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5월12일/신하의 아들을 고치다(요한복음4:4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5. 13. 19:3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12일 주일 예배

신하의 아들을 고치다 (요한4:43-)

오늘 본문에서는 이제 이틀이 지나서 갈릴리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별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단순히 몇일간을 어디서 묵었고 이제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여기에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한군데 오래 머물지 마라

대접을 받는다고 해서 너무 오래 머물지 마라는 말이지요. 사마리아의 수가성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방문에 한껏 고무되었고 주님과 함께하는 것에 크게 기뻐합니다. 유대인이자 랍비이며 메시야인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에 사마리아 인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예루살렘과 요단강가에 이어 사마리아에서도 놀랍게 성공적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곳에서 겨우 이틀을 유하고는 갈릴리로 길을 재촉합니다. 갈릴리에 뭔가 굉장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솔직히 사역이 어려운 지역입니다. 요단강가에서 사역을 하다가 산헤드린 공회의 핍박을 피해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돌아 오는 도중에 수가성에서 놀랍게 성공했을 때 그냥 수가성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새롭게 교단을 선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수가성 사람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그를 믿었으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 갈릴리로 돌아 온 것입니다. 왜냐면 갈릴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따지고 보면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마다 자기하고 잘맞는 목회환경이 있습니다. 사역지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기하고 맞는 사역지를 만나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도 사역자가 자기하고 맞지 않는 사역지에서 고군분투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주께서 이곳에서 네가 할 일이 있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도를 따라 온 이곳에 뭔가 주께서 마련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는 정관에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조금, 아주 조금 제가 목사라는 것과 정관영암교회를 개척했다는 것을 정관주민들이 알고 있지만 서울의 강남이나 목동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와는 비교할 수 조차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산시내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에게 부산 시내를 떠나서 이곳에 거처를 정하게 하시고 여기서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목동도 아니고 서초동도 아니고 부산시내도 아니라 바로 여기에서 개척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운산 매암바위에 가서 기도하게 하시고 좌광천 물가를 두루 다니게 하셨습니다.

마치 주께서 갈릴리 물가를 두루 다니시다가 때로는 산에서 기도하신 것과 비견될만 합니다. 솔직히 도봉산의 영암이 그립습니다. 소요산 백운대가 그립습니다. 불암산과 청계산이 그립습니다. 저의 기도의 대부분이 그곳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는 다른 곳을 주셨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는 저희 동네 뒷산의 이튼 폭포에서 기도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산위에는 꽃들이 피어있고 산을 오르는 길가에는 허브가 지천으로 피어서 심신을 맑게 해줍니다. 뿐입니까? 사막에 왠 폭포가 그렇게 수량이 풍부한지...영원히 터를 잡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저에게 그곳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고향에서 선지자가 존경받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면 목사인 제가 저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 , 동료, 교인 누구의 아들로 제자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나 이적을 행하고 이름을 떨친 분이지만 갈릴리에서 그는 단순히 목수의 아들이자 마리아의 아들일 뿐입니다. 선지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명문가의 후손도 아니며 제사장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기들과 함께 뛰놀았던 목수의 아들로 가업을 이어받지 않고 가출했다 돌아온 이상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랍비라니요? 그런데 선지자라니요? 그런데 메시야라니요? 랍비가 되려면 랍비를 만드는 학교를 졸업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그런게 없었습니다. 다만 일부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의 표시로 랍비라고 부를 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은 주를 귀신들렸다고 설교 도중에 잡아서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뭐 이정도면 가족들이 거의 주님의 사역의 대적입니다. 지지자와 후원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기가 지긋지긋해 한 바로 그 갈릴리 고향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사명자의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
오히려 자기를 물로 보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
자,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본문을 따라 가 봅시다.

갈릴리에 이르자 예수님의 말씀과는 달리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분명히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왜 갈릴리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까요?
그것은 갈릴리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셨고 기적을 베푸셨으며 제사장과 서기관들 같은 사람들과 논쟁을 일으키며 큰 반향을 일으키신 것이지요. 자기들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높은 사람들과 논쟁을 벌일만큼 예수님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서울사람들도 예수를 인정하는데 우리같은 촌놈들이야!”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성공하지 않았다면 갈릴리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갈릴리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뛰어난 예루살렘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환영한 것입니다.

일단 갈릴리에 당도하신 주님은 갈릴리 가나에 가셨습니다. 이전에 주님께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의 높은 신하가 왔는데 이 사람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이 들어 있습니다. 이 아들은 매우 연약한 상태이며 오랜세월동안 아픈 중에 있습니다.

이 왕은 예수님이 나실 때 동방박사들과 만났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 잔인한 사람인 , 우리가 잘 아는 헤롯 임금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1/4을 다스리는 봉건영주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분봉왕이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이 사람이 잔인한걸로 소문이 나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가나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헤롯왕의 신하가 34km떨어진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온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가나에서 사는게 아닙니다. 단지 가나에 계신 주님을 만나기위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찾아 온 겁니다. 주님을 모셔가기 위해서. 그는 주님께서 가나에 오신 소식을 듣자 마자 자기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위해 주님을 모셔가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주님에게 직접 나아옵니다. 원문상의 표현으로 보면 그는 단순한 신하가 아니라 매우 높은 자리에 있는 신하입니다. 고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직접 가나로 옵니다. 당시 이러한 일은 매우 큰 존경의 표현입니다. 만일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자기의 아랫사람들을 보내어서 주님을 모셔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겸손히 주께 직접 나아옵니다.

왜냐면 아들이 지금 거의 죽기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나아왔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위해. 아들의 목숨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그는 자기의 지위를 내세울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성경의 기사는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같이 가서 아이를 고쳐주겠다거나 아니면 나는 못가겠다거나 이런 식의 답변이 나와야 하는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주님이 이틀을 유하다 오신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표적을 맛보았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주를 그리스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을 강하게 책망하신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기서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강하게 역설하신 겁니다.
주님이 방금 표적을 보아야만 믿느냐고 하신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왕의 신하는 계속해서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자고 간청합니다. 자기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위해서.

원어로 본문의 단어를 잘 살펴보면 아마 이 아이는 태어날때부터 병약하게 태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이 아이가 죽어갑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아버지는 표적주의고 뭐고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신하는 오직 주께서 자기 아이에게 가기만 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예수님을 가버나움으로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가버나움까지80-90리의 길을 하루에 가기는 약간 버겁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절하게 재촉하는 아버지의 상태로 봐서는 밤을 새워서라도 주님을 모셔가려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지금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음에도 여전히 주님을 모셔 가려 합니다. 표적과 기사가 이 사람에게는 너무 너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왕의 신하의 태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죽기 직전의 상태라도 주님과 만나기만 한다면 나을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 현재까지 왕의 신하가 주님을 진정한 신, 메시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 아무리 위중한 환자라도 주님과 만나기만 한다면 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주님에 대한 믿음인 것은 확실합니다.

자,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조금 의외입니다.
“그래, 그럼 빨리 가보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왕의 고위관리가 자기에게 간청하고 자기를 모시러 왔다는 것은 자기의 명성이 널리 퍼졌다는 증거니까 기분이 좋을 만도 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이 사람의 간청도 즐겨서 들어 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왕의 신하를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는 대신에 한마디를 합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주님의 말씀은 이미 살아났다는 겁니다. 과거형. 네가 지금 보지못하겠지만 너의 아이는 이미 살아났다.
영어성경은 또 다르게 표현합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하나는 과거형으로 하나는 미래형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가버나움에 있는 아이가 살아났는지 아니면 살건지 가나에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헤롯 아그리파 왕의 신하는 지금 마음이 매우 급합니다. 왜냐면 자기의 아들이 죽기 직전이기때문이지요. 그리고 자기 동네에서 여기까지 무려 80-90리가 걸립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옛날엔 차가 없었고 나귀를 타거나 마차를 탔을까요?
주님은 같이 가면 좋을텐데 안가신답니다. 그래놓고는 말로만 아이가 살았다고 하십니다. 살거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대로 자기 아이가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먼거리를 혼자서 돌아 갔다가 아이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아이에게 주님을 한번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 됩니다. 어쩌면 자기가 정성이 부족해서 주님을 죽어가는 아이의 병상으로 데리고 가지 못해서 어쩌면 살릴 수도 있는 아이를 죽이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코 주님을 모시지 않고는 혼자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래야 또 정상입니다.
“주님, 안됩니다. 제가 얼마나 먼 거리를 왔는데 혼자 돌아가다니요? 주님과 반드시 함께 가야합니다. 주님 제발 제 아이를 좀 봐주십시오”이렇게 돼야 정상입니다.
만일 주님의 말을 믿고 내려갔다 칩시다. 그런데 가보니까 애가 살아나기는 커녕 상태가 더 안좋아져서 죽을려고 합니다. 그래서 도저히 다시 가나까지 가서 주님을 모시고 올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예수에게 속았구나! 나하고 같이 오기 싫어서 거짓말을 했구나!” 이렇게 한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분봉왕의 신하의 보복을 피하기위해 주님은 갈릴리를 떠나 사마리아나 유대로 피신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 아그리파를 매우 싫어했으므로 그의 신하에게도 악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헤롯은 이두매 사람으로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할 경우도 충분히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왕의 신하는 그 불확실한 말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 왕의 신하가 그정도로 믿음이 좋아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저히 하다 하다 안되어서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두고봐라 , 만일 내 아들이 죽기라도 한다면 결코 너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이렇게 속으로 이를 갈면서 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왜 이 아이의 아버지가 그렇게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주님의 말한마디에 집으로 혼자 돌아갔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사람은 이제 주님의 말씀을 믿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은 사실 이와 같습니다.
눈에 확실히 보이지 않는, 정말로 불완전해 보이는 말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영의 특징은 안보이는 겁니다.

말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중히 여기도록 강조합니다. 사람역시 단순히 육체만으로 이루어진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들인 생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사람의 말은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자로 믿을 信을 써 놓으면 사람人에 말씀 言이 붙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욕망의 화신인 인간에게 말은 사람을 속이거나 웃고 울리는 유흥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나친 친절에 대해서는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찜짐해 하지요.

우리가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불편하고 답답한 일이 있을까요? 보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이지만 말을 못한다는 것은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큽니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거짓말과 변명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는 일이 드물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말보다는 종이에 쓰여진 글씨를 더 신뢰하고 한번 뱉어진 말이 사라지기 전에 그 말을 녹음해서 계속해서 되풀이 해야되고 증거와 증인들을 신뢰합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서도 그 위에 따로 사인이나 도장을 찍습니다. 공증인을 두기도 합니다. 그래도 속이려고 하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무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의 말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과 왕의 신하는 오랜 교우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소문을 들었을 뿐이고 오늘 처음으로 보는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시는 말을 믿어도 되는지 아니면 단순한 변명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판단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을 믿고 다시 집으로 돌아 갑니다.

이를 성경은 “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표현합니다.
요한이 간단하게 표현해서 그렇지 아마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의 말만 믿고 집에 가도 괜찮을까?’

‘내가 집에 갔다가 만일 아이가 낫지 않았다면 다시 여기 올 수 있을까? 그때도 예수가 여기 있을까?’ ‘이 사람은 반로마, 반 헤롯당이라서 나를 미워해서 거짓으로 나를 속이는게 아닐까?’ 이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어떤 말씀을 믿었습니까? “네 아들이 살 것이다” 원문을 보면 이 아들은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났고 지금은 죽기 직전의 매우 위독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나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치병의 이적들이 매우 많이 일어나지요? 당시 의술이란게 정말 별거 없었기 때문에 의사의 치료로 낫는다는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아이가 살아날거라고 믿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도 이 사람은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확신합니다. 그래서 기꺼이 가버나움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원문상으로 보면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는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마 주님의 말씀이 확실한가하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들이 나아서 너무 기뻐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그를 만나러 온 하인들을 만납니다. 하인은 주인을 만나서 그의 아이가 살았다고 말합니다. 위독한 병이 나아버린 것입니다.
우연히 아이가 나을 수 있습니까? 글쎄요....
혹시나 싶어서 왕의 신하는 하인들에게 언제부터 낫기 시작했는지 시간을 물어 봅니다. 그는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과연 주님의 말씀이 어느 정도로 굉장한가?

종들이 이야기합니다. “어제 제 칠시에 낫기 시작했습니다.”
칠시를 유대력으로 보아서 오후 한시입니다. 그리고 어제라고 한 것은 유대인은 해가 질 때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기에 생긴 표현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오늘 낮 한시부터 낫기 시작했습니다’란 말이 되겠지요. 낮 한시에 주님께서 네 아들이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깨달은 왕의 신하는 아이가 나은 것이 신적인 능력 때문임을 깨닫고 그런 능력을 발휘한 주님께 감복해서 그 온 집이 다 예수를 믿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동화같은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말씀으로 인해서 난 것이 아니라 이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처음 네 아이가 살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왕의 신하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때도 물론 주님의 말씀을 믿기는 했지만 주를 그리스도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단지 자기의 아이가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이 그의 말을 믿게 한 거지요. 그래서 그 말씀을 믿은 겁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자 비로소 그와 그 온 집이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 그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적을 맛본 사람들은 비록 불리한 현실가운데서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적의 첫 번째 조건은 말씀을 듣는 즉시 순종하는 것입니다. 속으로만 믿을뿐만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당시의 이단아입니다.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사두개인들 바라새인들같은 기득권 계층에서 주님은 인기가 없었습니다. 당연하지요. 이대로 사는게 더 좋은데 왜 세상을 바꾼단 말입니까?
그런데 주님은 기득권층에 가셔서는 기득권을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기에 내려놓을 것이 많은 이들은 주님을 제대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왕의 신하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은 그가 분명한 기적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만으로도 죽을 지경에 처한 자기 아들이 살아난 기적을 맛보았기 때문에 그의 온 집안이 주를 믿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주를 믿으라고 할 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고, 십의 일을 바치고, 무료로 봉사하고...하지마라 것도 하라는 것도 무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예수 믿는것에 비해 몇배로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과 돈과 자유를 빼앗고 저들의 행동에 도덕적 종교적인 잣대를 적용해서 이것을 되고 저것은 안되고 하는 간섭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누가 하는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믿는 순간 내 마음에서 그러한 일들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나를 제어하기 시작합니다. 세상 법적으로 전혀 죄가 되지 않고 단지 쾌락을 추구할 뿐임에도 내 마음에서 이건 죄라고 끊임없이 소리칩니다. 내 양심이 살아나서 나를 찌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건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예수를 믿으려고 한다면 요구되어지는 희생을 넘어서는 것을 예수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이에게 뭔가를 줄 수 있지만 신이 아닌 단순한 우리들로서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앉은뱅이를 일으키지도 못하고 소경을 보게 하지도 못하며 중풍환자를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만이 이런 유를 나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가 처음 주님의 말을 믿고 집으로 갔을 때 만일 그 아들이 죽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그는 주님을 욕하고 예수쟁이를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을 보지도 않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이고 그만큼 실망했을 것이며 반대로 그만큼 주를 대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을 믿었을 때 그 믿음이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와 온 집이 영구히 주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영적인 충족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솔직히 그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입니다. 울어도 안되고 굶어도 안되고 몇날 몇일을 나를 괴롭히며 집중한다고 해도 안됩니다. 단지 우리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기도합니다. 성령에 사로잡히기 위해 기도합니다.

오늘 물질 문명이 극성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엄청난 불가능과 절망을 맛봅니다. 물질이 성하면 성할수록 우리의 마음속에 뭔가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목회자
물질에 초연한 교회
영적인 주의 종, 성령의 역사를 믿고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는 성도들
세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의 주인공

이러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귀한 가치들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나 전하는 것들이 모두가 다 헛수고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갈릴리를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의 신하가 예수를 초청한 것은 뭔가 정치적으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려고 한 정황이 보입니다. 헤롯의 신하는 예수님이 사마리아나 유대에 있을 때 그를 초청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갈릴리로 들어오시자 비로소 예수를 초청하러 나섭니다.

‘여기는 내가 다스리는 구역이므로 너는 내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어’ 이런 식의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왕의 고관과 초야의 유대교 선생과는 그 높이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시골의 랍비하나 어떻게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요청이 주님에게 당연히 받아 들여 지리라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자기처럼 높은 사람이 시골의 랍비에게 간청하는 일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명백한 오산이었습니다. 주님의 입맛은 엄청나게 까다롭고 그 행동규칙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럭비공 같습니다.
누구에게는 가지 않고 말씀만으로 낫겠다고 하고 , 누구에게는 집으로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고 ........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여기서는 이런데 왜 저기서는 저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마 주님 나름대로의 판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양한 판단의 기준을 우리가 몰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어떤 경우에라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겁니다.
말로만 믿습니다가 아니라 그 명령에 순종해서 뭔가 요구받을 때 실천하면 되는 겁니다.

이미 나았으므로 집으로 혼자 돌아가라고 하면 혼자 돌아가면 되고
비록 죽었지만 내가 살려줄테니까 나만 믿어라 고 하시면 그대로 믿으면 되고
침상을 들고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면 되고
눈에 보기에는 아직 낫지 않았음에도 이미 나았으므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하면 나은 걸로 믿고 제사장에게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보지 않고 믿자 그 믿음이 기적적으로 보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어느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기적을 맛보았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게 있을까요?
없지요. 그런데 그러한 기적을 일으킨 것은 주님의 말씀을 보지도 않고 단지 말씀하셨을 뿐인데 그걸 믿었기 때문에 가능케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확실한 기적도 처음은 보이지 않는 말씀에의 무조건적인 순종과 실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도 매암바위를 바라보며 저 위에서 하룻밤 자면서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재작년 천성산에서 4일간 기도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산정에서 저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산아래에서 사람들에게 선포했고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세상과 단절되어 하나님과 소통되는 시간이 필요함을 인식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된 우리들 역시 너무 세상 속에서만 정신없이 지내지 말고 세상과 단절되고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도 때때로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천성산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저는 저의 바로 옆으로 멧돼지 어미와 새끼들이 지나가는 섬뜩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절벽길이 하나 나있고 저는 그 길에서 약간 내려간 절벽위의 사방6m정도의 공터에서 누워있었는데 도망갈데는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몇 년 있다가 오는 사이에 한국의 산에는 야생동물들이 크게 늘어났는데 제가 새벽에 멧돼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길에서 약간 내려간 거대한 절벽 위였기 때문에 멧돼지를 피해서 도망가는 길은 절벽에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멧돼지들을 뚫고 산위로 도망가는 건데 이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만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려고 하는 간절한 염원이 그러한 위험을 이기게 해준 겁니다.

멧돼지를 생각하면 요즘은 솔직히 산위에서 밤을 지새는 것이 약간 두렵기도 합니다. 하루 이틀 사람과 이야기하지않고 침묵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때 침묵으로 하나님에게 집중할 때 주님은 저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기사를 보면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못하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그러한 이적들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만으로 아이를 낫게 한 것이 그가 원래 신이기 때문이라고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요? 천만에 말씀, 주님이 주님되시기 전에 그는 40일간 유대광야에서 금식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기 전에 겸손하게 몸을 굽혀 인간에게 세례받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에 이적은 점점 더 어렵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한반도를 비껴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집중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불가능을 뛰어넘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기적은 보이지 않는 말씀에의 순종으로부터 시작함을 깨닫고 지금도 나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래도 준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1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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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적 권능이라는 것이 결국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작동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 말이에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나으리라는 말이 있었다면, 믿음으로서 그게 실현되는 것은 새삼 놀라움으로 느껴졌습니다. 일단 만나봐야 혹은 겪어봐야 상황을 알 수 있다는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영역이었지요.

"잘될꺼야" 라는 긍정적인 말이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해나갈 때 현실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ㅇㅇ가 잘될꺼야" 라는 믿음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게 행동해 나가는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이번에 등장하는 신하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원망하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자신의 발걸음을 다만 재촉합니다. 그 짧은 장면이 계속해서 반복재생 됩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단을 요구받을 때,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쓸데없이 걱정부터 하는 "믿음 없는 태도"를 버려야 겠습니다. 그 대신에 더 좋은 미래를 상상하며,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결단을 요구 받고 있는건 아닐까요.

저는 신하가 자신의 요구대로 예수가 행동하지 않자, 불평하면서 짜증만 내고 돌아섰다면, 결코 아들이 낫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확히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불평만 하고, 믿음 없는 인생을 산다면, 결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께 나와 간절히 구했다면, 그가 그것을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 입니다. 걱정 대신 믿음으로 마음을 채우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해나간다면, 예수님께서 끝까지 인간을 붙들어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 2013.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