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6월9일/여리고성 전투(여호수아6: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6. 10. 23:09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9일 주일 예배

여리고성 전투 (여호수아6:1-)

세상에는 우리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기한 일들을 우리는 항상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해왔고 뭔가 그럴듯한 설명으로 우리를 논리적으로 합리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비란 없다’란 가정 하에 뭔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도록 해서 인간이 납득한 후에야 그러한 신비를 받아 들입니다.

신기한 일들을 신비로 인정하지 않고 뭔가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어야만 속이 시원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모든 것은 과학의 지배, 이성과 논리의 지배를 받게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과학적이란 말을 믿음이란 말보다 높은 곳에 놓게 되었습니다.
이성과 믿음, 과학과 믿음은 서로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을 뛰어넘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오늘 여리고성의 함락과 같은 황당한 기사가 우리에게 암시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여리고는 지금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도가 있는 곳입니다. 물이 풍부하고 성안에는 발삼 오렌지가 나는 곳입니다. 또 종려나무가 풍부해서 종려의 성읍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또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가나안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있는데 여리고는 바로 이 길목의 중간을 장악하고 있는 성입니다. 교통의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옆은 거대한 협곡입니다.
이 협곡의 양쪽으로는 거대한 산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점령해야 될 성이고 이것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가나안을 공략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여리고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당시 가나안은 도시국가 체제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을 통일한 국가는 없습니다. 가나안의 도시국가는 무력이 별로라는 말입니다. 즉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데는 하나님의 신기하고도 이상한 방법까지도 필요없습니다. 희생은 따르겠지만 그건 싸움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변수가 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히브리인에 비해서는 엄청난 선진국민입니다. 이들은 철기를 사용했고 오늘날의 탱크에 해당되는 철병거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농민이 아니라 발달된 도시문명을 이룩하고 거대한 성과 철기를 가진 우수한 민족들입니다. 심지어 이들 가운데는 거인족도 있습니다. 굉장한 곳입니다.

한편 히브리인들은 겨우 청동기 정도를 사용하고 대부분은 물매나 몽둥이를 사용하는 요즘말로 원시부족을 겨우 면한 수준입니다. 사람은 많지만 그들에게 변변한 무기는 없습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첫 번째로 침공한 도시국가입니다. 게다가 성벽은 이중성벽입니다. 바깥의 외성과 내성사이는 경사가 져 있고 언덕위에 서 있습니다.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은 통일왕조를 이루지 못하고 모두 나뉘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백만에 달하는 히브리인들의 침공에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비록 무기가 좋고 성을 의지하고 있지만 인구수에 있어서 밀리기 때문에 바깥에서 히브리인들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호와라는 무시무시한 전쟁의 신을 섬겨서 요단강도 그 앞에서 갈라지고 요단강 건너편의 아모리 족의 두 왕 시혼과 옥이 이끄는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모두들 공포로 바짝 얼어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말합니다. 여리고가 아무리 강대하고 선진문명을 자랑한다 해도 사람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덕위의 이중성벽으로 보호받는 여리고 성안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볼 것도 없이 싸움만 일어났다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한한 주문을 하십니다.

무언고 하니 성을 공격하지 말고 그냥 군대가 ‘대형을 지어서 성 주위를 육인동안은 하루에 한번 씩 그리고 칠일 째는 일곱 번을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백성들이 모두 소리를 질러라’ 는 게 바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면 여리고를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을 것이랍니다. 이걸 믿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건 뭐 전략도 아니고 얼토당토 않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고 요단강을 건너서 이제 막 가나안땅으로 들어 온 겁니다. 전설의 모세는 이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 갔고 여호수아로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취임하고 첫 번째 싸움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아직은 미심쩍어 하고 끊임없이 전임자인 모세와 비교하게 될 겁니다. “모세는 이랬는데 당신은 이것도 못하냐?” 아마 여호수아가 조금이라도 잘못한다면 바로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이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그는 모세의 후계자로서 실패하게 되고 동시에 히브리인들은 가나안을 영원히 정복하지 못하고 사막의 유목민으로 떠돌다가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 민족적인 위기의 상황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원히 가나안 정복을 포기하고 가나안 저편에서 이미 장악한 영토를 배경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나안땅의 주인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기까지 무려40년에 걸려서 온 겁니다. 이들은 땅에 정착하지 않고 유목민으로 떠돌기에는 이미 규모가 너무 큽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히브리인들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 함께 탈출한 여러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00만에 달하는 규모는 더 이상 부족단위가 아니라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나 히브리인들은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이미 요단강을 건너서 이들은 지금 가나안의 중심부에 들어 왔습니다.
지금이야 가나안 족속들이 성안에 웅크리고 상황을 살피고 있지만 만일 여리고 성 공략에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전쟁의 신 여호와’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고 여러 민족들은 성문을 열고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해서 멸망시켜 버릴겁니다.

“이스라엘도 별거 아니네!”
“저들의 신은 더 이상 저들을 돕지 못해. 여기는 바알의 땅이야”
그리고 뛰쳐 나온다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은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는 가나안의 나라들이 만일 연합전선을 펴서  히브리인들을 공략한다면 앞뒤 양옆으로 적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연코 항복하여 저들의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말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하면 압도적인 차이로 여리고성 공략에 성공해야 합니다. 감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피해도 거의 입지 않고 성을 공략한다는게 쉽습니까? 더구나 물매와 몽둥이만을 무기로 하는 히브리인들에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언덕위 이중성벽을 가진 여리고성을 공략하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게 너무 없습니다. 아마 성벽을 기어 오르려고 하다가 엄청난 사람들이 죽을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황해서 도망을 갈 것이고 우왕좌왕하다가 녹아 버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성에서도 이스라엘백성들을 만만하게 보고공격군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여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서 도망도 치지도 못하게 할 겁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고 이들을 노예에서 해방시켜 40년을 끌고 다니시며 훈련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도록 하시려고 끌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지휘관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하루에 한차례씩 그냥 대형을 유지하고 여리고성을 돌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대형을 지어 도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만일 싸울 자세로 요소요소를 포위하고 진을 구축한다면 여리고 사람들은 겁을 먹고 이들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몰라서 경계만 하고 있을 겁니다. 성문을 굳게 닫고.

그러나 이들이 열을 지어 성을 돌고 있는걸 본다면 여리고 사람들이 언제 성문을 열고 기병대로 달려 나와 대열을 덥칠지 모르는 겁니다. 높은 곳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보고 있다가 허를 노리는 것은 전쟁의 기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는 일부러 허점을 보여 여리고 군대가 성문을 열고 나오게 하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실제로 여리고 군대가 성문을 열고 쳐들어 오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왜나면 행군할 때 법궤까지 매고 천천히 성을 돌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이스라엘 군대는 여리고성을 포위하고도 충분한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성을 둘러싸고 돌기만 합니다.
마지막날에 하는 특별한 군사적 행동이 그냥 한바퀴가 아니라 일곱바퀴를 돌고 백성들이 소리를 치는 겁니다. 그러면 성벽이 무너지고 자기 위치에서 무너진 성벽 쪽으로 나가기만 하면 싸움이 끝이 난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황당한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준행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신기하게도 나팔소리에 맞춘 사람들의 함성소리에 성벽이 무너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까지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내용이라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1.안식일에도 성벽을 돌다
첫 번째는 7일간의 전투기간 중에 안식일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성을 도는 것을 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이끄시는 싸움이고 그래서 이 싸움은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나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모든 날이 다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구별하고 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앞에서’ 행했다고 하잖아요. 왜냐면 이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고 여호와의 법궤가 이들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모든 행동은 여호와의 거룩한 싸움이 되는 겁니다. 앞장에서 보듯이 이 싸움을 이끄시는 이는 여호수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거든요.

제사장이 양각나팔을 불잖아요. 이들은 여호와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나팔수입니다. 그래서 이 나팔소리에 따라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게 되는 거지요.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적으로 여호와의 지휘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2.양각 나팔을 불다
지휘관의 신호를 전하기위해 나팔을 부는 것은 고대의 싸움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지휘관이시므로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전달하기위해 나팔을 붑니다. 그런데 이 양각나팔을 부는 것에는 조금 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이 나팔은 일반 나팔과는 좀 다릅니다.

이 나팔은 희년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나팔입니다. 즉 이 나팔을 불면 기쁨의 축제가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빚도, 노예계약도 무효가 되고 빚이 탕감되고 노예에서 해방되는 7년이 7번을 지나고 50년만에 맞게 되는 기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로 사용되기 때문이지요. 이 나팔이 불면 희년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소리 높여 기쁨의 함성을 지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전쟁은 마치 희년을 선포하는 듯,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양각 나팔을 불고 그 나팔소리에 응답하여 사람들은 기쁨의 함성을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축제 같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휘하시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싸우기 전에 이미 “여리고를 네 손에 붙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결코 질 수 없습니다. 이미 그가 우리에게 너희가 승리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전쟁도 마치 축제와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무장한 자들이 앞에서
그리고 성을 하루에 한번씩 돌때도 세부적인 하나님의 지시가 있습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가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가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8절과 9절에는 그 순서가 보다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는 아무렇게나 해서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매우 세밀한 순서와 절차가 있습니다.

보다 큰 것을 하기 때문에 소소한 것은 어겨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명령은 그 어느것 하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장한 자들 뒤에 나팔을 든 제사장들이 서고 그 뒤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따르고 그리고 그 뒤에 일반 백성들이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장하다’란 말은 우리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의미가 한 개 더 있습니다.
여기서 ‘무장하다’는 말은 원뜻이 ‘ 제거하다’란 뜻입니다. 전혀 앞뒤가 맞지않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무장을 하기위해서 갑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옷을 벗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하기위해 무장을 하려고 한다면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필요한 죄의 옷, 죄짐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인간적인 교만과 거짓된 양심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움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그러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군대로 싸움에 나갈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선봉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을 가장 앞장서서 싸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교만과 죄악을 벗어 버리라고 요청하십니다.
교회에서 사회에서 단체에서 앞장서서 일하려고 하는 자들은 허식과 교만의 가면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의 사슬을 끊어내고 거짓된 옷들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겁게 지고 있는 죄짐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무장을 할 수 있습니다.

4.후군은 궤뒤에 행하고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한 것과 대조적으로 후군은 궤 뒤에서 행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궤 뒤에서 행하는 후군은 단순히 뒤에 섰다는 뜻을 가진 말로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의 ‘후군’은 문자적으로는 단순히 ‘모이는 자’라는 말입니다. 즉 ‘후군’즉 ‘뒤에서 따라가는 군대’란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단어에는 ‘스스로 모인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성전에 참여하는 자들은 강제적으로 모여서는 안되고 스스로 원해서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며 어떤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성전에 참여한다는 능동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뒤에서 따라가는 후군에 섰다고 할지라도 여호와의 거룩한 싸움에 피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능동적으로 내가 이 전쟁에서 뭔가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는 생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끌려 왔구나!”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5.외치지 말며... 들레지 말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참여한 자들에게 요구되어진 것이 바로 ‘외치지 말고 들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이 나서, 아니면 무서워서, 불평하며, 적을 겁먹게 하기위해서든 일체의 외침을 금지하는 겁니다. 게다가 옆사람과 잡담을 하듯이 소곤소곤해서 다른 이들에게 자기의 소리를 듣게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면서 무슨말을 가장 많이 할까요? 바로 불평이지요. 도데체 지금 뭐하자는 짓이냐? 이래가지고 성이 무너지기를 바라다니 제정신이야? 세월아 네월아 가라 하고 있는데 어느세월에 성을 무너뜨릴거야?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불평하며 잔소리하는 일체의 소음을 금지 시킨 것입니다. 들레지 말고 나의 때를 기다려라.

또 한가지는 긴장하라. 비록 이들이 전쟁터에 나와서 칼과 창을 들고 직접적으로 적과 몸으로 싸우는 상황이 아니라 그냥 열을 지어 성을 한바퀴 도는 걸로 전쟁터의 일이 끝나기는 하지만 결코 방만하게 자세를 흩트리거나 떠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성전에 참여한 이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간들끼리의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에 집중하도록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기다리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침묵하며 긴장한 채 기다리면 우리 하나님의 명령에 보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떠들고 있으면 마치 오합지졸처럼 여겨져서 이를 보고 있는 여리고성의 군대에게 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오합지졸들이 여리고 군대의 침공을 받는다면 혼비백산해서 뿔뿔이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칠일을 돌 동안 침묵하고 기다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항상 빨리 빨리에 익숙해져서 굉장히 조급합니다. 빨리 나의 소원이 이루어져야겠다고 주장하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타까워하며 조급해 하고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게끔 됩니다.
만일 하루에 한바퀴씩 여리고성을 도는 일만 하면 틀림없이 어리석은 백성들 중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불평하며 선동하는 자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며 선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전 분열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도 고요한 침묵의 상황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기가 조금만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불평하기 잖아요.

여리고 성안에는 발삼 나무와 종려나무가 풍부합니다. 물도 풍부하지요. 그런데 성 바깥의 뙤약볕에서 사막을 한바퀴씩 돈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쓸데없는 일 같습니다. 더구나 성을 한바퀴 돌고 그대로 해산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보고는 어쩌면 여리고성의 군대는 이를 비웃거나 놀렸을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저것들 뭐하는 짓이야?”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뭔가 거대한 뜻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신호를 기다리며 묵묵히 행진한는 것은 거룩한 전쟁에 참여한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내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칼을 들고 설쳐도 언덕위에 이중성벽으로 보호받고 있는 여리고성은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여리고성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돌로된 성인지 아니면 흙벽돌 안에 흙을 채워넣었는지 ...지금 한참 여리고성의 발굴이 이루어 지고 있지만 그 중에 어느 것이 여호수아때의 여리고성인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무너지고 다시 쌓은 흔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폐허더미, 흙더미같습니다. 이걸 텔이라고 하는데 백년전부터 학자들이 이를 발굴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흙더미의 한점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파내려 가는 거지요. 여러 시대의 성벽들이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공통적으로 밝혀진 것은 협곡사이에 위치해 있고 언덕위에 외성벽이 있으며 경사진 안쪽에 내성벽이 있는 구조라는 것은 밝혀졌습니다. 거대한 협곡을 가로막는 언덕위에 높고 두터운 성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겁쟁이 히브리노예들은 약간만 위험하면 바로 등을 돌리고 흩어져서 삽시간에 대규모로 죽어 나갈겁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 우리 하나님이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을 지휘하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얼토당토 않아 보이고 일의 진척이 전혀 없이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이고 너무 진도가 느린 것처럼 보여서 인간 지휘관은 부하들의 원망과 불평도 이겨낼 수 없고, 하나님의 방법을 실행하기도 어렵고 해서 아예 이번 싸움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지휘합니다.

우리가 여리고성 공략기사를 보면서 알아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는 인간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반증인 것이지요.

오늘날 인간 이성이 극성한 이때 모든 이들은 이성적이라는 말과 과학적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많은 부분에서 이성과 과학이란 말이 적용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는 불평하며 원망하고 인간적인 다른 적합해 보이는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보다 내가 더 똑똑하고 내가 더 잘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덜 똑똑하고 내가 지도해야 하는 하나님이라면 믿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하나님의 이 방법은 정말 신기하고 황당하며 말이 안되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은 성공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기 좋게 성공한 것입니다.
왜 보기 좋냐고요?
인간들의 불신과 불평을 한방에 잠재웠기 때문에 보기 좋게 성공한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어디에도 불평했다는 말은 없는데도요?
그래요, 그러나 외치지 말며 들레지 말고 라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불평하며 원망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불합리하고 황당하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 너무 잘났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의 뜻을 침묵으로 기다리지 않습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을 가르치려 하고 인간의 좋은데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잘못되면 그건 집행하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능해서거나 세상적인 말로 재수가 없어서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맹목적일 정도로 합리성과 능률성을 추구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비치 여리고성 공략전은 정말 황당할만큼 어처구니 없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지휘관은 여호수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들이 가지는 불만과 불평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가 차기 까지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를 볼때까지 잠잠하고 침묵으로 여호와의 신호를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여리고성은 일곱 번째 날 일곱 번의 나팔소리가 있고난 다음 백성들의 외침한번에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외치지 말고 들레지 말아야 합니다.
어때요? 우리 하나님의 이 방법이.

가장 황당한 것 같지만 가장 안정적이며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가장 느린 것 같았지만 지나놓고 보니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성을 공략하느라 죽은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도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수많은 백성들은 여호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불평하며 원망하며 속답답해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 느려서 속이 터집니까?
너무 얼토당토 않아서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까?
인간의 방법이 전혀 이용되지 못해서 오히려 미덥지 못합니까?

21세기 과학지식이 이용되지 않고 이제껏 내가 배운 논리와 합리성에 위배됩니까? 그래서 불평이, 원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습니? 그래놓고는 말도 못하게 해요?
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휘방식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지만 가장 강력하며 효율적이며 더욱이 가장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불평하고 ‘외치거나 들레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되어가는 결과를 보십시다. 외치지 말고 들레지 말고
최후의 그때에 나팔을 불면 한번의 함성으로 무너지는 여리고 성을 생각하며 침묵하며 여호와의 정해진 때를 기다립시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도 믿어질 수 없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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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설교를 들을 때는 몰랐는데, (실은 요즘 피로도가 높아서 익숙한 이야기를 들어서 그 때는 졸립기도 했고... 뜨끔;) 옮겨 놓으면서, 원고를 읽다보니, "일주일 동안의 행동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라는 느낌이 갑작스레 들더라고요.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평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주일 내내, 주어진 일을 반드시 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잡념들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단 하나만을 생각하는 태도도 중요하고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당연히 여리고성을 함락하는게 바람이었겠지요. 우리의 바람은 반드시 완수하고 싶은 이번 주의 꿈이라고 써보면 좋겠지요.

어쩌면 우리 눈앞에는 너무 선택지가 많은 것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런 식이지요. 하나님 이것도 해주시고, 저것도 해주시고, 좋은 배우자를 원하는데 성실하고 선하면서 유머 있고 밝으며, 안정적인 직장과 말 통하는 성격과... 오 마이 갓!!! 그럴 때면 하나님이 오히려 되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조금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성벽이 무너지는 그런 "막연한 판타지"를 우리는 바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안 할꺼지만, 바라는 건 전부 해주세요. 이건 성도라기 보다는 거의 협박? 하하. 실천과 사랑은 온데간데 없고, 욕망을 포장한 채 팔짱을 끼고 바라기만 한다면 이거이거 곤란하지 않겠어요.

글쎄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능력이 뛰어나고 신의 존재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사람, 스스로 판단 내리고 확신에 차서 걸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능력은 부족하지만 신의 존재를 생각해보며 겸허하게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 있겠지요. 우리는 "믿음"라는 개념을 "신앙"과 연결시켜서 사고하는 습관이 있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만의 세계와 확신에 갇혀버린 자기믿음"이 더 위험한게 아닐까요? "내가 곧 진리"라는 오만한 판단이 난무해서, 귀기울이는 사람이 사라져가는 사회가 되는게 아닐까 싶어요.

오늘 설교를 생각하면서, 저는 "신앙"이라는 것이 신과의 소통이고, 또한 실행이며, 그리고 의문을 가지더라도 행동해 보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해봤자 그게..." 라는 판단이 들어설 때마다, "믿음을 가지고 한 번 진지하게 해봐!" 라는 거지요. 베드로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무슨 고기가 그런데서 잡힌단 말인가요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결국 가서 해보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인생을 변화시켰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판단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보지 않았던 것에 도전해보고, 가지 않았던 길을 가보며, 그렇게 한 걸음씩, 하루씩, 열심히 살아갈 때, 삶은 amazing grace, 놀라운 축복으로 빛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덧붙여 목사님이 지난 주에 천성산에 올라가, 영상을 찍어오셨기에 같이 첨부합니다. 1분 동안 자연 힐링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