가 다른게 있습니까? 구원문제요? 그들은 스스로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택함받은 자들로 여겼으며 구원에 대해서는 걱정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세상을 구해줄 구세주로 자처하며 혹세무민하고 스스로 부귀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혹된 많은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걸로 믿고 그러한 구세주를 따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이 따르는 오늘날의 구세주는 그 어느 누구도 세상을 구하지 못하고 따르는 신도들의 삶도 구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을 착취하며 이용할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떠합니까? 사람들이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자 그들을 피해서 도망칩니다. 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들과 부화뇌동하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에 태워 바다 건너로 보내버리고 스스로는 산위로 올라가 기도합니다.
따지고 보면 구세주뿐만 아니라 영웅들은 스스로의 어깨로 세상의 짐들을 짊어지고는 스스로를 희생하고 세상을 구해도 그 열매는 따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했다는 영광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뿐입니다.

이게 메시야의 참 모습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연민 때문에 기적을 베푸는 것이지요.
5절에 보면 “눈을 들어 보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눈을 들어 보신 것은 유리하는 양떼와 같은 목자없는 백성들입니다. 로마의 압제와 헤롯왕과 종교지도자들의 압제와 착취에 궁핍하고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뭔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하여 그 먼거리를 따라서 주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원래라면 이들은 주께로 나오기위해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배를 타고 주를 따른 것은 자기들을 구원할 구세주를 발견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그만 따르면 결코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배곪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를 따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인 육적인 배고픔의 해결이나 병자에게 행하는 기적을 보고 따른 이들은 결국 상황이 변하자 흩어져 버립니다. 우리 주님의 승천시에 이를 지켜본 제자는 겨우 500에 불과하고 이후에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 모여 있었던 제자는 120에 불과합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자기들을 구해줄 구세주가 오셨다고 환호하며 왕으로 추대하려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오늘 우리의 믿음을 가만히 되뇌어 봅시다. 과연 내가 무엇 때문에 주를 믿는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그를 따르는가? 성공, 돈, 출세, 시험에의 합격, 병고침 이런걸로 주를 따르는 것도 물론 안따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만 결코 이러한 믿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주를 따라야 제대로 주를 따르는 걸까요?
내가 그를 사랑해서 ,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버려가며 나를 구원해준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를 따르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이 땅에 이미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헌신하는 거지요. 이미 2000년 전부터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하고 오히려 쇠퇴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지만 더 큰 원인은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더 큰 원인은 진실된 성도가 드물기 때문이지요.

주께서 몰려드는 무리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신 것 같이 저는 오늘 이땅의 대형교회에 몰려드는 신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은 단지 육적인 빵의 해결을 위해 주께 나오는 것일뿐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주를 부인하며 흩어질 자들이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자기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위한 사교클럽이 아닙니다. 대형교회의 신자가 개척교회의 신자보다 더 큰 사람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버랴야 합니다. 나는 너무 존귀해서 결코 개척교회에는 맞지 않아. 나는 거대하고 웅장한 그러면서도 엄숙한 건물과 의식속에 있어야되는 고급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보리떡과 물고기로 사람들을 배불리시고 남은 것을 거두어 바구니에 보관하신 주님을 비웃는 행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힘든 목자없는 양떼를 위해 유월절 잔치를 배설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과연 지향해야 할 바가 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목사와 교회는 결코 직접적인 세속의 권력을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이 너무 열받게 해서 가만 있게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도하고 내것을 나누십시오. 자기는 거대하고 화려한 곳에 있으면서 저 낮은 자들을 위한다는 위선을 부리지 말고 스스로 낮아 지십시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내가 선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십시오.

저 양떼들은 보리떡 한덩이를 얻기위해 나오는 보잘 것 없는 이들이지만 저들속에 우리 하나님의 신성과 그의 형상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십시오.

우리가 가진 현실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에 불과해도 이걸로 우리 주님은 거대한 역사를 이루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러고 난 다음에도 아무러한 영광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피한 주님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마십시오. 세상이 알아 주어도 좋지만 알아 주지 않아도 결코 실망하거나 초조해 하지 마십시오.

하늘나라 시민인 우리들에게 그러한 영예와 권세와 부는 있을때도 있고 없을때도 있지만 결코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1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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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2주전 목사님을 만나서, 저는 꼭 "우리의 삶이 올바른 방향이라면 주께서 기억하시고 도울 테니, 걱정하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일요일에도, 수요일에도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목사님은 오병이어 설교 도중에 잠시 감정적 동요가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순간의 감정을 제가 언어로 표현하자면, "주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 라는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여담인데, 목사님이 미국 패서디나에 있을 때도,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자금을 조금씩 모아, 미국 생활 하려면 자동차가 꼭 필요하니, 후원금으로 차를 사서 쓰라고 보내주었는데, 그런 돈 조차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나누어주며, 소박하게 살아왔던 분이고... 게다가 금권에 변질되어가는 일부 호화 교회를 누구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목사님이셨는데... 정작 지금 가진게 마치 오병이어처럼, 어쩌면 참 가진게 없구나 라고 느껴졌는지, 예수님의 신적권능을 부러워하던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이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름과 부도덕함이 싸운다면, 당장에는 뻔뻔함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고, 위선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역사는 원칙과 상식이 승리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지난 주 뒤늦게야 목사님께 이야기 했습니다. "주께서 못하실 일이 없고, 계획된 일이 있다면,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그래서, 그 날을 위한 연단 과정으로서, 지금의 시간이 있는게 아닐까 생각되어 졌습니다.

저는 체험적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께 드리는 삶, 이웃과 나누는 삶은, 결국 더 좋은 것으로 돌려받는다고 믿습니다. 정작 부끄럽기만 한 것은, 행동은 별로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아서, 망설일 때도 많습니다. 또한, 이렇게까지 고생스럽게 살아야 하나 라고 가끔 회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잘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지." 라고 포장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가진 것을 나누어 보아라" 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삶을 나누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가? 아니면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회로 계속 밀어붙일 것인가? 예수님을 좇아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혹여 잘못된 것이 있다면 나의 부족함이었노라고, 그렇게 겸허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계속해서 생각났습니다. / 2013.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