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8월11일/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요엘2:28-3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8. 12. 14:3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11일 주일 예배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요엘2:28-32)

요즘 살기가 참 어렵습니다. 날씨때문은 아니고요....하나님의 공의가 땅에 떨어져서 짓밟히고 있기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착한 것이 약점이 되는 세상입니다. 들키지 않고 법을 어기는 사람을 세상은 유능하다하고 그렇게 이룬 부와 지위를 사람들은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권력있고 돈있는 사람들은 법을 아예 지키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하고 약한자에게 법은 이어령비어령입니다. 법은 통치의 수단일 뿐 국민들을 보호하고 선성을 권장하고 악을 억누르는 역할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권력자들은 더 이상 신의 대리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성도들은 참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정직하고 착하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 옳은 것을 옳다 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법은 더 이상 세상의 기본원리가 아닙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칙은 ‘나의 이익’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의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필요합니다.

왜곡된 세상의 법칙을 뛰어 넘는 것은 성령의 역사 외에는 없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제대로 믿는 사람을 보호하기위해 하나님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요엘서는 한글성경에는 총3장으로 되어있지만 원문으로는 총4장입니다. 즉 본문인 요엘2:28-32까지가 원문 성경으로는 3:1-5입니다.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구절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그 후’를 ‘말세에’라고 바꾸어서 인용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요엘 선지자가 이미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그 후’라는 시기를  ‘말세’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삶이 지금 ‘말세지말’ 말세 중에서도 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논리로 따진다면 성령의 충만이 가장 성해야 할 때가 바로 이때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성령의 역사는 많은 교역자와 교인들에 의해서 부인되고 폄하되며 왜곡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성령을 중시하는 신앙태도를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신앙형태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진실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어떤이는 성령님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그런 기운이나 영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푸닥거리나 부적으로 귀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말하는 박수나 무당처럼. 그래서 ‘성령받아라’ 하면서 손을 휘두르는 것이지요. 마치 장풍을 쏟아 내듯이.

성령님은 우리가 숭배하는 성부 성자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감정에 따라, 우리가 마음대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조종하고 짓고 까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보좌로 돌아 가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성령을 보내어 주겠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비시는 보혜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죄를 지어도 사함을 얻을 수 있지만 성령께 죄를 지으면 결코 사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결코 성령 하나님께 죄를 짓지 못하도록 경계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늘로 돌아 가신 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자꾸 쇠퇴하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교회와 목회자의 타락과 부패가 첫원인이 아니라 바로 성령의 시대에 성령께서 아니 계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성령께서는 더러운 마음에 계실 수 없기 때문에 부패와 범죄가 성령이 안계신 원인이기는 하지만 성령을 배척하려는 인간의 죄성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령의 시대란 말을 저는 성령의 역사를 맛보는 시대라고 생각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그래서 성령을 갈구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시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만민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의 ‘만민’은 ‘하나님의 언약백성 모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말세에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세가지네요. 장래 일을 말하고 꿈을 꾸고 이상을 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세가지는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 세가지가 모두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미래를 알게 된다는 뜻이거든요.

처음 장래일을 말한다는 뜻은 실제 원문상으로는 예언한다는 말도 있지만 선지자 노릇한다는 말입니다. 선지자가 하는 일이 바로 예언하는 것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렇게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선을 행하고 나에게로 돌아 오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멸망시키겠다. 뭐 이런 식으로 주로 미래에 대한 일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하튼 선지자는 미래의 일을 예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포하는 것이지요.

꿈은 잠을 잘 때 하나님의 영과 만나서 계시를 보는 것입니다. 이상은 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 주셔서 계시를 환상으로 보는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은 말세에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더 명확하게 알도록 하심입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저는 종종 예지몽을 잘꿉니다. 젊을 때 부터 그런 꿈들을 잘 꾸었습니다. 아직 ‘늙은이’가 아닌데 말이지요.

이 말은 이들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특별계시를 받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성령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영교한다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로 합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장애가 될 수 없고 감추일 수도 없습니다.

어릴 때 저는 흔히 화장실에 앉아서 공상을 했는데요 무슨 공상을 제일 많이 했는고 하니 도깨비 방망이 공상을 많이 했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나오쟎아요. 그런데요 말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성령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것 보다 더 굉장한 일이 될 것입니다.
도깨비 방망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성령의 역사는 세상도 바꾸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일을 성령받은 우리 성도가 말세에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슴벅차지 않나요?

말세의 징조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9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혹시라도 여기서 말하는 남종과 여종을 목사나 전도사, 권사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하는 걸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종과 여종은 철저하게 노비를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의 남의 종, 노예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그때에는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말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는 당시의 신분제 세계관을 깨는 천지개벽의 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의 신분이나 재산정도, 학력정도로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주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개천에도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을 받지 못했을 경우는 진실로 하나님의 택한 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되나요?
음,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동정녀 탄생과 신이 인간이 됨과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하신 주를 믿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의 마음이 성령에 감동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 말세에 주의 자녀에게 임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때’를 우리는 말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이제 말세가 지나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최후심판을 앞두고 보다 많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시기 때문에 오늘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시고 말세에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며 말세에 또 믿지 않는 이들도 알 수 있는 징조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베푸시는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랍니다. 원래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그분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연이 기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피와 불과 연기기둥’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연상시킵니다. 사람이 죽고 불이나서 도시가 파괴되고 그리고 연기가 솟아 오르고.........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말세에 나타날 징조로 보기는 좀 애매모호합니다. 왜냐면 이러한 파괴와 살육은 고래로부터 있어왔고 이러한 살육이 없었던 때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피가 단순히 죽음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피를 믿는 이마다 다 구원을 얻는 그런 이적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은 하나님의 심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 떨기나무 가운데 붙은 불, 십계명을 주시기위해 시내산에 임하셨을 때 불, 이렇게 하나님은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연기 기둥도 마찬가지입니다.

불탄 성읍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연기가 옹기점 같이 솟아 오른 것 같이 이것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본문에 나타난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은 출애굽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강력한 징계의 이적을 생각나게 합니다. 요엘은 본문에서 그때의 징벌이나 이적보다 더 큰 징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말세의 징조로 나타난 ‘피와 불과 연기기둥’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세에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과도 통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곳에 임하시는 것은 말세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징조라는 것이지요.

본문은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로 정의합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더 이상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법을 따르며 사탄과 짝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자체를 박탈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 중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늘이 있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나?”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불쌍한 일들, 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분노케 하는 인성을 저버린 행위들을 볼 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그들의 마음속에도 세상의 선과 악, 그리고 생과 사를 주관하는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마음이 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긍한 처지를 그냥 두고 보지 마시고 임재하셔서 응답하실 것을 목놓아 고대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세상을 보면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점점 가까워 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물론 그 날이 공공연하게 지정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그날은 도적같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날을 준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루 하루 하나님의 눈앞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 주님이 오셔도 떳떳하게 그를 맞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을 알 수 있는 징조를 주셨는데 앞 절의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은 너무 애매모호했고 추상적이었다면 이번에 주신 징조는 아주 문자적으로 명확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기상이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만드신 두 광명이 힘을 잃을 것을 말합니다.

신앗수르 제국시대에 일식이나 월식같은 식(願) 현상은 ‘제 1의 계시자’로 여겨져,가장 강력하고 치명적인 정조를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달은 월식이 일어나면 붉은빛을 제외한 모든 빛이 차단됨으로 어두워지기 보다는 붉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기상이변은 일식과 월식을 타나내는 것입니다.

지구 최후의 날에 일어날 이러한 예언은 요엘서에만 나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태24:29에 이런 현상이 자신의 재림 전에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사야도 이러한 예언을 한바 있습니다.“그 때에 하늘의 별들이 빛을 내지 않고 해가 떠도 하늘이 어둡고 달도 빛을 상실하고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릴 것이라”

뿐만 아니라 요한도 계시록에 이와 같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하늘의 해가 총담같이 어두워지고 달이 피와 같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 역시도 베드로후서3:10에서 이와 같은 예언을 한바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은 하늘의 해와 달이라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기능을 상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악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거든요.
주님의 택한 백성들은 들림 받아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지만 들림 받지 못한 이들은 세상과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입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일어나고 하늘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핏빛으로 변할 바로 그때 , 아직 늦지 않았으므로 그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요, 세상이 점점 어려워 가지만 아직 끝은 아닙니다. 아직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말세를 당하여 성령의 기적을 나타내심으로 더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순히 입술로만 주를 찾는 자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래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도 않고 주여 주여만 부른다면 이는 거짓고백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거짓되고 가증한 입술에는 결코 응답지 아니하시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바로 그 날에 지옥불에 던져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바로 대상의 능력, 성품, 존재, 행사 등 그 가진 전 인격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부른 다는 것은 단순히 그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본받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 살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32절 하반절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32절 첫머리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와 대응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속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구절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말세의 징조요? 그리고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
게다가 하나님을 부르는 자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정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세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말세에 세상이 요동하고 난리가 나고 살기가 어려워지겠지만 또 그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우리 아버지께서 자기의 자녀들에게 꿈으로 예언으로 이상으로 계시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물붓듯이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의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며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우리는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우리의 죄를 단죄하고 처벌하는 날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고 상주시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과 삶이 열리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큰 날을 두려워 해야 할 자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와 악한 권세자들과 불의한 부자들입니다. 악을 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며 망령되이 일컬으며 가난하고 힘든 자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확실히 여호와의 날은 두려운 날이 되겠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성도들에게 이 날은 위로와 상급의 날이요 회복의 날이며 행복의 시작날이 될 것입니다.

여하튼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가 말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말세로 규정했습니다. 말세는 참으로 오래 지속되지요. 무려 이천년도 더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시대를 말세지말, 말세 중에서도 마지막이라고 말합니다.

이때는 성령받지 않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믿는 백성들을 위해서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의 법칙대로 하며 세상의 자식들이 잘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법칙대로 세상과 경쟁해서는 결코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만이 그 불리하고 부당한 경쟁구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역사와 지혜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말세지말을 당한 이때 세상이 요동하고 일월성신이 빛을 잃는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꿈을 꾸기를 원합니다. 이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장래일을 말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한끼 식사를 위해서 뙤약볕에서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일만하다가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죽어 나가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불타는 듯 해도 그때 물가에 심겨진 나무들은 더 푸르고 그 그늘아래는 더 시원합니다. 우리 성령받은 이들은 세상의 무더위를 시원하게 해주는 푸른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말세에 성령받아서 그런 푸른 그늘한번 안되시렵니까?

우리 아버지께서 주신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불합리한 경쟁구도, 비빌 언덕도 없는 고립무원의 불리한 상황도 유리하게 바꾸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를 충만히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8월 1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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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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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마르코 폴로의 이 말을 꽤 즐겨 씁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말은 일종의 인간 사회 비판적인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가만히 놔두고 있으면, 사회가 점점 이기적 욕망덩어리로 변해갈 수 있음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거액의 돈을 쥐어주면서, 대중의 마인드를 조작하려는 행위는 21세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걸 막으려면, 자신만의 가치관이 분명해야 하는데, 결국 이것이 실종되어 있으므로, 자본이 시키는대로 굴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더욱 적나라하게 쓴다면, "수백만원씩 후원하고 밀어줄테니, 좀 유리하게 말해줘" 입니다. 어떤 기업은 미국에서까지 이와 같은 마케팅을 펼치다가, 호되게 창피를 당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수법들이 "일반화" 되어 있는게 아닌가 매우 걱정되었습니다. 돈 앞에 우리는 모두 무릎을 꿇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간다면, 참 슬픈 일입니다. 나는 이익이지만, 공공의 생활은 힘들어 집니다.

마찬가지로 에어컨 실외기를 최소 지상 2층 높이에 설치해야 하고, 부득이하게 낮은 곳에 설치할 때는 앞을 반드시 가려줘야 하는데, 그런 법을 안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숨쉬는 위치에서 - 뜨거운 바람이 쉴새 없이 나오는 도심 한복판의 가득한 실외기, 도시가 점점 더워질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구 온난화와 함께 우리는 함께 열지옥을 만들어 갑니다.

오늘자 뉴스를 보니, 드디어 댓글에 "제2, 제3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등장했습니다. 종교개혁이 등장할 무렵에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면죄부를 팔았고, 돈을 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십일조를 내야 교인이 될 수 있고, 돈을 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거의 자폭하는 종교로 비춰지기 딱 좋습니다. 늘 강조하지만, 평소 이웃에게 나눠주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거대한 건물을 유지하느라 막대한 돈을 끌어들이고, 교회가 커지고, 부자가 될 때마다, 꼭 최후에는 저렇게 구원을 내다 팝니다. 어휴, 교회도 이제 지옥만들기에 동참해 갑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삶"의 기준을 주님께 두고, 예수님이 원하시던게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아주 거창한게 아닙니다. 소설 거울 지옥에는 이와 반대되는 말이 등장합니다. "나만 바라보는 것 - 아침부터 밤까지 자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끝내 남자는 미치고 맙니다." 교회가 탐욕으로 미쳐가는 이유는 결코 다른게 아닙니다. 나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실종된 교회, 내 신앙만 있는 교회, 우리는 지금 이러한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에 관해 제발 "제대로 목소리를 내보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이 보급되기 전까지, 교회에서 한 번 약속을 정하면, 그게 일종의 불문율이 되어서, 다들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개개인 생활 속에는 모두 휴대폰을 가지게 되었고 편리해 졌습니다. 그리고 다들 내 생활부터 먼저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거울 지옥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약속을 정해도, 언제든지 내 입장을 "카톡" 혹은 "전화"로 알리고, 변경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올 수 있겠냐 라고 물어보면, "생각해볼께"라고 적당히 대답해 놓으면 나중에 회피하기도 좋고요. 교계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입장 (건물? 십일조?) 부터 생각하고, 평신도들은 이제 피곤한 교회 압박보다는, 자신의 생활부터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사회의 축소판이 되어갑니다. 사회와 구별되지 않는 조직, 우리는 그렇게 교회마저도 피곤한 감옥으로 만들어 갑니다.

좋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는 겸허하고, 깨끗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눠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고, 조금 손해보더라도 배고픈 이들에게 밥 한끼 선물하고, 그렇게 작은 실천을 계속해서 이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당장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주님께서 돌려주시고 갚아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일단 돈내라,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나눠주라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살아간다면, 나머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판을 깨고, 모진 소리를 해댔습니다. 성전이 이권화 되어서, 일부 사람들이 짜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현상을 저는 오늘날에도 목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가치가 없이 버려진다고 경고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래전에 들은 곁지식인데, 바다는 2%의 소금이 있어서, 바다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마저도 없어진다면, 바다는 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도 물만 먹고, 일정량의 소금 섭취가 되지 않으면 아주 곤란한 상황이 된다고 하고요. 지금은 그렇게 소금처럼 물들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반드시 필요하고, 아주 중요합니다. 권력에 빌붙고, 자본과 결탁하고, 사이비종교에 빠지고, 그렇게 저마다의 열정(?)으로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하게 살아가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더 빛나보이기도 하겠지요.

소설 천국의 열쇠에서는 하나님과 교회만을 사랑하고, 인간을 멀리하는 어떤 종교인이 등장하고, 그와 대비되게 한 사람의 삶을 정말 귀하게 생각하는 프랜시스 치셤 신부가 등장합니다. 만약 두 사람이 훗날 주앞에 서게 될 때에, 내가 이렇게 거대한 교회를 이끌었다 라고 자랑할 것입니까, 아니면 나 비록 가난했고, 겨우 몇 사람을 전도했을 뿐입니다, 라고 겸허하게 설 것입니까. 신앙이란 오직 나를 만족시키고, 오직 나를 흐뭇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추앙받는 삶을 던지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있는 용기가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 2013.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