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아간 이야기 원고를 추가로 올립니다)
한사람이 지금 장막안에서 땅을 파고 뭔가를 묻고 있습니다.
무언가보니 금덩어리와 은덩어리, 그리고 아주 좋은 시날산 외투 한벌입니다.
이게 흙이 묻지 않도록 외투를 다른 걸로 싸고 깊숙히 파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연방 주위를 살피면서 서두르는 것을 보니 남몰래 할려고 하는 것같습니다
자, 과연 이 사람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1.삼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여리고를 성공리에 점령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군의 진로를 아이성쪽으로 잡았습니다.
아이는 ‘폐허, 무더기’란 뜻이고 여리고 서쪽18Km지점에 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아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이성은 해발800m의 험준한 고지대이며 이스라엘이 점령한 여리고는 해발-240m입니다.
무려 1Km이상을 험준한 산악을 올라가야 합니다.
즉 전략요충지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성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서 미리 성의 규모와 허실을 탐지하게 합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이 뭐라고 하는고하니 아이성은 너무 작으니까 한 이삼천명만 올라가도 능히 점령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넉넉하게 잡아서 삼천명을 보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패배하고 돌아왔는데 삼십륙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처음으로 패배를 당한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 합니다.
적을 너무 경시했다가 패배를 당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까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점령한 이스라엘백성들은 아이성은 너무 경시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의 패배의 원인이 교만때문일까요?
2.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여호수아는 패배의 소식을 듣자마자 자기의 옷을 찟고 티끌을 무릅쓰고 여호와의 궤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엎드려… 있다가’ 라는 말은 정확하게 다시 번역한다면 ‘그의 얼굴이 땅을 향하여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 고개를 들수 없을 정도의 좌절감과 극도의 의욕 상실가운데 떨어진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자기의 무력함을 실감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신앙적인 행동이기도 한것입니다.
3.주 여호와여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런일이 생겼습니까?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 개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 여호와는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이란 뜻으로 그가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바로 그 언약을 상기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7:7의 여호수아의 기도내용을 봅시다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셔서 아모리사람의 손에 붙여서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차라리 요단 저편에 거했다면 좋았겠습니다.
솔직히 겨우 한번 싸움에 패했고 36명이 죽었다는게 큰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왜 그렇게 애통해하며 지금 자기들이 모두 요단 이편에서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엄살을 떠는 것입니까?
9절에 나옵니다
이제 가나안 사람이 이 소식을 들으면 우리를 둘러싸고 공격해서 우리를 전멸시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솔직히 싸울 줄도 모르고 문명수준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후진 민족이지만 이때까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싸우신다는 소문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므로 도시들이 연합해서 연합군을 만들어서 쳐들어 온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번 그러한 믿음이 깨어지게 되면 더 이상 가나안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지 않게되고
그러면 그들이 여유를 찾고 연합군을 편성해서 성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을 포위해서 공격하기 시작한다면 훈련도 제대로 되지 못하고 무장도 변변치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등뒤의 요단강 때문에 쉽게 가나안에서 탈출하기도 어렵습니다.
결국 잘못하면 가나안의 먼지로 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36명이 죽은 적은 패배 때문에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계기가되어 가나안의 총공세가 시작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군이 소문처럼 강력하지도 않고 실제로 오합지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리고를 너무 쉽게 정복했기 때문에 잠시 착각한 것이 이제 한번의 패배로 말미암아 다시금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합지졸이란게 이길때는 사기충천해서 마구 달려가지만 일단 패배할 기미가 보이면 가장 먼저 대열을 이탈해서 도망을 가는 바람에 전쟁에 패할 수밖에 없는 조잡한 군대인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 적들앞에서 오합지졸처럼 흩어지자 가나안의거민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합니다.
여호수아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우리가 전멸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질건데 이를 어찌할 것이냐고 말합니다.
좀 웃기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게 기특하기도하고…….
하나님은 과연 뭐라고 응답하셨을까요?
‘내 걱정하지 말고 니 걱정이나 해라’
아니면 ‘그 녀석 참 기특하군’
과연 뭐라고 답하셨을까요?
4.일어나라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응답하시기를 ‘일어나라, 어찌하여 엎드렸느냐’
그리고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르며 도데체 당신의 가나안을 주겠다는 언약이 어찌되었느냐고 묻자
언약의 당사자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언약을 어긴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범죄사유가 나오는데 ‘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여호수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바로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을 말씀하셨습니다.
범죄때문이다.
그런데 7:11절의 원문을 보면 ‘그리고 곧’ 이라는 ‘웨감’이란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더 부각시키기 위함 입니다.
5.도적하고 사기하여
이제 범죄의 구체적인 행위가 나왔습니다.
나에게 바친 것을 도적질했다 그리고 사기를 쳤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기구가운데 두었다.
우리가 아간의 범죄를 보면 도적질은 했지만 사기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사기를 쳤다고 말씀하십니까?
‘사기하여’ 는 히브리어 ‘카하슈’인데 이것은 사기친다는 말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기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바친 것이란 말이 히브리어로 ‘헤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헤렘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지는 것을 말하지만 또 완전히 파멸되어야 하는 대상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봅시다.
헤렘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헤렘을 소유한 사람을 대신해서 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헤렘을 자기 개인용도로 취하게 되면 그 사람이 바로 헤렘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거나 완전히 진멸되어야 합니다. 이제 누군지는 몰라도 헤렘을 훔친 사람은 진멸되어야 할 운명이 된 것입니다.
과연 누가 여호와의 헤렘을 훔쳤을까요?
6.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헤렘을 훔친 사람을 알아내기 전에 하나님은 백성들로 하여금 성결케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결의 주체는 너희 각자입니다.
참, 한사람이 범죄했는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성결케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형제요 자매로 부르는데 이는 우리가 한 공동체에 속해 있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는 사랑의 공동체, 바로 여기에 우리가 속해 있습니다.
운명 공동체. 그러므로 한 사람이 범죄했을찌라도 각자가 범죄한 것과 마찬가지로 각자가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7.헤렘을 훔친자는 누구냐?
이제 여호수아는 과연 누가 범죄했는지 제비를 뽑기 시작합니다.
지파와 족속과 가족 그리고 남자의 순으로 제비를 뽑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제비가 뽑혔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14절에 지파와 족속과 가족앞에 ‘여호와께 뽑히는’이란 수식어가 각각 붙어있습니다.
이말을 다시 번역하면 ‘여호와가 (그를) 붙드는’이란 말입니다.
붙들어 준다는 말이 아니라 체포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인간에 의해 제비가 뽑히고 있지만 그것은 여호와의 눈앞에서 범인을 체포해 가는 과정이란 말입니다
60만분의 1의 확률입니까?
여호수아가 제비에 뽑힌 아간을 심문하자 아간이 실토를 하는데
금과 은덩이 그리고 좋은 외투 한 벌을 훔쳐서 감추었다고 합니다.
왜그랬느냐
하고 식구를 아골골짜기로 끌고 가서 돌로 쳐죽입니다
끔찍합니다.
그리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군대는 다시 아이성에 쳐들어가서 승리하게 됩니다
물론 그냥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적을 유인하고 복병을 가지고 적의 근거지인 성을 불태우고 다시 당황한 적들을 섬멸한다는 정말이지 그럴듯한 전술을 짭니다.
그대로 하니까 바로 승리합니다.
물론 이때는 앞서보다 열배나 많은 삼만명의 군대를 매복조로 파견합니다. 게다가 모든 백성이 다 전투에 참여해서 아이성으로 올라 갑니다.
자 그러면 우리 한번 다시 재구성해봅시다
아이성에 패한 근본원인은 무엇입니까?
적을 너무 경시한 것입니까?
아니면 아간의 범죄때문입니까?
그도 아니면 전술이 신통치 않아서 입니까?
하나님의 대답으로 보아서는 아간의 범죄때문인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아간 한사람이 범죄했는데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하는 일을 겪게 하십니까?
그것은 아간의 범죄가 아간 개인의 범죄라기보다 아간이 속한 공동체의 범죄로 주님이 보셨기때문입니다.
한사람 때문에 공동체가 피해를 본다
얼핏보면 불합리한 것 같아도 이것은 정말 합리적인 일입니다.
공동체에 속한 한사람 한사람이 공동운명으로 묶여져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러한 모임을 공동체라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저 사람과 내가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릴때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웃고 떠드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그건 전혀 공동체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바로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아간의 범죄만 없었다면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이성을 쉽게 공략할 수 있었을 까요?
글쎄요
우리가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무언고 하니
여호수아가 여리고라는 강력한 거성을 만났을때, 그리고 그앞에 요단강을 건널때 그는 뭐했습니까?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딘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성전투에서 그는 여호와의 뜻을 묻지도 않았고 그의 도움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적정을 살피기위해 정탐꾼만을 보냈을 뿐입니다.
그럼 왜 여호와의 뜻을 묻고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까요?
1.그건 그들이 교만해졌기때문입니다.
당시 아이성의 인구는 총12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1/4이 군대로 동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3000명
이정도가 장정이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 수를 계수하실 때 주로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손자의 병법에 적어도 적군의 세배가 되지 않으면 성을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일만정도의 군사는 가져야 적병을 공격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정탐꾼은 도대체 뭘 보고 와서 그렇게 큰 소리를 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성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성은 해발 800m의 험준한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리고가 해발이 -230m이기 때문에 여리고로 부터는 무려 1Km를 올라간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등산할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해발 1000정도의 산을 오르기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힘이 듭니다. 더구나 전쟁을 하려는 병사들은 갑옷과 투구, 무거운 무기, 게다가 공격용 장비들을 들고 올라가야 합니다.
뿐입니까?
이들을 재울 천막, 식량, 횃불재료, 기타 잡다한 것 까지 합치면 엄청난 짐들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게다가 언제 적병이 쳐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산위를 경계하며 오른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산을 다 올라가서 다시 성벽을 타야된다면 이것은 엄청난 일이 됩니다.
그런데도 군사도 겨우 3000명으로 이까짓거 정도야 하며 올라간다면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할 것입니다.
2.감사를 몰랐기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적을 경시하게 되었을까요?
바로 여리고성의 정복이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의 도하가 너무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도 쉽게만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여리고도 그정도였으니까 아이성이야 새발의 피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 너무 쉽게 해 주셨기 때문에 이들은 그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위해 엄청난 일을 하셨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성의 점령이란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우 삼천명만을 파견하고 태평치고 있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일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가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가 마주치는 일상의 일들에 대해서 결단코 그냥 그대로 심상히 여기며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의 진을 성결케 하고난 다음 그들은 다시 아이성을 공략해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가나안 깊숙히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일시적인 어려움과 장애가 있을 수는 있지만 결코 하나님의 언약이 폐기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이 하나님의 편에서 깨뜨려 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를 점령했으며 내륙 깊숙히 가나안땅에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힘을 냅시다
반드시 우리는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그는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 여기까지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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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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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목사님은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쉽게 생각해보면,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이미지랄까요. 그런데 몇 사람이 모여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들킬 것 같지도 않은 완벽한 계획입니다. 나 하나쯤이야 라는 생각으로 쉽게 악행에 손대는 것이지요. 이런 걸 생각해보면 더욱 이해가 빠를것 같습니다. 가령 공공이 사용하는 냉장고가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현금으로 만원짜리가 한 5개 들어 있다면 감히 함부로 손대기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에 추궁이 들어올 수도 있고, 찜찜한 티도 나기 때문입니다.
하하, 그런데 만약 공공 냉장고 안에 그리 비싸지 않은 시원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이 정말 한가득 들어있다면? 천원짜리 콜라와 아이스크림이, 합해서 대략 50개 정도 들어있다면? 금액적으로는 위의 예와 완전히 같은 상황이겠지만, 이번에 이 공공 냉장고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확실히 몇 개쯤의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이 사라졌을 것이며, 어쩌면 하나둘 사라지다가 금세 몽땅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이 그 정도 쯤은, 하나 먹을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아간의 행위를 단순히 멀리 떨어져 바라보며, 우습게 비난하기 보다는, 겸허한 태도로 자신을 돌아보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야가 중요하겠지요.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누군가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좀 더 자신을 조심하게 되고, 경계하게 됩니다. 모 신학대학 앞에 있는 "하나님 앞에서" 라는 엄중한 문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않고,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겸허한 태도가 반드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를 주의해야 겠지요. 첫째는, 쉽게 잘못을 저질러 놓고, 회개하면 그만이지, 라면서 "합리화부터 서두르는 태도"를 우리는 멀리해야 합니다. 자기합리화도 습관이 되다보면 거의 마약과도 같아져서 나중에는 잘못을 그냥 "당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다 맞고, 흡사 스스로가 신과 같아지는 이 판단의 오만함이야말로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이겠고요.
또한,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에, 구성원 개개인에 관하여 좀 더 세밀하게 돌아보고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하, 뭐, 너무 어렵게 느낄 필요는 없고, 그 사람의 입장은 어떨까,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가, 라는 작은 관심이 있다면 좋겠다 싶습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관심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일단 나부터냐, 우선 너부터냐, 교인이라면 꼭 한 번 고민해 본다면 좋겠네요. / 2013.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