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2일 주일 예배
생명의 양식 (요한6:22-)
오늘 우리는 조금 어렵고 재미없는 말씀을 배우려 합니다. 옛날 선지자나 사사들의 활약,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들을 배우는 부분은 참 재미가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물위를 걷고....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배우려 하면 어렵고 지겹고 재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건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더 중히 여기는 말씀이 우리하고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이 말씀이 얼마나 인기가 없고 재미가 없으며 사람들이 싫어했느냐하면 이 말씀을 하고난 후에 모인 무리들과 주의 제자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열두제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고 남아있는 12제자에게 질문을 하는 상황까지 옵니다.
그렇게 알고 본문을 따라갑시다. 그래서 너무 어렵고 이상하다 해도 한번 차근차근 들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교회 오는 사람들이 옆구리에 성경책을 끼고 오거나 손에 보란 듯이 들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도 30이전까지는 성경책을 손에 들고 교회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믿는이들도 참 적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드러내놓고 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가방에 넣어서 다닙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저도 성경을 가방에 넣어 다닙니다. 물론 저는 성경에다 수첩에다 설교문, 필기구같은 것들을 들고 다니니까 그렇다고 해도 여하튼 남들이 다 보도록 손에 들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특히 교회당 밖에서는 당연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 저도 가물가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어떤 용기요? 남들보다 더 희생하고 사랑하며 바르게 살아야 하는 용기.
사소한 규칙도 어겨서는 안되고 남에게는 항상 양보를 해야 하고 , 나의 이익을 위해서 머리를 굴려서도 안되고 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웃어 넘기고...성경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내가 예수쟁이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욕을 볼 수는 없으므로 나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게 너무 힘들어서 귀찮아서 막살고 싶어서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안들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맞는지 아닌지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힘들게 용기를 내어서 예수를 믿는데 과연 예수 믿는 것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과연 예수를 내가 왜 믿지요?
우리는 오늘 기독교의 가장 핵심에 대해서 접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진실이 결코 마주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해 왔습니다.
과연 이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선 22절에 ‘이튿날’이란 말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난 다음날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기적에 놀라서 예수를 계속 찾아 다닙니다.
많은 이들이 집으로 또는 예루살렘으로 갔겠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벳새다에 남아 있습니다. 왜냐면 배 한척이 출발했는데 예수님은 그 배에 타지 않고 제자들만 타고 떠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이곳 어딘가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게다가 디베랴에서 여러 척의 배에 사람들이 타고 예수님을 찾으러 벳세다로 왔습니다.
왜 왔겠습니까? 공짜 떡을 먹은 사람들이 소문을 전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급히 배를 타고 벳새다로 왔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주님은 안계세요. 그래서 이 배에 사람들이 타고 예수님을 찾아서 가버나움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으려고 갈릴리바다 북쪽을 배를 타고 찾고 있는 중입니다. 굉장한 열심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찾아 다니는 겁니다. 지금 상태 는 ‘예수님이 너무 너무 좋다. 저분만 따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그런 상황입니다.
속된 말로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이 좋아 죽을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얼마 뒤 모두 예수를 떠나게 되고 다시는 그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예수님의 설교 후에 사람들이 떠났는데 도대체 그 말씀이 어떠하기에 사람들이 주를 떠난 겁니까?
뱃세다에서 바다 건너편의 가버나움으로 예수를 찾던 사람들이 오자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곳에 계십니다. 그래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전날 밤에 바다 건너편 벳세다의 산으로 가신 주님이 오늘 여기에 계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이렇게 물은 겁니다. 여하튼 사람들이 그렇게나 찾던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찾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정말 가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조금 이상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주님을 찾아서 그렇게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수색한 끝에 마침내 가버나움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찌됐든 주님을 찾아 온 것 아닙니까?
너무 너무 수고를 한 이들에게 “얘들아 , 참으로 수고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하나님의 아들인 나에게 불가능이 있을 수가 없겠지?”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나 찾으러 다닌다고 아침도 못먹었겠구나. 조금만 기다려라 내 오늘도 너희들에게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여주마” 이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매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은 참말입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주는 의미나 이 분이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들의 배부른 것 때문에 주님을 찾아 다니는게 사실이니까요.
특히 본문의 ‘배부른’이란 말은 원문상의 뜻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배부른’이란 뜻입니다. 즉 일안하고 주님을 따라만 다니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으니까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겁니다. 그걸 아신 주님께서 냉정하게 말씀하시지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아마 상당히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은 육체를 가진 한갓 인간이기 때문에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지요. 먹지 않으면 안되는 저주스러운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 배부르게 할 수 있는 물질적인 양식을 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너무 억지스럽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예수가 밥먹여 주나?” 우리는 분명히 예수가 밥먹여 준다고 생각을 해서 예수를 찾았는데 , 그만 만나면 그를 찾기만 하면 배불리 떡과 고기를 원없이 먹을 수 있다고 해서 그를 찾았는데 정작 그를 찾고 보니 주님은 그런 썩어질 양식은 안준답니다. 그리고는 자꾸 자신이 주는 생명의 떡, 참 떡을 먹으라고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잘 몰랐지만 우리는 잘 압니다. 그게 결코 배부르게 하는 물질적 떡이 아니란 것을.
합성 보존제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때되면 썩는 양식은 요즘말로 하면 유기농이네요. 그런데 왜 그런 좋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합니까?
그래놓고 주님은 다른 한편으로는 (썩어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양식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다’란 말은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받는 자들의 태도에 따라서 이 양식을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고 두 번째는‘ 하사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즉 수고롭게 일해서 그 댓가로 품삯을 받듯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물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력없이 공짜로 , 은혜로,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사거나 얻는 양식은 결국은 썩어져 없어져 버리는 것이고 우리가 일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는 양식은 영생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뭔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말씀입니다. 참고로 이 말씀이 너무 어렵고 황당하다고 주의 제자를 자처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를 떠났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이해가 안된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말씀은 썩어져 버릴 육의 양식을 얻으려면 일해야 되는데 그걸 일하지 않고 은혜로 받으니까 그게 좋아서 나를 찾아 다닌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내가 준 양식으로 배불린 너희들은 그 양식을 계속 줄 수 있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하구나! 라는 탄식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와, 떡과 고기를 무한정 먹을 수 있어서 너무 좋구나!’ 이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도대체 저분이 어떤 분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이적을 베푸시는가?’ 는 생각은 왜 없는지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의 끝부분에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치다’는 말은 왕의 교서나 토지 거래문서 같은 것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하다는 말이므로 곧 이 말은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법정 대리인이 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알아 듣지 못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물질적인 양식을 무한대로 공급해 주는 현세의 왕으로 주님을 추대하려 한 것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영적인 양식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예 관심 자체가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는 아멘 아멘 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 처음 율법을 전한 모세보다 자기가 큰 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듣는 사람들은 주님의 의도를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주님이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을 하면 떡을 준다는 걸로 알아 듣고는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여기서 일을 한다는 것은 한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 한다는 말입니다. 한번 일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직업입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지요?” 이정도의 의미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일’이란 말이 단수로 쓰였기 때문에 유일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만 믿으면 모든게 끝이다? 후와! 예수만 믿으면 모든게 끝납니까?
이 말은 사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생을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 책들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는 소중한 말씀으로 간주합니다.
이해는 안되겠지만 계속해서 본문을 따라서 나가봅시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누가 들어도 자기를 믿어야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시 묻습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 인친 자’라는 말을 하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표적을 보여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질리도록 많이 보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심지어 어제 분명히 바다 건너 산으로 올라가신 주님이 오늘 자신들보다 더 빨리 가버나움에 와 계신 것부터 이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뿐입니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을 치료했는지.....
그런데도 이 사람들이 또 다시 표적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이것입니다.
보세요. “행하시는 표적”과 “하시는 일”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실 동일한 말을 두 번 되풀이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그 표적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 오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라고 하셨죠.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남들을 고치고 경천동지할 표적을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적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에만 관심이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그런 이적을 또 보여주기를 원한 겁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것이 생각나는게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장모의 열병을 예수님이 고쳤을 때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이 물고기를 두 배에 가득 잡게 되자 주를 믿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사람들이 요구하는 표적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찾고 따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때문에 부자가 되는거, 내가 예수 믿어서 득을 보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실체나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의미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나에게는 별로 이득이 없으면 아무리 하늘이 열리고 불이 쏟아져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렇게나 표적을 구하는 이유는 뭡니까? 근본적으로 나아가서 우리가 그렇게나 주를 찾고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인정하고 믿기 위해서? 아니면 그의 뜻대로 세상을 구제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 세상에 펴기 위해서?
천만에요 천만에요 그건 솔직히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이적이 나에게 , 현실의 삶을 사는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놓고는 자꾸 표적을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주를 따르려고 합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요구하는 표적이 뭡니까?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이제 이 사람들이 주님에게 요구하는 표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감이 잡히시지요?
그래요, 이 사람들은 어제와 같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걸 먹고 배부르면 된다는 겁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에게 무한대로 양식을 공급해 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유대교의 구전 율법을 모아놓은 미드라쉬 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메시야가 오실 때는 다시 만나를 내려 줄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걸 전제로 이야기하는 거지요.
이들에게 오실 메시야는 첫 번째 모세처럼 외국의 압제에서 나라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을 공짜로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서 온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공짜 떡을 또다시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모세가 그 떡을 준겁니까?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32절에서 “오직 내 아버지가 주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신다는 말에는 매일매일 현재시점에서 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모세의 때에 준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양식은 지금도 매일 매일 아버지께서 내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요? 우리는 그 떡을 먹고 있지 않는데요?
그래요,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하늘에서 지금도 매일 매일 은혜로 내려 주시는 떡을 왜 오늘 우리는 먹지 못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내려’라는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인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생명의 떡이고 이것을 주는데 너희는 자꾸 다른 것을 요구한다고 주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떡을 먹는 자마다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그 진리를 우리는 외면합니다. 아니 아예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죽고 난 다음의 구원은 내 관심 밖이거든요. 살아서 잘 살아야지.....
주님의 말씀이 끝나고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여러분! 좀 웃기지 않습니까? ‘영적인 떡’인 자기를 믿으라는 요구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떡이든지 무조건 받고 보자는 유대인들의 이 말은 이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떡을 어제 먹었던 바로 그러한 떡, 육신의 배를 채우는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떡을 주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주를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물질을 위해서 다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를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주님과 항상 더불어 사는 삶을 살면 그가 나머지를 부수적으로 주시는 것이지 그가 주는 생명이니 말씀이니 하나님의 뜻이니 ‘의’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물질적 복에만 관심이 있는 교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얘들아 너희들의 요구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 너무 열심을 내어서 교회를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도 가보고 저교회도 가보고 너무 너무 열심입니다. 조금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더 극성맞은 교회를 찾아 다니다 시피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진정 찾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주시는 물질적인 떡, 먹으면 우리의 배를 불릴 수 있는 떡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뭔가를 더 줄 수 있을 것 같은 큰 교회, 대형교회만을 선호하는 지도 모릅니다. “이만한 좋은 시설에 좋은 말씀 듣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데 (헌금을) 이정도는 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 이들은 교인은 될지언정 성도는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나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다니면서 이곳 저곳을 훑으며 주를 찾던 이들은 막상 주를 찾고 나서는 주께서 떡을 주시지 않고 생명의 양식인 말씀만을 주시자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주께로 돌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사람들,무리들이 아닙니다. 이들도 한때는 주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불렸었습니다.
60절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하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솔직히 요한은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기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6장은 예수님과 기독교의 정화를 기록한 귀중한 본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서 중에서 이 본문6장은 무려 71절이나 되고 내용도 매우 추상적이며 중요합니다. 복음의 진수이자 기독교 신학의 정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 장의 모든 설교가 끝난건 아니라서 그러한 얘기는 다음에 하고 오늘은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주를 그렇게나 열심히 찾고 있느냐’는 물음으로 오늘의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아마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면 우리 자신의 믿음이 한단계 성장하던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이러한 내용을 굳이 설교로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좋은게 좋다고 어차피 믿는거 복받고 잘살고 건강하고 출세하면 좋은거지 굳이 그런게 하나님을 따르는 조건이 되어서는 되니 안되니 할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그게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해야 합니다.
생명의 떡과 아버지의 뜻
이 주제를 가지고 다음 주에도 설교를 계속합니다. 한 주의 설교로는 너무 길어서 부득이 설교를 나누었습니다. 한주 동안 ‘우리는 주님을 왜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가?’ 그리고 ‘과연 앞으로의 우리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2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아폴로13호 이야기를 최근 읽었습니다. 우주로 올라갔다가, 이 우주선에 갑자기 고장이 발생했던 이야기 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 한 가지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서 지구로 귀환해야 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주선은 "지구 귀환이라는 필사적인 일만큼은" 어떻게든 해냅니다.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열광했고, 어쩌면 저절로 먹고 사는게 해결되는 "천국 같은 신세계의 가능성"을 예수를 통해서 발견했던건지도 모릅니다. 먹고 사는게 저절로 해결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만 따라다니면 멋진 일들로 가득할 것만 같아, 이러한 환상에 젖어들었던 건지도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천국"을 보여줍니다. 육신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삶이 아니라, 영혼이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진짜 삶"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실망한 표정이 나타났을테고, 계산 빠른 이들은 벌써 이득이 안 된다면서 돌아서기를 재촉하기도 했을테지요. 그렇게 어림잡아 2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이라고는 겨우 열 둘...
투니버스의 프로그램명을 재치있게 빌려오자면, 예수님의 참된 프로젝트 학교는 "난감스러운 스쿨"로 추락하며, 모든 사람을 등지게 만들었습니다. 아 제자 아주 쬐금 남았고요. 그렇다면, 대체 예수님에게 있어서 필사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에게 있어서 필사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라함 때부터 내려오는 그것은,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사람이 되어라, 남들도 다 한다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동화되지도 않는 한 사람이 되어라, 성전을 장사하고 계산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아라, 제발 부탁이니 좀! 쫌! 쫌!!!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라." 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자꾸만 보입니다. 나 혼자 다 누리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마음도 버려야 합니다, 잘났다고 착각하는 오만함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무릎꿇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를 중심으로 두고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구만, 이 무슨 억지 논리란 말인가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타인을 배려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행동하는 성도"는 참으로 중요하고, 고마운 존재들 입니다. 예수님은 진작에 알았겠지요. 2만명을 이끌고, 왕처럼 큰소리 쳐봐야, 그런 식으로는 제대로 된 삶이 가능하지 않을 것임을. 오히려 고작 열두명이라도, 이들이 정말로 뜻을 좇아서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걸어간다면, (물론 도중에 배신자도 있다지만...), 산술적 계산으로 볼 때는 소수라도, 훗날 계속해서 대대로 많은 사람이 이 길을 생각하며, 가게 될 것임을 알았을테지요.
목사님은 자주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마음이 혼탁하고, 그 속에 물질적 이익 계산부터 대화주제로 올리고 있다면, 어떻게 성령님이 함께하실 수 있겠냐, "어떻게 나누어 가면서 살 것인지, 어떻게 실천하는 삶을 살 것인지" 그것을 고민하지 않은채, 교회다니는 것을 마치 친분 사업이나, 자기 경영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얼마나 답답해 하시겠냐...
저는 사람의 특성이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흐름을 생각해봐도, 더욱 그런 동일점을 발견하고요. 다시 말해,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단지 내게 기쁨이나 위안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믿는 이들이 이래저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이웃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이 없고, 내 식구만 특별하기에, 주자창에서 서로 험한 말까지 오고 갈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질문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남위에 군림하는 호화로운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괜찮겠니?", "다른 사람을 꼭 배려하고 나눠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하겠니?",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으로 나와 함게 걸어가겠니?" 오늘도 예수님은 바깥에서 조용히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대로 살아갈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투기하고, 권력에 빌붙는 교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진짜 삶"을 살아가는 맑은 사람을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저는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오늘도 반성하게 됩니다. 문득,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으로 서서히 변해가며, 사랑이 있는 곳은 서서히 천국으로 변해간다는 격언이 생각나서, 계속해서 지워지지 않네요. / 2013.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