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7월14일/느부갓네살의 꿈(다니엘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7. 31. 14:3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14일 주일 예배

느부갓네살의 꿈 (다니엘2:1-)

꿈은 우리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신비입니다. 이 꿈으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예지하기도 하고 현실을 자각하며 무의식의 깊은 세계를 관조합니다. 그러므로 꿈은 우리 인간이 영혼을 가진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뭔가 현실을 벗어난 신비한 세계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꿈의 신통력을 믿고 있었고 또 오늘날 많은 이들은 꿈해몽에 특별한 법칙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도 꿈을 통한 계시가 여러번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꿈을 해몽하여 거대한 제국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느부갓네살의 꿈에 관한 것입니다. 꿈이라!
느부갓네살은 보다 정확하게는 느부갓네살2세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정복군주로 건축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계7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바벨론의 공중정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그가 두라 평지에 자기의 거대한 황금신상을 세우고 여러민족의 관리들을 모아서 경배하게 한 것을 압니다. 그는 항상 교만하여 인간을 넘어 신이 되고자 했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다시금 겸손을 회복하고 인간 왕으로 만족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오늘 꿈을 꾸었습니다. 굉장한 꿈이었다는 생각은 드는데 정확하게 자기가 꾼 꿈이 뭔지를 묘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뭐 어쩔 수 없지”라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그 꿈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에서 깨어나 번민하여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꿈이 뭔지 그리고 그 꿈이 계시하는 내용이 뭔지를 알고 싶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꿈을 해몽하는 일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꿈을 꾸어도 그 꿈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꿈을 해몽하려고 해도 꿈을 정확하게 묘사활 수 있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이 느부갓네살은 그만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을 잊어버렸습니다. 대략적으로는 기억을 하지만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고 그것의 의미는 더더욱 알기 어렵습니다. 그게 굉장한 뭔가를 계시한다고는 결코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데체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 난감합니다.

그 누구도 남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꾼 꿈을 재생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박사와 술객들은 신들 외에는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알아내서 그 꿈을 해몽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신과 소통한다고 해서 우리가 너희를 예우하고 먹여 살리는데 이제 그 실력을 보일 때가 되었는데 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희가 신통력이 없다는 말과 같으므로 너희같은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도합니다. 오늘날도 혹세무민하는 많은 사이비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기가 신과 소통하며 신의 명령을 행한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미혹하고 몸과 돈을 갈취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망가뜨립니다. 이게 오늘날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여하튼 바벨론의 박사와 술객들은 죽을 지경입니다. 막무가내인 독재자는 무조건 자기의 꿈을 해몽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꿈의 내용은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꿈까지 알아내라는 정말 황당한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왕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모두 사형에 처해질 운명입니다.
당시에는 꿈 해석이 현자들의 중요한 역할이었고 꿈을 통해 왕들이나 제사장들에게 계시를 준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자기네들의 신 벨이 뭔가 중대한 계시를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은 소위 말하는 벨 신의 제사장들과 무당들 박수와 술객들에게 그 꿈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또 그걸 해몽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그걸 이행하기 위해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의 천문학자들이 소집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바벨론 왕궁의 신과 연관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 겁니다. 점성가들은 별자리를 보고 점을 쳤기 때문에 불려온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천문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일례로 바벨론의 천문학자 나부리만누 라는 사람은 별의 운행을 연구해서 지구의 일년이 365일 6시간 15분이란 것을 발견해 내기도 합니다. 고대에는 별자리의 운행이 나라의 중대한 운명과 연관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점쟁이들과 술객들뿐만 아니라 점성가들까지 불러 들인 것입니다.

소집된 갈대안 술사들은 왕에게 꿈을 해몽할테니까 왕의 꿈을 자기들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대략적인 꿈의 내용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꿈이 뭔지를 알아내라는 억지만 부리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억지이기는 하지만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자기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꿈의 내용을 말해달라는 술사들과 무조건 꿈의 내용을 알아내고 해몽도 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은 무려 세차례나 걸쳐 충돌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꿈의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굉장히 엄중하기 때문에 신의 계시라는 생각으로 소위 신통하다고 하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알아내지 못하면 죽인다고 협박합니다. 어떤 독재자도 이런식의 일처리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 소위 신통하다고 하는 이들의 항의는 가볍게 무시됩니다.

“신과 통한다고 하면서 이걸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보다 정확하게는 토막을 내서 죽이고 집터는 똥더미를 만들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터를 폐허로 만들어 오물이 쌓여있는 곳으로 즉 공공변소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이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잔인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고대 바벨론의 기록에는 제사장이나 술사들을 집단 학살한 기록이 종종 나옵니다. 이런거지요.
신과 소통한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신탁을 받았는데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된다더라” 이렇게 말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왕들을 항상 이들을 가까기 하고 이들의 조언을 듣지만 반대로 이들을  항상 의심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거짓 우상을 섬기며 혹세무민할 뿐입니다. 신통력이란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섬기는 신이 가짜인데 무슨 신통력이 생깁니까? 이제 가짜 신을 섬기며 혹세무민하던 무리들에게는 일대 위기가 닥쳐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대 전제군주군가라 하더라도 느부갓네살도 인간인데 같은 신을 섬기는 입장에서 너무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통하다고 해도 어려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몸을 토막내서 죽이고 또 그집을 공공변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반역자에게 해당하는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너무 심해 보입니다.

그런데 ‘밀러’라는 사람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그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만 그 꿈이 가리키는 것을 반역으로 보고 이 반란이 술사들과 제사장들이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라는 것은 어쩌면 반역의 음모를 꾸미는 종교지도자들을 학살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느부갓네살의 다음 세명의 왕 중에서 두명이 암살되는 정도로 바벨론의 왕들은 반란과 암살의 위협에 쌓여 있습니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전제군주국가에서 왕을 죽임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는데 바벨론에서는 이런 일이 더 심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통력이 있는’ 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어떤 크고 권력있는 왕이라도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어떤 사람도 그 일을 행하지 못하고 당연히 그렇게 명령한 왕도 없다고 말하며 왕과 입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왕은 점쟁이들을 더 몰아 세웁니다. 너희들이 신통력이 없구나, 시간만 끌려고 하는걸 내가 모를줄 아느냐 , 시끄럽다. 나의 명령은 확고하다“

결국 화가 난 느부갓네살은 왕의 앞에 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를 다 죽이라 명합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가짜들을 비싼 돈을 들여서 유지할 필요가 없는거지요. 게다가 가짜에게 속았다는 심정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권력과 부에 탐욕적이라서 항상 반역의 세력에 이용될 수 있으니까.
이건 청천벽력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이제 3년간의 교육과정을 다 마치고 신출내기 지혜자로 뭔가 일을 해볼려고 하는 시점인데 엉뚱한 일에 연루되어 무고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전혀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정책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혀 무고하고 엉뚱한 사람이 고생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여기에 연루가 되어서 꿈을 채 펼치지도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13절에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라는 말의 해석은 “그리고 그 지혜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앞에 불려온 높은 점쟁이들과 점성술사들은 이미 처형되었고 전국적으로 모든 지혜자들을 죽여서 처형할려고 하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실로 풍전등화의 위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은 다니엘과 세친구에게는 엄천난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 다니엘과 세친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높은 고관들이 죽고 이제 다니엘이 승진할 수 있는 기회, 기회의 장이 열린 것입니다.

종교지도자, 술사들은 당시의 왕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권력가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바벨론의 건국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느부갓네살은 이들이 반란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제대로된 다니엘과 세친구와 같은 참 신의 종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누군가에게 큰 위기는 누군가에게 큰 기회를 줍니다.

누구에게 위기고 누구에게 기회입니까?
거짓말로 혹세무민하던 사기꾼 종교인들에게는 위기이지만 참 신과 소통하던 다니엘과 세친구에게는 기회입니다. 거짓으로 권력자의 눈을 가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에게는 위기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실력을 기르고 있던 이들에게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다하는 점쟁이들과 술사들이 다 죽는 바람에 다니엘은 바벨론 전 지혜자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바로 이게 기회인 것이지요.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고 인맥이다 뇌물이다 하는 필요 없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번에 정상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참으로 섬기며 실력을 구비하고 있는 자에게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때를 기다리십시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지혜이지 신의 지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비빌 언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모든 지혜자를 죽이러 근위대장 아리옥이 궁밖으로 잡으러 나갑니다. 아리옥의 이름은 수메르어로는 ‘달 신의 종’이란 의미가 있고 페르샤어로는 ‘선한 이란 사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위대장이란 말은 ‘학살자들의 우두머리’란 의미입니다. 왕의 지혜자 학살 명령이 떨어지자 이 명령을 집행하기위해 아리옥은 군대와 함께 궁밖으로 나옵니다. 비상상황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자의 손에서 다니엘을 구할 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란 뜻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심판자이기 때문에 아리옥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아리옥에게 어떻게 지혜롭고 슬기롭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일을 하나님의 종이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지혜롭고 슬기로웠기 때문이며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에게 주께서 위기상황에서 지혜를 주신거지요.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러 온 아리옥을 만나 왜 지혜자를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서 물었고 아리옥의 말을 듣고는 그에게 느부갓네살에게 청해서 형의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가 왕의 꿈을 알고 또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옥은 다니엘의 청을 받아 들여 그를 죽이지 않고 느부갓네살에게로 데리고 가서 느부갓네살을 만나게 합니다.
여기서 다니엘은 왕과 독대하게 되고 그에게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아리옥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왕과 독대할 기회를 가지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내 속에 온갖 재주와 꿈이 있지만 이걸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해 주는 이가 없어서 그냥 썩히고 쓸쓸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땅의 수많은 실업자들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고 좌절해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고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기회가 옵니다. 주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아리옥은 위기이며 죽음의 사신이지만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자, 하나님과 더불어 소통하는 자에게는 기회이며 선한 자입니다.
비록 ‘학살자들의 우두머리’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기회이자 출세의 발판입니다.
물론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

어때요? 오늘 우리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큰 위기가 닥치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 위기는 다른이 에게는 잔인한 학살자로 다가오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우리에게는 기회로 다가옵니다. 나를 왕에게로 인도할 징검다리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이런 큰일이 없었다면 다니엘이 어떻게 그 신분으로 왕과 독대를 하겠으며 왕의 앞에 서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인맥과 학연, 지연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비상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게 차례가 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몇일의 말미를 요청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세친구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함께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위기의 순간에 해법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거든요,
18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시니라”

어때요? 기도도 그냥 할 수 있는게 아니네요. 하나님이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려고 이들에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한다고 다 이루어 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걸 이기고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할 힘을 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니엘과 세친구의 합심 기도는 도저히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은밀한 일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뭐 해주세요 뭐 해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자비’는 어머니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하지만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보여주셨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라고 찬양합니다. 과거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위기를 해결하신 그 하나님, 나의 조상들이 간구할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 간구를 들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달이나 태양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적인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나에게 가까이 계신 분이기도 함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그가 꾼 꿈을 이야기하고 역시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게다가 왕이 그에게 절하며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천하의 다니엘이 아무리 신통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기회가 없다면 그도 그저 그런 삶을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언젠가는 우리를 들어서 놀랍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신과 소통한다면 왕의 자문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살던 갈대아의 점쟁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신과 소통하지 못함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인간의 미사여구로 왕에게 아부하고 왕에게 변명해도 그들이 신통력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왕에게 영원히 살라고 아부해도 그 아부가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그들의 기득권은 맥없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는 거짓된 아부와 인맥, 뇌물과 배경은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통력, 신과 소통하는 능력, 하늘의 하나님과 통하는 능력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왕궁의 교육을 이수했지만 더없이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왕의 재위2년째는 다니엘이 3년의 교육을 막 마친 해입니다. 만일 그가 지혜자가 되지 않고 아직 교육을 받는 학생이었다면 아리옥을 만나서 죽을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기 위하여 기도할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실력을 나타낼 기회, 왕의 앞에서 왕의 꿈을 말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실된 종에게 세속의 위기는 곧 기회이며 그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런 배경도 재물도 없는 약소국 유다의 포로 소년이 출세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에게는 비빌 언덕이 없거든요.

세상에서 오는 위기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기회이며 출세의 징검다리입니다. 왜냐면 그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가 바로 나의 주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위기의 순간에 합심하여 기도하며 아버지의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넘어 기회를 잡도록 주가 계획하신 역사에서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나에게 없던 비빌 언덕도 만들어 줍니다.

더 이상 슬퍼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아직 남아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좌절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할 기도할 힘이 있기에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학살자들의 우두머리 아리옥은
달신의 종인 아리옥은
실력이 없고 거짓으로 미혹하며
출세한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사신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만이 나의 심판이심을 믿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하는 자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이 일로 다니엘은 바베론 모든 지혜자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왜냐면 다니엘로 말미암아 지혜자들의 목숨이 살아 남았고 그의 신통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왕의 꿈을 알고 그 꿈을 해몽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에게는 두려울것이 없습니다.
다니엘같은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1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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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다니엘이라고 한다면, 실력과 능력의 아이콘이자, 긍정적인 이미지가 가득 들어차 있는 느낌입니다. 항상 담담하게 신앙을 유지하면서 살았고, 오늘날까지 모범이 되어서 그의 전설적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니까요. 다른 말로 하면, "신앙계의 레전드?" 그런데, 한꺼풀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 역시도 별 볼일 없던 유대 포로였다는 사실이 와닿게 됩니다. 한마디로 가진게 없었다는 말이지요.

더욱이, 마침내 때가 차서, 세상에 나가 일을 해보려고 하니까, 시작부터 죽음의 위기가 들이닥칩니다. 다니엘은 여전히 담담합니다. 불평도 원망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기도할 수 있으므로, 기도할 뿐 입니다. 너무나 삶의 방향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감탄이 들 정도 입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유명한 말처럼, "행운이란 준비가 기회를 만날 때 생기는 것" 일까요? 이 말을 깔아놓고서 생각해 본다면, 다니엘의 행운은 정말 일찍 찾아온 셈입니다. 아니, 세상에 나가자 마자 큰 제국의 왕과 독대하게 되었으니까요. 결국 행운이냐 불운이냐의 문제는, 따지고 보면, 자신이 얼마나 준비되어 있느냐로 결정되는게 아닐까요.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라는 책에는, 사지마비가 되어도 불평과 원망하지 않는 사람의 실화가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지가 멀쩡하더라도 불평, 원망, 짜증, 비난부터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잔혹한 경쟁사회가, 사람들이 살만한 기회를 제한하고 있고, 한편으로 점점 삶의 질이 떨어져 가는 모습이니, 무기력이나 좌절감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럼에도 불평이나 원망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 출신인지"를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앞으로 놀라운 일들을 펼치려고 하는데, 너는 그만큼 준비되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너는 그만큼 기도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렵다고 불평하기를 그만두고, 사람이 웬수처럼 느껴진다고 원망하기를 멈추고, 오직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아서, 내가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음을 자각하고, 보다 나은 교인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니엘처럼 살기의 출발점 중에 하나는, 우리가 환경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환경 앞에서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관자"이므로, 결국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것임을 믿고, 계속 나아가는게 중요합니다. / 2013.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