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7월7일/그리 아니 하실지라도(다니엘3: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7. 24. 16:2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7일 주일 예배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다니엘3:1-)

오늘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을 포함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래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며 하루 하루를 삽니다. 이것도 해주시기를 원하고 저것도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왜냐면 이 불가측적이며 근본적으로 악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전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아버지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저렇게 아버지께 내어 놓는 기도의 제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질 것이라고.

우리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 여자, 권력, 명예, 건강, 사랑, 평화.........사람에 따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히 단언한다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 ‘목숨’이 아닐까요?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가운데서 하나님 아버지 저를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번 한번만 살려주시면 제가 아버지를 위해서 이러이러한 일을 하겠습니다라며 매달리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 인간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천국에 대해서도 완전히 안심하지 못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천국이 있을 것인지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천국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곳일까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걱정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바라며 희망을 가지기보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의 죽음이라는 경계선에서 두려워하며 망설입니다. 될 수 있으면 그 선을 넘어서 죽음너머의 세계로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이건 믿음의 문제를 떠나서 어쩔 수 없는 하루살이 인생의 한계입니다. 눈으로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그래서 웬만하면 지금껏 살아 온 이 삶을 그대로 지속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 죽음 그너머의 세계로 거침없이 들어가려고 한 사람들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곁으로 가려고 한 사람들을 봅니다. 배교의 길을 걷고 잠시 잠간의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신념을 더 중시한 믿음의 용사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가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바벨론에서 일찍이 벨신의 형상과 식탁을 만드는데 순금22톤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하니 아마 이 느부갓네살의 금신상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신상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자신의 위엄을 천하에 알리려는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드러난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 위대한 하나님이 지키는 도성을 내가 정복했으므로 하나님도 실제로 별거 아니다?
이런 교만한 마음이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금신상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이 신상은 두라평지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보통 한규빗은 45~50cm로 보기 때문에 이 신상의 높이는 약27~30m정도가 됩니다. 거대하기는 하지만 아마 받침대를 포함한 높이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어쨌든 이 거대한 신상을 세운 이유는 인간왕의 교만 때문입니다.
신상이 세워진 두라 평지가 어딘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왕도인 바벨론과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야 되니까 당연한 것이겠죠?

왕은 이 신상의 낙성식에 바벨론 전국의 주요관리들을 소집해서 모두 그 신상에 절하게 명령합니다. 이때 모인 관리들 중에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다니엘의 세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여한 관리는 총독부터 시작되므로 다니엘은 여기에서 빠집니다. 그는 총리거든요. 나라의 재상. 아마 그래서 다니엘은 이 어려운 시험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 같고 다니엘의 세친구들은 고위 지방관이었으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보면 각 민족과 언어가 다른 수많은 관리들이 참석한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당시 모든 이들이 신을 섬기고 있고 또 나라마다 민족마다 수호신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절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네의 수호신을 배신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관리들에게는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다신론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신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여기 ‘두라’에서 또 다른 신상에 절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세상의 배척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너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다 이거죠.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인정하고 그렇게 두루두루 어울리면 좋겠는데 왜 너희는 한 신만을 섬기냐?
그건 곧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을 만드신 참 신이자 유일한 신인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과 참 신이자 유일한 신을 부정하는 이들과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싸움이 세상의 상대 문화에 대한 존중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종교 다원주의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우리의 유일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조롱하고 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외에 유다의 관리들은 어땠을까요? 그들 역시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교육받은 이들이고 유다민족을 대표하여 그들을 다스린다면 누구보다 유다민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지켜야 할 것인데도 본문에는 아쉽게도 이 세 친구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신상에 절하는 것에 반기를 든 사람이 안보입니다.
이들은 왜 자기들의 신앙을 저버리고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했습니까? 여기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본문을 조금 더 따라가 봅시다

금신상 앞에 도열한 바벨론의 모든 속령의 관리들에게 명하기를 악기 소리가 나면 모두 엎드려 절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절하다’란 말은 그냥 절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경배한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절은 절대로 다른 의미가 될 수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신상을 신으로 섬기며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절하는 것은 그래서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우리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쪽 어깨에 닿는 식으로 하지 결코 여기에 고개를 숙이고 절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만일 어느 날 엔가 국기에 대해서 절하라고 시킨다면 오늘 느부갓네살의 신상에 절하는 것과 똑같은 우상숭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은 각 나라와 민족의 방언으로 통역이 되어서 동시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못알아 들어서 절을 못했다는 것도 전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두라 평지에서 살아 나갈려면 반드시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민족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유일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만은 이게 진정 큰일입니다.

왜냐면 단순한 왕에 대한 충성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배교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신상을 만들지 말고, 그 앞에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보세요, 악기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기들을 한 개씩 가지고 와서 합주를 합니다. 게다가 각 민족의 언어로 명령을 전달한 통역사도 있습니다. 이정도면 의식의 장엄함뿐만 아니라 다민족에 대한 배려도 최상입니다. 그런데 나만 홀로 꼿꼿이 서서 산통을 깬다는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한가지 사실을 포고합니다.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어때요. 그냥 무릎 꿇고 머리 한번 숙이면 이 부귀영화를 지속할 수 있는데 괜히 신념이네 뭐네 하며 머리를 꼿꼿히 세우고 있다가는 풀무불에서 화형당합니다. 그까짓 절한번 하지 그게 뭐 대수입니까?
절하고 나서 나중에 하나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하면 되지 뭘그렇게 고민합니까?

그러면 사랑의 주님은 당연히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의 목숨도 영혼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그렇게 융통성있게 살아야지 사람이 너무 고지식해서는 안되겠지요?
솔직히 망국의 백성으로 바벨론의 고위직에 오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걸 진짜 아무것도 아닌(?)일로 포기해야 합니까? 그게 목숨과 바꿀 만큼 큰 일입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걸 포기해요?

본문에 나오는 ‘절하다’는 단어는 사실 2장에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에게 절하다는 그 단어가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와 그 꿈해몽을 하는 위대한 신의 종을 보고 느부갓네살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그 앞에 절한 것이지요. 그런데 세월지 지나고 그 하나님의 도성을 점령하자 다시금 느부갓네살의 마음이 높아집니다.

‘뭐야? 여호와도 별거 없쟎아. 나의 제국은 영원불멸이야’ 이런 마음이 그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교만하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한순간도 우리의 마음을 방만하게 하고 스스로 교만하여 행동을 방자하게 한다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적은 것에도 감사하십시오. 지금 현재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면 하나님의 더 큰 복이 임할 것입니다. 자중하십시오. 넘어 질까 스스로 두려워 하십시오.

9절에 갈대아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 만년을 살아라! 영어로는 ‘영원히 사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신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이 만년을 살겠으며 영원히 살겠습니까?

우리가 만세를 부르쟎아요. 그거 옛날 조선에서는 황제에게만 바치는 거라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천세’라고 했습니다. 천년을 사십시오. 그것도 말이 안되는거지만 황제들은 ‘만세’를 태연히 받아 들였습니다. 제정신들이 아니네요.
오늘 갈대아인들 역시 느부갓네살 왕을 찾아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서양 영화를 보면 그쪽에서도 왕에게 만세를 부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냥 “왕이여 오래 사십시요”라고만 말합니다. 만년이니 천년이니 같은 황당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오래 살똥 말똥인데 참 천년 만년은 또 뭡니까?

그건 그들이 느부갓네살을 신으로 아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상을 세웠쟎아요.
이 사람들은 다니엘의 세친구를 참소하기위해 이들이 저지른 죄 세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음으로 왕을 무시했고 둘째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았고 세 번째는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죄를 적시합니다.

사실 두 번째 죄는 오늘날에도 종종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살면서 왜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 않느냐?” 더구나 네가 바벨론 왕의 큰 은혜를 입은 몸으로서 그건 절대로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갈대안의 참소자들은 평소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만 섬기는걸 보고는 매우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기 금신상에 절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사실을 슬쩍 끼워 넣는 거지요.

마침내 세사람은 분노한 왕 앞에 끌려 갑니다. 왕은 다시 이들에게 금 신상에게 절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회유하려는 거지요. 그만큼 왕은 이 세친구들을 아꼈습니다. 이대로 죽이기는 너무 아까운 그래서 너무 아쉬운 마음에 회유할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기회를 줄테니까 절해라”

본문에는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풀무불에 집어 던진답니다. 그건 이 신상 옆에 사람들을 집어 던질 풀무불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평소에 , 모르고, 그냥 막연히 이야기하는 것 하고 막상 왕의 앞에 끌려와서 맹렬히 타는 풀무불을 보며 위협을 당하는 것 하고는 그 느낌이 천양지차입니다. 시뻘건 불꽃이 넘실거리며 자기를 곧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은 그런 상황앞에서 끝까지 자기의 종교적 신앙을 지키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이건 단순히 부귀영화를 포기하는 문제가아니라 목숨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풀부불에 던져 넣어 태워죽이는.............
세 친구들에게 주어진 시련은 너무 가혹합니다.
그러면서 바벨론의 왕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글쎄요, 누가 우리를 세상의 왕인 마귀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내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인생이라는 거대한 파고에서 건져내겠습니까?
바로 여기서의 ‘신’은 ‘엘라흐’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엘로힘’의 단수입니다. 즉 느부갓네살은 ‘너희가 그렇게나 섬기는 여호와 라해도 결코 내손에서 너희를 건져내지는 못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너의 신이 비록 능력이 많아서 꿈도 계시해 주고 꿈도 해몽해 주었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너희를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전능의 신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보호하지 못했고 그래서 유다 역시 자기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잡혀 왔을 때만 해도 아직 유다가 망하지 않았고 예루살렘이 점령되지 않았지만 이제 그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자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심해진 것입니다.

그렇게나 교만하여진 왕에게 세친구는 이렇게 부릅니다. “느부갓네살이여”
굉장하지 않습니까? 네가 아무리 높다고 까불어도 결국 너는 인간에 불과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전 세상을 지배할 신이라고 하는 망상에 빠져있는 이에게 이름을 대놓고 불렀으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행동입니다.

일고의 여지도 없는 것이지요. 16절의 “우리가”라는 말을 조금 더 깊이있게 음미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이런 뜻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신으로 섬겨도 우리는 네가 인간인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17절의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이란 말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문은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풀무불도 불사하게 만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에서 섬기는 이란 말은 지금 현재도 , 우리가 왕의 앞에 잡혀 와 있는 이 순간에도, 비록 아무런 능력도 행하지 않고 묵묵히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키시며 그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가 모르는 먼 곳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의 때가 차면 놀라운 역사를 우리가 볼 것임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지금 그가 묵묵히 계신 것 같은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친구들은 이야기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그래요,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부당하게 핍박받는 이들을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요, 혹여라도 우리를 모른다하고 그냥 계시면 어떻게 되지요?

본문에 그 놀라운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신상을 섬기지도 신상에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주시지 않는다 해서 내가 그를 배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 그냥 계신다고 해서 결코 나를 끝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위해 나의 때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침묵하신다고 해서 그가 아니 계시거나 우상인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과 존재는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왕을 진노하게 한 세친구는 평소보다 칠배나 뜨겁게 만든 풀무불 속에 결박된채 던져졌지만 살아 났습니다.
오히려 세 친구를 던져 넣으려고 풀무불에 가까이 간 이들에게는 불이 옮겨 붙어 죽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불구덩이에 던져진 이들은 결박이 끊어지고 살아나서 불가운데로 이리 저리 다닙니다. 게다가 분명히 불속으로 세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불속에는 네 사람이 있습니다.

25절에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놀라운 일이지요. 주께서 이들을 위하여 친히 불가운데 나타나셔서 이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내어놓자 주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절망가운데서 살길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왕도 이들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호칭하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죄인들을 진멸하도록 조서를 반포합니다. 더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벼슬을 높여줍니다.

느부갓네살은 체면을 톡톡히 구겼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자기의 명령을 준행하던 용사들이 풀무물 가운데로 세친구를 던져 넣으려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종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그는 결코 신이 아니었고 풀무불 속에 들어간 이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야, 하나님의 능력이 과연 굉장하구나!
이렇게 느끼고 끝일 때가 많습니다. 왜냐면 오늘의 나에게는 그런 시험이 전혀 닥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봉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하나님은 풀무불에 던져지기 직전에 그 집행을 중단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풀무불에 던져 지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들을 살리셨습니다.

보통은 풀무불에 던져 짐으로 모든게 끝이 납니다. ‘하나님 이제 모든게 끝입니다. 당신의 때는 언제입니까? 끝끝내 우리를 외면하시는군요’ 라고 할 때에야 비로소 역사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 응답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듯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려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풀무불 속에서 살아 나옴으로 인해 느부갓네살은 그가 결코 신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전능하신 신이며 그 신의 은총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받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왕만 알게 된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하게 되었으며 아마 이러한 소식은 바벨론 전지역으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형 집행 직전에 왕의 마음이 변하여 세친구가 살아 났다면 세친구에게 은혜를 베푼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왕이 될 것이고 여전히 세상은 왕이 높은지 하나님이 높은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나가게 되었을 것이고 누가 참 신인지도 모른채 지나갔을 것이며, 끊임없이 세 친구와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이 음모와 야욕을 끊어버리지 않고 이들을 참소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금으로 되었다는 것은 실로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의 시험은 다른 신이 아니라 바로 신상 자체, 즉 금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 우리에게 오늘도 세상은 맹렬하게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보통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있는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돈은 결코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돈은 하나님,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바로 그 우리의 아버지께서 인간들을 편하게 하고자 만드신 수단에 불과한 것인데 어찌 그것이 목적이 되어 인간의 숭배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드넓은 평지에 서 있는 십층 높이의 금신상은 그 장엄함이나 화려함이 일대 장관입니다. 게다가 그 앞에 도열한 수많은 이들은 모두 높은 벼슬아치들입니다. 즉 왕의 은혜를 입은 이들입니다. 왕의 은혜로 고위직에 올라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므로 당연히 왕은 이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인간적인 호소에도 충분히 절한번 할만 합니다. 그냥 눈 딱 감고 절한번 하면 끝입니다. 바벨론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면 다시 여기 와서 저따위 신상에 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왕이 황당해도 전국의 지방 수령들을 모아 절하는 행사를 계속하겠습니까?
독재자의 변덕이 죽끓듯하니 그냥 은근슬쩍 비위를 맟줘 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인간적인 은혜갚음이나 좋은게 좋다는 식의 인간관계마저 외면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의 처사에 실망하고 좌절해서 그를 버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세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고 이끄시는 것을 믿기에 주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저를 죽어서 천국으로 인도하심을 믿기에 지상에서도 주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죽음 그 너머까지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모든게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보여주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주는 결과물, 열매는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이가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일을 행하십시오.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신앙이 아니라 특별한 믿음을 보이십시오.
바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보이십시오.

우리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개입하실 시기를 보고 계십니다. 어느 때가 가장 적절한 때인지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그가 우리보다 당연히도 더 잘 아시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그 옛날 죽음을 이겨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말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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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의심도 많고, 비판적인 시선을 갖고 있는 저는 오래전부터 주님께 따져묻는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표현하자면,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무 하지 않습니까?" 같은 질문을 던져보곤 했습니다. 그 절정은 3년전인 2010년 이맘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공부방에서 활동할 때, 꽃다운 10대 아이들이 참 잘 웃는것을 보고, 이 친구들은 사소한 일에도 정말 즐겁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011년, 저는 꽤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 한 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아서, 무균실에서 생활하고, 학교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었지요. 저는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찾아오는 비극 같은 일들, 말하자면 "삶의 부조리함" 에 대하여, 강한 허무가 들었습니다. 삶이란, 누군가에게는 왜 그렇게 가혹할까?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았고, 때로는 선한 사람들이 내좇겨나서 눈물짓는 모습도 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할 수 있는게 "고작 기도 뿐이라" 모여서 기도하고, 틈틈히 기도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동화 같은, 기적 같은 일들은 금방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이후 오랜기간 그 아이를 볼 수 없었습니다.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닐지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받아들이기가 괴롭고, 왜 하필 지금 나에게..., 왜 하필 우리 아이가... 같은 원망부터 자리 잡기 쉽지요.

그리고 며칠 전, 정말 우연히도 그 아이를 다시 보았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패스트푸드점에 놀러왔더라고요. 마냥 기뻤고, 사람이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아주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좋은 길로만 인도하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기를, 그래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이 계속 들었습니다.

몬테소리라는 여의사이자 교육가가 있는데, 그녀가 자신만의 길을 계속 걸어가자, 존경과 함께 갖은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길과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마이너 였으니까요. 차별과 편견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기자가 묻자 몬테소리는 인상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개 한 마리가 발꿈치를 물려고 한다면, 개를 발로 차내거나, 아니면 더 높이 올라가든가 해야겠지요. 나는 더 높이 올라가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했음에도, 가끔 뒷목잡는 곤란한 상황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원망하고, 그와 논쟁하고자 달려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누군가는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내려와 싸울 것인가, 묵묵히 계속 힘을 내서 올라갈 것인가,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여전히 기쁘게 살아가고, 힘껏 살아간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살아서 존재한다는 것은 "황홀함"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영역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당당히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기적이 펼쳐지지 않을지라도, 저는 "감사"를 선택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삶의 모든 경험은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르침을 준다' - 문요한 선생님의 마음 청진기에 있는 대목입니다. 저는 요즘에야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험난하고, 부조리하고, 차갑고, 이상할지라도, 인생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 2013.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