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4일 주일 예배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5:4-)
오늘은 조금 색다르게 아모스를 설교하려고 합니다. 아모스하면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라는 말은 잘 아실겁니다. 바로 아모스 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남북조로 나뉘었을 때 남쪽 유다왕국의 드고아 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남쪽에서 태어났지만 특이하게 북쪽 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과 주위 열국들에게 하나님이 각각 그들의 죄 7가지를 들어서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최전성기인 여로보암2세가 다스리던 때입니다. 영토도 가장 넓고 돈도 가장 많아서 이런 때에 멸망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다 웃습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북이스라엘은 기원전746년에 여로보암2세가 죽고 기원전721년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실로 25년만에 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 보면 여로보암2세때 이들이 영토를 넓히고 부를 쌓은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 주위의 정치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왜냐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이 앗사리아에게 패해서 힘이 약해졌고 아직 앗시리아의 힘이 패권을 차지할 만큼 강대해지지 않은 일종의 중동지역 힘의 과도기였기 때문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힘이 강해서는 아니었지만 어리석은 이스라엘 인들은 그러한 사실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들이 누린 일시적인 힘과 부는 도덕과 문화의 성숙, 백성들의 행복으로 이어진게 아니라 나라의 도덕적이며 영적인 부패로 이어졌고 여로보암2세가 죽고 난 다음 그의 아들은 불과 육개월만에 쿠테타로 목숨을 잃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고 죽고 죽이는 내란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앗수르의 침입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내전으로 힘이 다 빠진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저항이랄 것도 없이 그냥 망하는 겁니다.
바로 그 여로보암 2세때 아모스 선지자는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넘어가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면 열에 아홉이 죽는 처참한 패전가운데서도 살아난답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로서 하나님을 찾아야 산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 뒷말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벧엘하면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이며 야곱이 밤에 돌베개를 하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그는 그곳에 단을 세우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인 성지에 이스라엘의 건국왕인 여로보암1세는 금송아지를 세우고는 이것을 너희들을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선전하였습니다. 아론역시 모세당시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여호와께 제사지내려 예루살렘으로 왕래하는 백성들을 보며 혹시라도 백성들의 마음이 남쪽 유다왕가로 다시 쏠릴까 싶어서 백성들을 미혹하는 신상을 벧엘에 세운 것입니다. 이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란 말입니다만 호세아4:15에 벧엘이란 지명이 벧아웬이라고 바뀌어 불리는 내용이 나옵니다. 벧아웬은 뜻이 ‘허무의 집’이랍니다.
이어서 성경은 벧엘로 가서는 안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성경의 비참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 오역입니다. 원뜻은 허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벧엘이 아니라 벧아웬이 된다는 말입니다.
보다 상세히 설명한 아모스3:14에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꺽어 땅에 떨어뜨리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신을 하나님으로 오해하여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에 벧엘이 제단뿔을 꺾어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허무의 집이고 그래서 허무하게 될 벧엘을 찾지 말고 나를 찾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날로 보면 잘못된 신앙을 가진 교회로 가지 말고 여기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벧엘은 하나님의 집으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예배처이지만 이제 벧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아니라 여호와로 명명된 금송아지 우상이 서 있습니다. 저는 금송아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혹시 돈신, 물신 숭배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벧엘을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돈과 쾌락을 좇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벧엘 하나님의 집이 벧아웬 허무의 집으로 바뀐 것은 신앙의 대상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변질되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길갈로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길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시작할 때 진을 설치한 곳입니다. 애굽의 종되었던 자들이 자유민으로 정복전쟁을 시작한 곳입니다. 사무엘도 여기에 순회소를 설치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중요한 치소로 삼았던 곳이며 그는 여기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더 이상 하나님의 땅이자 새로운 희망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가 노예의 땅이 되고 포로의 땅이 될 것이기에 가지 말라고 합니다.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여기에 가면 반드시 포로가 되어서 다시 노예가 되니까 가지 마라는 말입니다.
해방의 장소였던 이곳이 이제는 포로가 되는 장소가 되기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다음은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나아간다는 말은 건너간다는 말입니다. 이 브엘세바는 앞의 벧엘이나 길갈과 달리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니라 남쪽 유다의 영토입니다. 원 이스라엘의 맨 남쪽 끝에 브엘세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하나님을 찾는다고 국경을 넘어 브엘세바로 가지도 말라는 겁니다. 본문에 브엘세바로 가서는 안되는 이유는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여기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니라 유다의 영토고 유다는 이스라엘과 같이 앗수르에 멸망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브엘세바로 가지 말라고 하셨느냐면 종교적 허식을 따라 브엘세바로 간다고 해도 결코 진실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면 소용이 없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정주하여 에셀나무를 심고 제단을 쌓은 장소이며 이삭 역시 제단을 쌓고 우물을 팍 기거한 곳이며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면서 하나님을 만나 언젠가는 이곳으로 거대한 민족을 이루어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정치적인 장소보다 이런 전통적인 장소를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아한 것입니다. 더구나 유다가 아닌 이스라엘, 즉 야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벧엘도 길갈도 브엘세바도 모두 유다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순례자들이 국경을 넘어 최남단인 이곳 브엘세바까지 순례를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를 찾아서 이 장소 저 장소를 찾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런저런 허식과 행위는 다 거짓이라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결코 그런 이들이 살아 남을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6절에서 주제가 반복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여호와를 찾지 않으면요? 여호와 하나님이 불이 되어서 요셉의 집을 살라 버리신답니다. 이는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불이 비같이 내린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고 죄악과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즉 요셉의 집을 멸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진노를 그 누가 있어 피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멸하시기로 작정하시면 피할 자가 없습니다. 그냥 납작 엎드려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물같이 공법을 하수같이 세우는 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하려고 하시면서 그들을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하고 계십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
공법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정의를 말합니다. 즉 정의로운 마음이 법의 재판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공법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인진은 쑥을 의미합니다. 먹는 쑥있잖아요? 그러나 인진 쑥은 아주 독하기도 합니다.
본래 재판은 억울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선성을 북돋우고 악함을 억누르는 것이 바로 공법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공법을 쓴 쑥으로 만들어서 오히려 재판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억울하고 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기에 정의가 기초가 되지 않거든요. 각종 빽과 뇌물이 개입되어서 오히려 힘없는 자를 더 힘들게 하고 억울한 자의 억울함이 아니라 부자와 힘있는 자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이지요.
땅에 던진다는 말은 시체를 땅에 던진다는 말입니다. 파묻기위해서? 그러므로 이미 정의는 죽었다는 말이지요. 재판은 사람의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부자들과 힘있는 자들을 보호하며 자기의 출세와 부를 쌓기위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정의를 죽었다고 땅에 던지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어때요? 우리나라는 이스라엘하고 다릅니까? 공법과 정의가 살아 있습니까? 재판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에게 다시금 웃음을 찾아주는 역할을 합니까?
제가 자꾸 성경본문을 풀이하다 보니까 설교가 너무 어려워지네요. 해서 아래부분은 생략합니다.
끝으로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이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시는지 한번 볼까요? 10절에 보니까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성문은 주로 재판정이나 시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여론을 형성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는 재판장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라고 이야기하거나 폭리와 거짓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나 힘없고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책망하는 겁니다. 혹은 잘못을 저지른 부자나 권력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정직하게 책망하는 재판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의 선지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자를 한두사람도 아니고 무리가 미워한답니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의 눈으로 볼 때 이런 불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는 미련한 짓입니다. 멸망과 징계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결코 잘했다 칭찬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이런 이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회가 선악에 대한 자정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으로 똘똘 뭉친 사회라는 것입니다. 한두사람이 정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의 모든 이들이 정의와 공법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롱하고 무시하여 하나님의 법이 땅에 떨어 졌다는 말입니다. 가난한자와 억울한 자의 하소연이 땅에서부터 하늘의 하나님께 호소하는 상황입니다. 하늘의 불이 임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입니다.
소돔성의 재판장인 롯이 천사를 윤간하려고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자 밤에도 재판장 노릇을 한다고 죽이려고 덤벼드는 동네사람들을 연상시킵니다.
사회가 병들게 되면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자들을 자기들의 허물을 부각시키는 원수처럼 여기고 이들을 자기들처럼 범죄인화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아예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사회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증스럽게 하나님을 찾는 답시고 벧엘이니 길갈이니 심지어 남유다의 브엘세바니를 찾는다는게 가증하다고 하는 겁니다.
재판장이 타락했으므로 이제 부자와 권력자들의 잘못된 행위를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죽은 것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정의를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악당들을 죄를 범합니다.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가난한 자를 멸시하고 잘못된 권력이 야합해서 이들에게 부당한 세를 거둡니다. 밀뿐만 아니라 각종 곡물과 과일에도 세를 거둡니다. 부당하게 거두는 것도 모자라 폭리를 취하고 중간에서 노략질을 하며 가로채고 뇌물을 주고 받습니다. 악당들은 가난한 이를 핍박함으로 점점 더 부자가 됩니다.
따지고보면 외국에까지 가서 순례를 하는 것은 어느정도 돈이 드는 행위입니다. 하루벌어 하루먹는 이들에게 브엘세바니 벧엘이니 길갈로의 선교여행은 사치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여호와의 제단에 가서도 바칠 것이 없습니다 비둘기 살 돈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로의 선교여행은, 순례는 부자들이 많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는”이들이 그 부당한 제물을 가지고 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찾아서 벧엘로 길갈로 브엘세바로간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사르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악당들에게 내릴 구체적인 형벌을 여기 적어 놓았습니다. “다듬은 돌로 집은 지었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니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당시 사람들은 흙벽돌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왕궁이나 성전은 돌로 지었지요. 가난한 자를 착취한 돈으로 호화주택을 짓고 살며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집에 살지도 못하고 그 포도주를 마시지도 못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고요?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함의 도를 넘어선 나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고 바닷물을 들어 해일을 일으킴으로 가뭄으로 그들을 치실것이며 그래도 하나님의 공의를 무시하고 불의를 저지르면 결국은 칼로 진멸하고 왕과 귀인들을 진멸하며 권세있는 자들을 포로로 끌고 갈 것이고 우물을 메우며 포도원을 훼파하고 왕궁과 성전과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이스라엘 땅에는 대신에 이민족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사마리아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끌려갈 때 어떻게 끌려 갔는지 아십니까?
갈고리로 코를 꿰고 낚시바늘로 입술을 꿰어서 끌고 갔다는 겁니다. 그러다 쓰러지면 당연히 죽겠지요? 죽지 않아도 코와 입술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피와 눈물이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기 때문에 공의의 하나님께서 결코 이들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실제로는 하나님의 공법을 무시하고 정의를 저버리는 사람들과 이러한 이들이 사회의 부유층과 권력층을 형성하는 나라를 하나님은 깡그리 살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불의한 이들이 사회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는 나라는 적당히 몇몇 사람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예 멸망시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판을 엎어버리신다는 것이지요. 새판을 짜시려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찾는 다고 여기저기를 다니지 말고 나의 법을 행하고 나의 규례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모스의 표현대로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것이야 말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크고 중요한 것입니다.
벧엘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길갈의 단에도 하나님 대신에 종교적 혼합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심지어 남왕국 브엘세바 역시 순수한 여호와 신앙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그러한 종교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실제로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고 행하는가에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사랑한다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야 말로 종교적 위선이요 가식입니다.
사회의 정치꾼들이 타락하는 일은 흔합니다. 그리고 장사꾼들이 이를 탐하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우치고 견제해야할 언론과 학자들과 종교인들이 이들의 악행에 눈을 감거나 이들의 악행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심지어 이들의 악행에 대해서 죄책감을 사해주는 일만을 한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백성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착취한 돈으로 나하나 호화롭게 사는 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바로 그것이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살 것입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찾는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4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거의 작정하고 설교가 세게 나가서 많이 놀랐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영화제목에 비유하자면, "부패열차"에 올라타서, 언론은 진실을 "가려서"만 알려주려고 하고, 학자들은 양심적으로 이야기 하기 보다는, 보수적인 안위를 추구할 때가 많겠지요. 또한 그것을 처세의 지혜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가 몰락해가더라도, 일단 내 처지는 살만하니까, 굳이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가 용기 있게 나서기 시작하면, 이들을 "싸잡아" 비난해 버리는 문화가 만연하다는 게 마음 아픕니다. 예컨대 누군가가 이런 최저임금은 말도 안 된다, 햄버거 한 셋트 사먹지도 못하는 나라가 어디있느냐 라고 말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쉽습니다. 더욱이 이 나라는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갑니다. 길거리에서 저렴한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를 하나 사먹고, 그것을 집까지 들고 와서 버렸다가는 "미련한 바보"로 불릴테지요.
굳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꼽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호주를 여행한 책에서는 이 나라에서는 국민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게 눈에 보인다고 표현했습니다. 홍 목사님이 가끔 사례로 인용하는 북유럽 청년 "얀"씨도, 국가에서 돈을 펑펑 빌려줘서 미국 유학을 마음 편히 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람들이 모여서, 괜찮은 국가를 이룰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국가기관이 잘못을 저질러도, "좋은게 좋은거지" 라며 넘어가는데 능숙합니다. "잘못한게 있잖아" 라고 말했다가는, 너희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러느냐 라고, 같이 물귀신이 되어갑니다. 종교인들은 이제 위선의 옷을 입은 사람과 동의어가 되어갑니다. 강력 범죄는 해마다 늘어가고, 먹을 것을 훔쳤다는 이야기가 앞으로도 계속 들릴 것입니다. 정의가 실종되어 버린걸까요. 결코 못 사는 나라가 아니지만, 마치 전쟁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 벅차게 슬플 때가 있습니다. 정치, 언론, 학계, 종교, 몇 가지가 탐욕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자본과 권력"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느라 정신줄을 놓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성기에서 곧바로 몰락한 나라들은 "의외로" 상당히 많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라서 정말 잘나가다가 "한방에" 끝장나는 경우도 적잖게 볼 수 있습니다. 대체 왜 그런걸까요... 현실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덕적으로 추락해 나가다가는, 불법이 당연시 여겨지다가는, 허망하게 순식간에 끝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죄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리듯이, 우리의 행동에서 잘못된 것이 쌓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정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합리화만 하고 있다면, 주께서도 더 이상 함께하지 않을테지요.
법조계에 있었던 김영란 전 대법관은 평범한 사람들도 잠깐만 부패에 닿아있다가, 금방 거기에 익숙해질 수 있음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부패와 잘못, 불법은 달콤하고, 친해지기 쉽습니다. 서너번만 쓰레기를 휙휙 버리는 사람에게, 그런 행동은 안 된다고 말했다가는 되려 "욕먹을"뿐입니다. 이미 자신의 행동이 정당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타인의 삶을 기억하며, 사회에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교인이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부디 우리에게 쓴소리를 듣는 귀가 있기를, 적나라한 현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기를... / 2013.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