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7월28일/사자굴 속의 다니엘(다니엘6: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8. 2. 15:2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28일 주일 예배

사자굴 속의 다니엘 (다니엘6:1-)

오늘은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온 본문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 주 전에는 다니엘의 친구들이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가 살아 나왔는데 오늘은 그때 풀무불을 피한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풀무불이니 사자굴이니 하는 곳에 그들이 들어 갔다 나온 이유는 똑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우리 기독교인이 너무 독선적이라는 겁니다.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받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우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네들이 신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우상으로 여기는 우리가 세상은 싫은 것입니다.

1.돈신을 섬기는 현대인
예전에는 그런 신이 구체적으로 신상의 형태로, 이교의 형태로 나타났다면 지금은 무신론의 형태로 나타나고 무엇보다 돈과 쾌락을 숭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이 생겼습니다. 오늘날 모든 신 위에 가장 높은 신은 돈신, 즉 맘모니즘입니다. 돈을 인생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바로 맘모니즘이지요.

하나님이 영이셔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사탄은 인간의 자아와 쾌락, 그리고 이를 즐기기위한 돈이란 보이지 않는 형태의 우상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이것들은 때로는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문화란 이름으로, 때로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제 기독교가 상대해야 할 우상은 무속이나 불상같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2.다니엘의 위기
세월은 흘러서 느부갓네살의 시대가 가고 바벨론도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샤라는 새롭고 거대한 제국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바뀌고 왕은 죽었지만 다니엘은 메대와 페르샤 전국을 다스리는 3명의 총리대신 중에 한명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포로의 아들이자 멸망한 바벨론의 총리였던 사람이  오히려 페르샤 본토인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자 메대와 페르샤의 총리들과 고관들은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했지만 아무 근거나 허물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가 충성되고 아무 허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가시같은 저 유대인포로를 치워버리고 싶은데 그는 공격할 아무런 빈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3.배신할 수 없다
학자들은 이 당시 다니엘의 나이를 약80세 정도로 추정합니다. 그 말은 무려60년 이상을 다니엘이 이방나라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순교자적 신앙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부귀와 영화, 또는 문화같은 것에는 쉽게 변질되어 집니다. 인간이 보기보다 그렇게 독하거나 모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고 사람은 올챙이적 생각을 잊어 버리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60년 이상이나 바벨론과 페르샤의 최고위직에 있으면서도 그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고수하고 왕을 신으로 숭배하려는 시도와 다신론적 문화가운데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며 우상을 거부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만은 한평생 그 몸이 부귀와 영화의 극에 있으면서도 결코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적은 돈을 벌 때는 십일조를 내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벌어 들이면 십일조를 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십일조를 내면 생활이 안될 정도로 적게 벌 때도 드리던 십일조를 너무 너무 돈이 많아서 십일조를 아무리 내어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까워서 내지 못합니다.
액수가 너무 큽니다. 그래서 아깝습니다. 최종적으로 그의 마음이 이미 부유해져서 여호와가 그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잘났다 잘났다’ 하니까 그의 성공과 부가 오로지 그 자신의 노력과 지혜 때문인 걸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원래 그렇게 잘난 사람이야’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아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가 없어졌고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가 없어졌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자기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이야기의 배경
본문에 ‘메대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고 해서 다니엘이 다스리는 곳이 메대가 아닙니다. 이미 메대는 페르샤와 합병을 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이 말하기를 메대의 왕 다리오가 사위 고레스의 양보로 왕위에 있게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이는 다리오가 고레스의 외삼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62세에 달한 다리오에게 고레스가 왕위를 양보하고 그는 여전히 남아 있는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는데 총사령관으로 참여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왕은 고레스라는 것이지요.

여하튼 이 곳은 메대와 페르샤 연합왕국입니다. 페르샤는 전국을 120도로 나누고 그 위에 세명의 총리대신을 두었습니다.
바로 그 세사람 총리대신 중의 한명이 바로 본문의 다니엘입니다. 그런데 다른 두명의 총리와 고관들이 다니엘을 시기합니다. 유다의 포로주제에, 멸망한 적국 바벨론의 총리였던 다니엘이 왕조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자기들과는 제대로 어울리지도 않습니다. 페르샤의 신을 섬기지도 않습니다. 연회장에 나온 고기와 포도주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시간만 되면 어딘가 사라져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는 것 없이 밉고 싫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다니엘을 탄핵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는데 다니엘의 일처리나 충성심이나 인격이 전혀 흠을 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런 형편인데 이들에게 더 기분 나쁜 일이 생깁니다. 바로 다니엘을 세명의 총리 중에 한사람이 아니라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제일 총리대신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 본문을 잘 보면 이들 총리의 업무 중에서 제일 큰 업무는 지방 방백들에게서 세금을 제대로 걷어서 왕실에 손해가 없도록 하고 지방태수들을 잘 다스려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120개로 나눈 지방을 세명이서 다스렸는데 다니엘이 다스리는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총리와 지방관이 짜고 착복도 하고 부정한 짓을 많이 저지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니엘이 전국을 다스리게 되면 그들에게는 한방울 국물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5.물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
법대로 그리고 청렴결백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게되면 부패한 관리들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일처리도 제대로 해야되고 뒷돈도 받지 못하고 공금을 횡령하지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의 부정으로 축재하던 자들에게 다니엘이 전국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이들에게는 좋은 시절이 다 지나가고 고생문이 열렸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어쩌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죄를 받고 재산을 몰수당하며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입장에서 다니엘이 최고 총리가 되어 전국을 다스리기 전에 다니엘을 쳐내야 합니다. 자기들의 죄가 밝혀지기 전에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다니엘의 유일한 약점에 주목합니다. 다니엘의 유일한 약점이 뭡니까? 그것은 다니엘이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만으로도 세상은 우리를 면밀히 주시하고 우리를 비난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비방할 거리를 찾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이 제대로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임해야 합니다.

6.하나님으로 인한 시험
여하튼 이들은 하나의 음모를 꾸밉니다.
다니엘이 절대로 피해갈 수는 없는 음모입니다.
바로 30일간의 국왕만 숭배하라는 칙령입니다. 즉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랍니다.

이전에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기로 한 것과 비슷합니다. 사자굴이고 풀무불이고 모두 들어가면 그대로 죽는 겁니다. 이들은 지금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는 다니엘의 약점을 이용해서 그를 총리에서 내몰 뿐만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릴려는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밉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유치한 음모가 잘 들어맞는다는 겁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에게 경배하고 예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걸려 들게 되어있는 그야말로 신기한 수가 된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것을 법률로 만들자고 합니다.
이 법률에 서명하고 나면 왕조차도 이 법률을 어길 수 없게 되도록 다니엘의 적들은 음모를 꾸밉니다.

이러한 음모는 보통 거짓말이 따릅니다. 왜냐면 참말로는 결코 음모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왕을 속이는 거대한 음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고 하니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법률을 세울 것을 청원한답니다. 여기 모든 총리와 지사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속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많은 이들이 이 법률을 만드는데 찬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니엘을 싫어했다면 그가 오랫동안 총리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므로 이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대적들은 왕 앞에서 모든 신하들이 다 요구하는 것처럼 꾸며서 왕에게 자기들의 말을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왕외의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구하면 다 사자굴에 던져 넣잡니다. 이 법은 왕의 종교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주고 제국의 답합을 유도한다는 대의명분까지 부여합니다. 그렇기에 이 법은 다니엘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가장 멋진 법령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차피 신을 하나 더 섬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신론적 신관을 가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이 법은 일단 왕이 서명하고 나면 왕이라 할지라도 결코 바꿀 수 없도록 하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왕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니엘을 죽여야 합니다. 원수들의 머리가 매우 비상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려는 사탄의 책략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계책으로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고 사탄의 왕국을 굳게 세우려고 눈이 벌겋게 되어서 돌아 다닙니다. 마치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7.위기속의 하나님
다니엘은 이런 조서가 반포된 것을 알고도 여전히 평소에 하던 대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식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만일 왕의 조서 때문에 평소에 하던 하나님께대한 기도를 쉰다면 이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이 스물이 되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이방 바벨론에서 건지셔서 80이 넘을 때까지 거의 한평생을 특별한 은총으로 지켜주셨는데 그가 비록 한달간이라도 하나님께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풍운아였습니다. 고국인 유다가 망하고 처음 자리잡은 바벨론이 또 망하고 이제 메대와 파사의 연합제국 총리대신의 자리에 있기까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고난과 환난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 모든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의 목숨을 살린답시고 하나님을 배신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남들보다 특별하게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위기의 순간에도 그 위치를 자각한 것입니다.

사실 한달 기도 안한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게다가 평소처럼 윗방에 올라가서 예루살렘 쪽의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할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도 충분합니다. 꼭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창문을 열고 기도해야 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게다가 다니엘은 지금 자기를 고소할 대적자들이 자기가 왕의 법령을 어기는가 아닌가를 살피려고 자기집의 평소 기도하던 장소를 눈여겨 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니엘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의리였던 것이지요.
그가 나를 배신하지 않고 이날 이때까지 먹이시고 입히시며 나에게 복주셨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조금 더 살려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듯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자굴이 비록 나를 위협해도 결코 나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당시 다니엘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70년의 포로기한의 의미를 깨닫고 민족의 해방과 귀환을 놓고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한시라도 기도를 쉴 수 없었던 것이지요. 민족의 해방이 그정도로 큰 일이기 때문에 사탄의 방해가 더 극성스럽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그것도 몰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예 공공연하게 대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나를 고발하려면 해라! 나는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 그가 나를 배신하지 않으셨는데 어찌 내가 그를 배신할까보냐?’ 다니엘은 일사 각오의 자세로 기도한 것입니다. 그만큼 그가 바라는 기도의 제목이 큰 것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자기는 이미 제국의 최고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지만 동포들을 생각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창문들을 활짝 열어 놓아 사람들이 자기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도록 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평소에 하루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 기도했는데 아침과 정오와 저녁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출근 전과 출근 후는 몰라도 정오에 기도하기 위해서는 왕궁에서 집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생각하겠지요? ‘아, 총리대신이 기도하러 집으로 가는구나! 그렇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임에도 다니엘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실 하루 세 번 기도하도록 정해진 건 아닙니다. 자주 기도하는 히브리인들은 아침, 저녁 하루 두 번 기도했답니다.  다니엘만 하루 세 번 기도한 것이지요.
특별 금령기간에 왕궁을 떠나서 의심받을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때만 두 번 기도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습니다.

또 그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유대인들은 보통은 서서 하늘에 두손을 올리고 기도합니다. 솔직히 서서 손을 하늘로 올리고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칩시다. 이걸 고발당해도 변명거리가 충분합니다.
하늘을 쳐다 본거다. 생각할게 있었다. 그래도 나는 법을지키려고 경배하거나 숭배하는 행동 즉 무릎을 꿇고 절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의 행동에는 전혀 종교적인 의미가 없다 등등 변명거리가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가 무플을 꿇고 하루 세 번 예루살렘 방향의 창문을 열고 기도한다면 빼도박도 못하고 원수의 올무에 잡힌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도 하나님이 섭섭해 하실까봐 그냥 평소대로 기도한 것입니다.

다른 때라면 자의적으로 다니엘은 자기의 기도방법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장소도 바꿀 수 있고 시간이나 횟수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외에 누구에게도 간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발표되자 마자 그렇게 자기의 기도방법과 장소와 시간을 변화시킨다면 마치 사자굴이 두려워서 변화시킨 것처럼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을 법에 고소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자기의 목숨을 위해서 구차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나님도 별 수 없다고 하나님을 믿네 어쩌네 해도 결국 사자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은 다니엘의 행동 때문에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기존의 기도방식을 고수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니엘은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제물이 되고자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내 한목숨 버려 민족을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내 그리하리라’

우리는 어때요?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위험도 하나님의 이름이 혹시라도 내 행동 때문에 웃음거리가 될까봐서 피하지 않고 위험을 무릎쓸 수 있습니까?
끝으로 다니엘은 그 위기의 순간에도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그래도 다니엘은 오늘날의 자기가 있기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생각하며 위기의 순간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위기의 순간에 눈앞의 위험에만 정신이 쏠려서 그동안 하나님이나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에 대하여 생각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불평만 하던지 아니면 걱정만하고 끊임없이 요구만 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아마 많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 모습을 한두사람이 보는게 아닙니다. “그 무리들이 모여서” 본답니다. 소나기는 일단 좀 피하고 봐야 할 것 같은데....아닙니까?

8.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대적들은 다니엘의 위법을 고발했고 다니엘은 끝까지 자기의 신념을 지키기위해 사자굴에 들어 갑니다. 왜냐면 다니엘의 대적들은 그가 왕을 멸시하고 왕의 권력에 공공연히 도전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어쩌다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아주 작정하고 법을 어기고 보란 듯이 기도한 것은 왕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실을 교모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주로 정치하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잘합니다. 아무리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총애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사자의 입을 봉해서 다니엘은 그 사자굴에서 살아 나오고 오히려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이 무고죄와 왕을 능멸한 죄로 사자굴에 들어가서 다 죽습니다.

왕은 사실 다니엘을 참소하는 자들에게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왕의 금령이 왕 자신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다니엘을 쳐내기위한 음모의 일환이므로 따지고 보면 당파 싸움에 왕을 이용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5절에 “왕이여...아시거니와”에서 ‘알다’란 말이 원문으로는 ‘분명히 아십시오’란 명령형으로 쓰여졌습니다. 아람어에는 존대어가 없으므로 즉 ‘똑똑히 알라’고 윽박지르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모두 함께 왕을 몰아 세우고 있습니다. 아마 다리오 왕은 이 신하들이 죽도록 미웠겠지요.

당시 다리오는 일종의 얼굴마담격인 왕입니다. 그는 메데(미디아)의 왕이었고 파사의 왕인 고레스의 장인으로 젊은 실력자인 고레스가 어차피 늙은 장인이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는 마음과 자기는 끝나지 않은 정복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필요에서 다리오를 왕자리에 앉힌 것입니다.

처음 딸을 고레스와 결혼시킬 당시만 해도 파사는 메대에 상대가 안되는 약소국이었지만 걸출한 인물인 고래스는 당대에 이미 메대를 뛰어넘는 실력을 갖추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장인을 대우해 준 것에 불과합니다. 자기가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언제든지 다리오를 왕자리에서 몰아 낼 수 있거든요. 역사적으로도 다리오의 후대로 고레스가 왕좌에 앉습니다. 그러니 파사의 신하들이 왕을 우습게 보고 까부는 것입니다. 다리오는 이러한 상황이 너무 분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때요? 그래서 겁도 없이 왕을 잔머리로 속여서 능멸하려는 것이지요.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그렇게 신뢰한 것도 다니엘이 메대나 파사 출신처럼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한 자도 아니고 배경도 없는 약소민족인 유다의 포로출신으로 자기와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득권세력에 아부해서 자기 당파의 세력권에 유리하게 수작을 부리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하고 왕의 총애만이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오왕의 입장에서는 고립무원의 왕궁에서 다니엘은 자기의 든든한 지지세력이랄 수도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은 지금 상황이 분하고 억울합니다. 자기의 총신하나도 지켜내지 못합니다.
다만 적당한 핑계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는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 있는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합니다.
엄청나게 다니엘을 아낀 것이지요.

다니엘에게 다리오가 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그래요, 이제는 왕이라도 그를 사사로이 구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를 구할 수 있습니다.
왕은 새벽이 되자 급히 옷을 챙겨입고 사자굴로 갑니다. 그는 기대와 우려를 담아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네 하나님이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사자굴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돌로 막아 놓고 혹시라도 누가 돌을 굴려 끄집어 낼까 싶어서 틈새를 봉인하고는 그래도 만에 하나 평소에 다니엘이 섬기던 그 하나님, 이전에 다니엘의 세친구들을 풀무불속에서 건져낸 그 하나님이 이번에도 다니엘을 살리셨을까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왕들은 좀 웃깁니다. 물론 만에 하나 기대하는 것이지 그는 틀림없이 다니엘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지금 비통하고 두려운 심정으로 소리 친 겁니다.

자기의 어리석음과 힘없음, 그리고 간교한 신하들에 대한 억울함과 한탄을 담아 미움과 증오를 담아 혹시라도 인간의 손을 벗어난 신의 손길을 기대하며 소리칩니다.
이미 망해버린 유다의 신은 당대의 관념으로는 이미 죽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자기의 국가를 보호하지 못하고 멸망을 당하게 했다면 그 신은 이미 죽었거나 모든 힘을 잃고 긴 잠에 빠졌거나 유폐되거나 한 겁니다. 그런데도 다리오는 그 하나님을 “살아계신” 이라고 표현합니다.

놀랍게도 다니엘은 살아서 왕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간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사자의 입을 봉했기에 살아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는 자기의 무죄를 명백하게 밝히는 것이랍니다.
이제 왕은 법적으로도 완벽하게 무죄가 된 다니엘을 명분삼아 다니엘의 참소자들을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사자굴에 던져 넣어 버립니다.
다니엘은 다리오왕 때 뿐만 아니라 다음의 왕인 고레스시대까지 형통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일시적인 위기를 피하려고 비겁한 수를 쓰지 않고 담대한 태도로 위기를 정면 돌파한 다니엘을 하나님 역시 정면으로 도와 주신 것입니다. 80여세의 다니엘이 다리오 왕이 물러나고 고레스가 새로운 왕이 되어도 여전히 총리대신으로 형통했다는 것은 그에게 부귀영화 뿐만 아니라 장수의 복도 임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과의 타협과 적당한 처신이란건 솔직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람은 자기 합리화에 매우 능한 존재들입니다.
나를 항상 냉정하게 살피보고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고민해 보면 답은 나옵니다. 내가 이 행동을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닐지.

당장 나의 필요와 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 행동을 판단하면 보다 정확한 나의 모습이 나옵니다.
다니엘, 십대의 어린나이에 바벨론의 전쟁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으로 끌려왔다가 그 바벨론에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가 바벨론이 망하고 메대와 파사의 이중왕국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도 총리대신으로 봉직한 포로기 유대인들의 선망의 대상입니다.

오늘날 그는 나에게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고 자기의 종, 자기의 자녀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구원하시며 자기의 법을 지키기위해 위험을 무릎쓴 이에게 복주시는 이심을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나도 이러한 산증인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자기의 법을 지키는 이에게 상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몸으로 나타내 보이는 산증인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특별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자가 남들과 같은 정도의 헌신만을 한다면 남들과 같은 정도의 사람으로 대우받을 뿐입니다.
하나님, 영원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자 하나님으로 인한 환난까지도 안겨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배신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는 시험은 우리를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려는 중간의 체크지 우리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네가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여전히 사랑하느냐?
바로 이걸 보려 하신 겁니다.  다니엘은 끝까지 하나님을 고수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끝까지 책임지셨습니다. 어때요? 우리들도 그럴 수 있겠지요?
우리 모두 그러한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28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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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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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늘은 위키백과에 실려 있는 다니엘의 그림 한 컷을 싣습니다. 영국의 Briton Rivière라는 사람이 그린 것인데, 늙은 다니엘과 입을 다문 사자들의 대비가 잘 느껴집니다. 젊은 시절부터, 노인이 될 때까지 한평생 기도와 감사를 가까이에 했던 사람. 세상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혹여 어긋날까 한결같이 바른 태도를 유지하면서 살아갔던 사람.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는, 다니엘 이라는 이름이 명재판관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공정한 정신을 추구했음을 우회적으로 알 수 있지요.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억울하고 속상하고 어찌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좋은 곳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그 때에도 역사하셨고,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면, 여전히 지금도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걸어가라고 말씀하실 테고요. 한 장의 그림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어느 쪽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인지, 계속 생각해 보게 됩니다. / 2013.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