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6월30일/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8:3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7. 23. 18:12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30일 주일 예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8:31-)

따지고 보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이 땅에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무려 신교860만 구교540만해서 1400만이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은 여전히 어둡고 불의와 불법이 판을 치며 억울한 이들의 눈물과 약한이 들의 한탄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제대로 예수쟁이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된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나부터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허덕이는데 남을 돌아보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내기가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세상 속에서 제대로 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주의 제자가 아닙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8:31에 보면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거하면’은 일회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진실되게 거하는 순간부터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네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요즘으로 치면 기독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거지요. 소위 성도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거룩한 무리’ 는 아닌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내말대로 살면” 이나 “나의 교훈을 고수하면”이란 뜻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주님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말씀은 주님의 복음사역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실천하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가 늘어나지 않는 주 요인이거든요.

‘주여 주여’  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하는 모든 이들이 다 주의 제자라고 인정받고 복을 받고 천국에 가야 되는데 우리 주님은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 내 말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갈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성도,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좀 모자라고, 좀 아니라도 그냥 적당히 좋은게 좋다고 넘어가지 않고 주님은 유독 자기의 제자가 되는 것에서는 철저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의 주님’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실제로도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모든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기의 복음의 본질을 고수하는 데와 자기의 제자를 만드는 데에는 엄격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은 명목상으로는 자기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의 제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도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대입하면 교회에 앉아서 헌금하고 직분을 맡고 주를 증거하고 전도하고 성가대하고 교사하고 각종 봉사를 담당해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준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주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고 주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결코 주의 제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첫 번째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제일된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제대로 지키고 있나요?

우리 주님의 딜레마가 바로 이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자기를 좇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는 없다는 것. 이적에 취해서, 주님이 왕이 될걸 바라고, 유대민족의 이상을 실현할 메시야로 보고 그를 따른 거지 그가 하나님이 아들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왔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남을 사랑하며 희생해야 하는 기독교의 제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냥 다른 종교처럼 예수 믿으면 복주고 잘못한 것도 그냥 넘어가 주고, 사랑만 주고 벌은 없고 .....이런 식의 전개가 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제자를 늘리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제자는 나의 말을 철저하게 지키고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은 오늘의 가장 주제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봐도 뭔가 있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는 말씀이기는 하지만 또 말이 좀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심오한듯하면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미 스스로 진리를 알고 그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니 뭐니 하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은 쉽게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아는게 병’이란 말이 있쟎아요. 많이 알면 알수록 더 많이 번뇌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오늘날 인간은 이천년 전의 성경에서 전해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진리를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술의 발달이나 인간자체에 대한 이해도에서는 신의 영역을 정복해 가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현대인들에게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좀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지식이 발달할수록 반 기독교적이라고 생각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성경의 믿음은 오늘날의 학문방향과 같지 않습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처음 근세의 학문은  인간을 억누르는 종교권력, 즉 기독교회의 권력에 맞서기위해 성장 한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진리를 가지고 종교에 대항할 수는 있어도 결코 믿음안에서 ‘자유’로워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설마 주께서 진리를 가지고 믿음에서 벗어나라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우리 본문으로 돌아가서 자세히 살펴봅시다.
여기서 주님의 말씀은 인간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고 해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진리가 뭔데요?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는 사실 학문이나 삶에서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맨 앞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일러 하신 말씀입니다. 즉 진리를 알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임을 믿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교류함으로 경험적으로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고 자유로워지라는 말씀은 다시 말해서 죄값을 지불하신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죄의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노예라고 하는 말씀에서 제가 생각나는게 몇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사를 할 때 무덤자리를 정하거나 결혼상대자를 구할 때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무슨 손없는 날이나... 등등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러한 모든 구습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와 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속박하는 얼토당토않는 미신이 우리를 구속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러한 자유도 진리를 알아서 얻는 자유의 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당장 주님의 말씀에 반발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역사상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굴복했으며 종이 되었더랬습니다.
이집트의 노예, 앗시리아, 바빌론의 노예로부터 시작해서 페르샤, 아람, 가나안 족속들의 노예를 거쳐서 그리스와 당시 로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라들의 지배를 받는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남의 노예가 된적이 없답니다. 무식하고 황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실 정치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자유를 말하기 때문에 이들의 말이 맞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침략자들도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자유는 허용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권리는 결코 빼앗긴적이 없다는 거지요.

여기에 대해 우리 주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여기서 ‘죄의 종’은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를 말합니다. ‘범하는’ 이란 말에는 한번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죄를 범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한다면 이미 자유인이 아니라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고 싶어서 저지르다가 횟수가 반복되면서 이게 중독이 되고 나중에는 죄악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를 알고 그를 믿고 그에게로 나아오라는 말씀이 바로 진리를 알고 자유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자기가 우리를 자유케 할 권리가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게되면 우리가 자유로워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담이지만 사람들은 주님의 말을 듣고 황당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니!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님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한술 더 뜹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예전에는 그래도 자기를 재림 예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재림예수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으로 자처합니다. 저는 그런이들을 믿고 있는 사이비교의 신자들이 어서 속히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기를 바랍니다.

여하튼 우리 주님은 지금 죄의 종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진리되신 우리 주님만이 우리를 죄의 종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의 요지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유명한 말이 아니라 맨 앞 구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저는 오늘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다시금 초기의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물질주의에 빠져서 끝없는 공룡처럼 대형교회만을 지향하고 그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고 , 그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없으며 그래서 성도가 없는 무늬만의 교인들로 채워진 교회는 이 땅에 어떠한 빛과 소금의 역할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땅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100개의 교회가 세워지면 그 중에 95개가 2년안에 문을 닫고 겨우 두 개만 성장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당연히 개척교회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큰 문제는 그러한 개척교회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한 생각을 가지십니다. 자기의 이름을 걸고 자기를 찬양하며 자기에게 간구하는 이들이 실은 자기의 말에 거하지 않고 자기의 명령을 준행하지 않는 다면 과연 그들을 자기의 제자들로 인정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복음이 과연 힘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개개인의 복락을 구하는 개인적 기복주의 신앙에 머물다가 , 자가 발전의 열기에 휩쓸려서 방방 뜨다가 결국에는 가라앉고 나면 불타고 남은 재처럼 더 이상 복음의 불을 찾아 볼 수 없고 더 이상 불을 붙일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교우들이 주님의 말씀안에 거하는 이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인이 아니라 성도라 불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30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어쨌든 신앙이 들쑥날쑥인, 일개 "나일론 신자" 이므로 (하하) 난데없이 논어의 한 구절을 덧붙여 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 다시 말해, 문제의 원인을 바깥으로 자꾸 돌리지 말고, 스스로부터 돌아보는게 더 중요하다는 거지요. 이걸 조금 패러디해서 써본다면, 오늘날 기독교의 치명적 문제는, "세상이 미워한다고 전혀 걱정하지 말고, 교회 스스로가 부도덕하지 않은지 걱정하라" 로 쓸 수 있겠고요.

저는 백면서생 같이 바보스러운 면도 충분히 있는터라, 진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분명히 알게 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긴데, 좋은 사람들이 있고, 좋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함부로 돌을 던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요즘 종교가 힘을 못 쓰고, 욕만 호되게 먹는 까닭은 그 행태가 "좋지 않기 때문" 이겠지요. 조금 독하게 쓰면, 예수를 좇는 성도는 없고, 예수 이름을 팔아서 호화롭게 사는 일부 성직자와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사람들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좀 더 밝은 태도로 살아가기, 좀 더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기, 타인을 꼭 배려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불평과 원망보다는 감사와 극복을 생각하기, 여기까지 전부 - 언제나 말은 쉽고, 행동은 어려운 - 길들 입니다. 지금 시대에는 이런 말들이 오고 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는 어울려 놀지 마라, 입만 살아서 또 무슨 뒤통수를 맞으려고... 제대로 된 사람들이 예수를 어디 믿더냐..."

물론 절반의 진실이거나, 과장일지 모르나,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걸 생각해 봐야 합니다. 듣기 싫더라도, 꼭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저 사람을 알게 된 게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성도가 하나 둘 늘어가면, 많은 것들이 저절로 해결되고,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탓하기 보다는, 반성과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구체적인 실천부터 시작하는게 맞습니다. 바로 지금부터 말이에요. / 2013.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