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6월23일/형제들의 권고(요한복음7: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7. 22. 18:5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23일 주일 예배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요한7:1-)

오늘날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물질주의에 오염되어있습니다. 한때는 이를 맘모니즘이라고 했습니다. 돈신숭배, 물신숭배 풍조가 오늘날 온 세상을 뒤덮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팽배합니다.
사실상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빈부, 권력의 유무, 직업의 귀천에 상관없이 인간이란 것 자체로 사랑받고 존중받아야만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교회 안에 평가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분열을 일으키며 차별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사탄은 돈을 가지고 인간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더 영적인 면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사탄이 우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지요.
세상속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게 얼마짜리인가? 이게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가? 이게 돈이 되는가?’에만 가치를 두게 되었습니다. 즉 돈이 안되는 일은 우리들에게는 전혀 가치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권력을 얻고 명예를 얻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키우고 하는 모든 일 역시 돈이 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돈이 됩니다. 사람의 숫자는 곧 영향력의 숫자이고 그것은 돈과 권력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을 도구로 삼아 돈을 얻으려고 합니다.
봉사활동도 돈이 됩니다. 권력이 됩니다. 왜냐면 그러한 봉사활동에 공감하며 지지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정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하라는 말씀은 이러한 세상법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이 말을 따르게 되면 일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알고 잘했다고 칭찬하고 언론과 메스컴에 나오고 유명해지고 그것이 권력과 영향력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게 되지요. 그래서 세상적으로 주님의 말씀은 인기가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주님의 제자를 자청하는 사람들 조차도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경제법칙을 더 좇으려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 본문으로 들어가서
‘이후에’란 말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걸은 일 그리고 생명의 떡에 대한 설교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주를 떠난 이후란 말로서 그 사건이 있고난 다음 약 6개월이 경과한 시점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유대력 1월달의 유월절에 이 일이 있고난 후 지금은 유대력7월(양력9,10월)인 초막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주님은 유대로 가려고 하지 않고 고향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 6개월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드디어 가족들 가운데서도 말이 나옵니다.

사실 초막절은 유대인들에게는 신년제입니다. 유대인들은 7월에 새로운 해가 시작되거든요. 추수가 끝나고 추수감사절과 신년제를 겸하는 절기가 바로 초막절인데 해도 바뀌었으니 이제 ‘당신이 유대에 가서 유명해 지고 권세를 얻으라’ 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가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설교도중에 잡으러 온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차츰 차츰 예수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이적들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게 되자 이제는 갈릴리 시골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서 더 유명해 지라고 권고합니다. 지지기반을 유대에서도 닦기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의 형제로는 야고보와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두명의 여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더 유명해 지고 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신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성속의 권력을 아우르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를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형제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처음에는 귀신들렸다고 할만큼 이상한 소리만 하더니만 이제는 그 큰 권능을 가지고도 갈릴리 시골에서 죽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면서도 정작 가장 손쉬운 방법인 정권획득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새로운 해도 되고 했으니까 ‘서울’로 가서 출세하라고 권고하는 겁니다.

4절에 그들은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이라고 하면서 메시야 노릇을 제대로 하려고 하거든 스스로 세상에 나타내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예수의 출세에만 관심이 있었지 하늘나라니 지상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같은거 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형제이고 아버지인 목수 요셉의 아들일 뿐입니다.
허황된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눈에 보이는 지상왕국에서 한번 뜻을 세워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요즘말로 하면 돈도 안되는 짓 그만하고 돈이 되는 일을 하라는 말과 비슷합니다. 사실 거대한 교회를 이루고 거대한 예배당을 짓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고 그러한 목사가 신령한 목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언론에 나오고 책도 펴내고 강연도 다니고 그래서 마치 인기스타와 같은 목사들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께 바로 그런 식으로 유명해 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주님의 사후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어서 기둥같은 역할을 하지만 주님이 살아 생전에 그는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가 아직 주를 믿을 때가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역시 아직 때가 안되었기 때문에 유대로 내려가지 않는 겁니다. 왜냐면 유대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면 그가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걸 우리는 ‘하나님의 때’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직 그럴 때가 안되어서 갈릴리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사역하시는 주님에게 그 형제들은 왜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느냐고 압박하는 것입니다. 아마 형제들은 주님이 미워서 그런게 아니라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도 시골에서 고생하는 예수님을 보고 안타까워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지 싶습니다. 물론 유명해지면 그 덕도 쫌 볼려고 했겠지요.
본문에서는 왜 형제들이 예수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가 이 땅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셔야 함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것보다는 세상에서의 출세, 적어도 교계 내에서라도 출세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종교권력만이 남아있는 유대에서 종교인으로의 출세는 곧 정치적 권력이기 때문에 형제들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대단한 이적을 행하는 예수를 예루살렘에 보내어 더 큰 인물이 되게 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자꾸 하늘의 일이나 아버지의 뜻만을 강조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식의 이야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때는 형제들의 생각처럼 유명해지고 권세를 잡는 그런 때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과 그 형제들은 전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합니다.
각각 생각하는 바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사실 말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들면서 ‘세상이 나를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자기를 미워하는 이유가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세상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거듭 거듭 세상의 회개를 증거하며 새롭게 돌이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세상이 주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형제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시류에 편승하려하기 때문에 세상은 자기들의 편인 주의 형제들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우리가 오늘날 세상에 대해서 잘못을 말하며 세상의 가치관을 정죄하며 이에 맞서 싸울 것을 거듭 거듭 이야기하면 세상은 우리를 원수로 여겨서 싫어하게 됩니다.
세상이 인생을 조종하고 지배하는 원천인 돈과 권력과 쾌락을 멀리하고 그것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을 더 소중히 여기고 경쟁을 멀리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없고 우리를 지배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죄인보고 너는 죄인이다. 죄인이다 하면 당연히 듣는 죄인은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형제들에게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너희는 몰라도 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가고 난 후에 비밀리에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왜냐면 형제들과 함께 했을 경우에 아마 형제들의 세속적인 목적에 이용당할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을 더 유명하게 만들고 그에게 세속적인 권력으로 편입될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힘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종교권력은 당시 정치권력과 통하는 길이고 그것은 마땅한 산업이 없는 유대에서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처럼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인정을 받거나 헤롯의 관리가 되거나 유명한 랍비가 되거나 아니면 하다못해 종교계의 직위를 얻는 것이 부귀로 가는 방법입니다.

유대는 너무 가난하고 땅은 척박하기 때문에 농사지어서, 고기잡아서 부자가 된다는 일은 불가능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형제들이 주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형제들은 주께서 소위 말하는 ‘상품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뭔가 덕을 보고 싶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차피 자기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이지만 형제들을 보내고 몰래 올라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이 짧은 기사를 보면서 우리 주님의 처지를 보며 오늘날의 우리와 비교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주님에게 모인 20,000명의 사람들은 이후에 주님이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계속해서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자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갈릴리에서의 사역은 원위치를 하게 된겁니다. 12명의 제자들 외에는 모두 떠나갔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물위를 걷는 기적이나 사람들이 배를 타고 주를 좇았던 그런 열기가 무참히 스러졌습니다.
사람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주님을 좇았고 그에게서 새로운 메시야로서의 가능성을 보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러한 것을 거부하자 사람들은 언제 그를 떠받들었더냐는 듯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지켜본 주의 형제들은 이제 그들이 나서서 주님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왜냐면 그 일 후 반년이 지나도록 주님이 특별히 놀라운 사역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보통의 사역은 하고 있었지만 이전같은 폭발적인 대중집회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주님에게 왕관을 씌우려고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형제들이 볼 때는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왕이 되는 것은 여반장인 것 같은데도 주님이 계속해서 왕되는 것을 거부하자 마침내 자기들이 직접 주님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코치를 튼다?’
그래요, 형제들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왕국을 만들어 유대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다윗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표를 쉽게 이룰 수 있는데도 굳이 왕자리를 거부하는 주님을 형제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돈을 모은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주님은 집 한칸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기존의 회당이나 빈들, 야산 같은 곳에서 집회를 개최합니다. 먹는 음식은 가장 거친 떡쪼가리입니다. 찍어먹을 무화과쨈이나 꿀도 없고 고기나 요쿠르트는 구경도 못합니다.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하고 돈궤는 항상 딸랑딸랑하며 집한칸 없이 떠돌아 다니며 노숙합니다. 이게 사람사는 겁니까? 어떤 곳에서 사람들이 맞아 들이면 대접받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그 놀라운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모으지 못합니다.

주의 형제들은 이게 불만입니다. 차라리 그럴바에는 목수일이나 제대로 하면 밥이나 먹고 살지 ....... 남들에게는 오병이어로 공짜떡을 마구 퍼주고는 자기들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합니다.
목수 집안에서 형제들은 목수일을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당시 목수는 그래도 중간정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직종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특별한 직업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마인이나 유대의 종교귀족들에게 속한 토지를 소작하거나 삯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갈릴리나 바닷가에서 어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빈곤한 삶을 영위합니다. 그런데 목수는 그래도 기술자라서 제법 괜찮은 직업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목수일을 하면 그럭저럭 밥은 먹는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단 목사가 되었으면 목사 중에서도 큰 교회의 목사나 유명하고 부유한 목사가 되어야지 이건 뭐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계속 돈도 안되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기득권이 잘못되었다고 비판이나 하며 세상과 어긋난 삶을 살고 있으니 정말 답답했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주의 사후에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 되었는데 아마 야고보는 야심이 가득한 자였고 능력도 있었던 것같습니다. 잘하면 왕의 형제가 될 수 있었는데 저대로 두었다가는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어서 주께 세속의 영광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압박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년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새롭게 한번 이름을 떨치도록 압박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과 짝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잘못된 세상의 권위를 부정하며 맞서려 하는 이들을 미워하여 세상에서 몰아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밖에서 도만 닦으며 살도록 목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결혼을 하는 이유는 삶속에서 행동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산위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면 결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루터는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수도사와 수녀들을 짝지워서 가정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물론 자기도 수녀중의 한명과 결혼을 했지요.
일설에 의하면 마차에 한가득 타고 온 수녀들을 수사들에게 소개해 주었는데 그 중에서 아무도 데려가지 않고 남은 (아마 가장 못생겨서?) 여인과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치열하고 힘든 삶속에 있는 교인들과 유리된 변화산 위의 삶을 오래 지속해서는 세상과 유리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 세상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면서도 행동으로 삶속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제가 천성산꼭대기에서 , 이름 모를 숲길에서 느낀 아름다움과 평안함, 그리고 신비는 일시적인 것이 되어야지 영원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현실도피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항복하고 그들과 야합하여 적당히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형상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세속의 물질에 탐닉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들에게 삶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할 책임이 있기에 우리는 세속에서 사는 겁니다. 결코 하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러지 말고 이왕 할 것 같으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해서 잘나가는 목사가 되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것을 더 중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요 그것이 과연 주님이 요구하시는 교회일까요?

그런 식의 교회는 지금도 너무 많습니다. 안그래도 힘든 사람들에게 우리교회까지 가세해서 사람들의 돈을 요구하고 경제논리를 따라 대형교회를 만들고 그래서 다시 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마치 기업논리같지 않습니까?
누구는 예수님을 성공한 ceo라고 주장했던데 하하, 황당합니다. 주님을 경제논리로 재해석해서 교회를 세속화 시키는 것이 과연 주의 뜻입니까?

‘꿩잡는게 매’라고 그냥 사람만 모아서 교회당에 앉혀 놓으면 답니까? 그 중에서 단 한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주님의 제자를 만드는 교회가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무려 860만의 기독교인과 540만의 구교도가 이땅에 존재하지만 그래서 기독교가 마치 이땅의 국교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교회와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땅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냉정하게 살펴보시면 과연 오늘의 교회를 보고 우리 주님은 뭐라고 하실지.......

우리는 주님이 추구하는 바와 그가 말씀하시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애써 그의 꿈과 명령을 외면합니다. 그건 인간적으로 지극히 어리석고 또 힘든 길이기 때문이지요.
좁은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너무 힘들고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영원한 멸망의 길임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넓은길로 갑니다. 편하고 좋거든요.

주의 형제들은 너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자기들은 왕족이 되어서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데 주님의 고집 때문에 십자가 괴수의 형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왕 하나님의 길로 가려고 하면 십자가 말고도 예루살렘 공회의 인정을 받는 명망있는 랍비가 되는 것도 좋고 새로운 학파의 수장이 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이미 주님은 저명한 공회원인 니고데모나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의 고위신하, 로마의 세관장인 삭개오 같은 유력자들과 친분이 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헤롯의 아들들이 예수와 친분을 나누려고 그에게 기적을 요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인간적으로는 가장 어리석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주의 형제들을 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지 우리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주의 형제들은 주님을 어떻게 하면 유명하고 권세있고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들의 말을 따르기만 한다면 주를 스타로 키워서 자기들도 한몫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예루살렘으로 같이 올라가서 유대인들을 끌어 모아서 그들을 열광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모두들 행복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길을 버리고 가장 안되는 길로 가고자 하는 주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주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는 모습을 본 이후에야 비로소 그를 믿게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주님은 너무 너무 불쌍한 분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 사랑 대신에 미움을 받았고 이해받지도 못했습니다. 이후에 예루살렘교회의 감독된 야고보는 아마 이전의 일을 생각하고는 정말 많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산다면 결국 때가 찰 때 우리 주님의 놀라운 위로와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코 실망하지 말고 나아갑시다.
그래요, 하나님의 뜻과 의를 행하는데 있어 당장 세상이 나를 알아 주지 않고 나에게 부귀영화와 권력이 오지 않아도 걱정하거나 좌절하지 맙시다. 왜냐면 우리네 삶은 결코 여기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할말로 세상을 만드신 우리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 되시는데 걱정할 필요가 무에 있습니까?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고 결코 나를 이대로 두지 않으심을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형제를 사랑하며 주와 함께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2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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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 개인적으로 정직하게 말하자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좇는 삶을 살아갈 자신은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하여, 남을 위하여, 그렇게 고단하게 살아오고, 위로도 채 받지 못하고... 굳이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어리석은" 삶의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 몇 달 동안 쓸데없는(?) 고민을 가끔 하기도 했습니다. 사명을 따라간다면, 행복한 삶이라 말할 수 있을까? 차라리 적당히 도망쳐서, 타협하는 편이 더 합리적인건 아닐까?... 등등

그러다가 어느 날, 달란트(재능) 비유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두 개의 달란트를 받았다면, 그만큼의 가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쉽게 말해, "최소한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받은 재능을 펼쳐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어진 인생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실하게 살아갈 때, 훗날 값진 무엇을 얻게 된다는 것이 "믿음"이기도 하겠고요.

13년전이겠네요. 비가 오던 서울 서초의 어느 겨울, 저는 신학을 전공해볼까를 생각하던 나름 그 때는 순수한(?) 청년이었고. 홍 목사님은 철부지를 바라보며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왜 신학을 하려고 하는건데? 그러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해야지. 하고 싶지도 않는 일을 괜한 호기에 잘못 선택하고, 이후 고생하면서 살아가는건 안타깝지 않을까?"

왜 이 낡은 이야기를 꺼내었는가 하면, 감히 생각해 보건대, 예수님 역시도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게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것은, 목수로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왕처럼 호화로운 삶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추종자가 수만인 지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겠지요.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자 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헌신적이고 자발적인 희생이라고 해야할지, 불편함을 자처하는 양보라고 해야할지... 어쨌든 사랑의 길 말이지요.

세상이 혼탁해지면, 점점 사라져가고 희미해지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싸늘하게 사랑이 식고, 사람을 계산으로 대하고, 도움이 되나 안 되나부터 따지는 것, 저를 포함한 현대인이 좀처럼 자유롭지 못한 영역이지요. "너를 위해서 그냥 해주는거야" 같은 태도가 사라지기 때문에, 사람은 이제 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으며, 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심리학과 처세법이 활용되는 세상. 저부터가 그런 영역의 책들을 워낙에 즐겨 보기 때문에, 반성도 됩니다.

지인이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을 찾아서 준다면, 그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며 아주 고전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또한 생각해보면 제가 그만큼 세속적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런 황금률보다는 단지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우선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의 애정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이 최대한 되어보는 애정이 중요하겠고요.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가 십자가를 자처함으로서, 최대한의 굴욕을 당했고, 그리고 가장 놀랍게도 그 뒤를 진심으로 뒤따르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생각할 때, 바로 "누군가"는 하늘의 가치를 바라보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에 떨던 베드로도, 인간적인 갈등을 마침내 이겨내고 끝까지 전도자의 삶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도 여전히 누군가는 타협하지 않는 바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갈등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끝까지 깨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서투른 표현이겠지만, 믿음이란 그렇게 흔들리면서도 가는 것이고, 그러다가 분명히 성숙해 지는 날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좁은 길"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길을 걸으며 기쁘게 살아가는 "용기", 그리고 "믿음"이 있기를 매일 바라는 것이고요.

이래저래, 저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만 계속 듭니다. 하하. 이번 주에는, 밀린 설교들 몇 개 더 올려야 해서 장문은 여기에서 이만 줄입니다. / 2013.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