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한국사 정리를 계획했을 때, 약 두어달 정도의 기간을 잡아, 50개의 문서로, 읽기 쉽게 노트정리를 옮겨 놓으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일이 커지고, 재밌기도 했기에, 지금은 좀 더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절반 정도의 이야기라는 거지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지점이 슬프고, 비극적이라서 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떠오릅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조선 전기의 경제 상황을 살펴볼텐데,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는 16세기 말, 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던가를 경제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볼까 합니다. 교과서적인 표현으로 쓰자면, (근세의 경제) 조선 전기의 조세 - 공납 - 역, 그리고 환곡까지 보는 문서입니다.
조세는 지난 문서에서 많이 살펴보았기 때문에, 복습 개념에 가깝겠네요. 살짝 헛갈리기 쉬운 부분을 재차 정리하면, 그나마 꽤 상황이 좋은 농민 홍씨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홍씨는 자신의 토지를 10결 가지고 있고, 이것만으로 먹고 살기가 조금 벅차서 양반 땅에서 소작도 10결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수확을 얻을 수 있기에,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요. 세금은 어떻게 내야 할까요?
우선 자신의 땅에서 수확한 것에 대해서는 "조세"의 개념이 적용 되어 1결당 ◇◇두 만큼 국가에 납부해야 합니다. (세종 때 도입한 공법을 기준으로 한다면 올해는 농사 중하년이라서 10두를 세금으로 내었다는 거지요.) 자, 그렇다면 소작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요? 이건 땅 소유주 양반에게 "지대"의 개념으로 절반을 떼어줍니다. 나머지 반 정도가 자신의 몫이겠지요. 따라서 소작한 땅은, 농민 홍씨에게 직접적 조세 대상이 아니라는 것, 대신에 지주에게 "지대"를 많이 내야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되겠습니다. 이런 소작시스템을 병작 반수제라고 하는데, 양반들에게는 짭짤했겠지요.
덧붙여 잠시 언급한 공법은 점차 최저 세율인 1결당 4두로 고정되는 경향으로 이어졌고, 이 관행이 계속 이어지다가, 양란 이후, 조선 후기로 가면 아예 법제화 되어서 영정법으로 바뀝니다. 한편 왜 최저인 1결 4두로 흘러가느냐면, 모두에게 세금 저항이 적기 때문이기도 하고, 게다가 1등급, 2등급의 좋은 토지를 갖고 있는 세력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면세적 성격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땅이 좋아도 세금은 4두만 내면 되는거야! 라는 것. 즉 양면성이 있는 거지요. 쉽게 표현하자면, 농민들에게는 부담이 다소 줄었지만, 좋은 땅을 듬뿍 가진 기득권들에게도 아주 만족스러운 최저 세율 유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금을 줄이자는 게 보수주의자들의 단골 구호인 까닭도 거의 유사하지요. 대신 국가의 농민 장악력은 떨어지고, 재정도 빠듯해져 갔습니다. 참 그리고, 세금의 운반은 고려 시대와 같습니다. 군현에서 걷어서 조창으로 갔다가, 조운을 이용해 경창으로 도착합니다.
이제 두 번째로 공납을 봅시다. 공납이라 함은 특산물을 내는건데, 기본적인 방식은 이렇습니다. 국가가 군과 현에게 특산물을 가져오라고 할당량을 내립니다. 그러면 군현이 각 호에게 이만큼씩 내놓으라고 요구하는거지요. 알기 쉽게, 가령 50가구의 인삼마을이 있으면, 그 동네 사람들은 집집마다 매년 좋은 걸로 한 뿌리씩 내야 합니다. 제주도로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당시 귀했던 귤이 있겠네요. (옛날에는 귤이 아주 귀한 특산품이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지요. 음, 그러고보니 바나나도 몇십년 전에는 귀한 과일이었구요.)
자자, 어쨌든 귤을 내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당시 참 귀한 귤을 때에 맞춰서 공납으로 내기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다는 것! 혹여 생산량이 좋지 않더라도, 공납을 어떻게든 맞춰내야 하니까, 이제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방납업자"가 등장합니다. 이름만으로 느껴지나요. 쉽게 말해, 이들은 특산물 납품 대행업자 입니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요즘은 어지간한 짐은 택배서비스가 다 해결해 주듯이, 당시의 부담스러운 공납은 방납업자에게 맡기면 간신히 처리될 수 있었습니다.
공납은 한 세기를 거쳐, 16세기쯤 흐르면, 업자가 대신 내주는 방납이 점점 많아지며, 농민들은 이제 특산품 대신에, 방납업자에게 "공납의 대가"를 지불하는 묘한 모습으로 흘러갑니다. 다시 말해 농민들은 이중부담을 지고 있는거지요. 국가에다가 조세내고, 방납업자에게 또 뭔가를 뜯기는 겁니다. 방납업자는 어딘가에서 물품을 잘 구해가지고, 국가에다가 내었고요.
그런데 결정적 문제는 뭐였는가 하니, 방납업자가 이제 군,현과 손잡고, 부패되어 가기 시작합니다. 공납의 비용? 이건 뭐 부르는게 값입니다. 현대적으로 패러디하면, 업자가 말하길, 제주도 귤 벌써 100박스 국가에 우리가 냈으니, 어디보자 장부보니 이 마을은 30가구 있으니까, 모두 합해서 올해 3,000만원 모아서 갔다줘. 허...헉. 규...귤 한 박스에 30만원이라니...ㅠㅠ 방납업자는 2배씩도 남겨먹고, 가격을 자기들 마음대로 합니다. 더 황당한 것은 몇몇 가구가 돈을 못내는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다른 가구에서 돈을 보태서 정확히 금액을 맞춰줘야 했습니다. 이쯤되면 그야말로 막가는 "방납의 폐단" 이었지요.
만약 의식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직접 군현에다가 귤을 구해다가 내면, 그 지역의 관리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음... 하나씩 박스 열어봐, 자네들, 이런 귤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우리는 최상급을 구해서 바쳐야 한다고! 도로 들고가! 그리고 말야, 국가에 내는 거는 우리가 해줄테니까, 자네들은 방납업자에게 할당된 돈(=쌀 몇가마니)이나 내도록 하시오!!!"
쓰라린 이야기를 계속 하자면, 당연히 방납업자는 지방 관리들에게 이미 뒷돈을 밀어넣었을테고, 업자들은 워낙 높은 돈을 챙겨가니, 지방관이나 업자나 매년 참으로 남는 장사였지요. 일반 백성, 그러니까 농민들만 너무나 괴로워하며 고통받는 겁니다. 독하게 말하면, 그 당시 관리들은 "부패의 아이콘"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즉 현대의 공무원이 대민봉사의 개념이라면, 조선 시대 관리는 지배층의 입장에 가깝다 고 볼 수 있습니다.
(※혹시 공무원을 꿈꾸는 분이 있다면, 꼭 대민봉사 하시길 바랍니다... 공무원이 기득권으로 군림한다면, 역사 공부부터 우리 다시 합시다! 시민들의 혈세로 해야하는 것은 당연히 "봉사"이지, 황당하게도 "부패"가 되면 곤란합니다. 뒷돈과 손잡는 것은 파렴치한 추태로 변질되어 갑니다.)
이렇듯 심각한 수준으로 방납문제가 커지자, 개혁하자고 이야기 하는 인물도 등장합니다. 조광조, 이이, 유성룡 같은 학자들은 폐단을 강하게 지적하며, 수미법이라는 대안을 내놓기도 합니다. 그냥 적당량의 쌀로 통일해 공납을 대신 거두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특산품들은 쌀로 사오면 되는거 아니냐 라고, 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개혁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음 아프게도, 이런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손을 맞잡고 짭짤한 이익을 매년 낼름 낼름 먹어가던 지배층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방납의 폐단은 지속되었고, 전쟁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겪고 나서야,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양란이 끝나고, 마침내 조선 후기로 가서야 대동법으로 연결되는데요. 뭐, 나중에 등장하는 영정법과 대동법은 뒤에 조선 후기 경제파트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을겁니다. 어쨌든 개혁도 좌절되고, 전쟁을 겪었고, 이후 개선된 대동법이 등장해 정착하는데까지 무려 100년이나 걸렸다고 하니, 날로 꿀꺽 먹는 부패한 지배층들의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지 느낄 수 있겠네요.
세 번째로 볼 것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이 있습니다. 요역(성쌓기, 길닦기 등)과 군역이 있는데요. 조선 전기에는 커다란 전쟁이 없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군역의 요역화 현상" 을 맞이합니다. 쉽게 말해, 군대가서 군사훈련 하기보다는, 각종 공사만 계속 하는거지요. 오늘도 삽질, 내일도 공사현장 입니다. 당연히 많이 힘들지요. 군대에 빠지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늘어갑니다. 군대에 빠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는데요. 하하, 지금도 정당한 사유 없이 빠지면 불법인데, 당시에도 물론 불법입니다. 대립제와 방군수포제가 있었습니다.
대립제는 "돈을 상당히 쥐어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역을 부탁하는건데, 한마디로 남이 대신 군역을 때우는 거"지요. 방군수포제는 더 씁쓸한데요. "지방관들에게 뒷돈을 듬뿍 찔러주면, 알아서 면제시켜주는겁니다. 나원참..." 더 황당한건 전쟁도 별로 없었고, 뒷돈으로 수입도 짭짤했던 지방관들이 이제 몰래 귀에다가 속삭이기 까지 합니다. "이봐, 군역지면 엄청 고생이잖아, 어떻게든 돈 좀 많이 만들어 와라, 내가 빼준다니까 녀석..." 이러니, 저질(低質)로 변해가는 조선 군대가 싸움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임진왜란 때, 금방 수도 한양까지 점령당한건 다 뼈아픈 배경이 있는겁니다.
국가에서도 군역 문제로 불법이 난무하니까, 군적수포제라고 해서 합법적 면제방법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 군대 안 갈 사람은 1년에 옷감 2필씩 내라, 그러면 빼줄께." 이리하여, 그나마 지방관의 파렴치한 횡포는 막을 수 있었겠지만, 군사 제도가 무너져 가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이제 나라는 누가 지키겠어요. 왜구가 쳐들어오자, 조선은 게임 끝. 지배층은 도망가고, 수군과 의병이 활약하는 것은 멋있기도 하지만, 굉장히 슬프기도 합니다. 전에도 인용했지만, 정신이 부패로 망한 다음 부터는, 국가가 몰락의 길을 걷는겁니다. 어휴! (그나마 정신이 든 조선은 뒤늦게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속오법으로 지방군을 개편하는 등, 임진왜란 이후에 군사제도를 정비합니다)
끝으로, 환곡을 살펴봐야 겠네요. 환곡은 구휼제도 입니다. 의창과 상평창이 있는데, 힘들 때 곡식을 빌려줌으로서,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려는 취지였습니다. (요즘말로는 생활자금 긴급지원!) 그러나 시간이 흘러 환곡마저도 "준조세화 되는 경향"으로 변질 됩니다.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관리들이 곡식을 빌려가라고 강요하고, 나중에 돌려받을 때는 높은 이자를 받아챙깁니다.
여기까지 쓰고나면 진짜 16세기의 조선 경제는... 화려하게(?) 펼쳐지는 각종 문란함으로 휘청대는데, 나라가 망하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양반은 토지를 탐하고 돈으로 군역을 면제받고, 농민은 조세, 방납(공납), 요역에 시달리고, 힘들어 환곡으로 돈 빌렸다가 높은 이자에 막막하고, 군대의 기강은 이미 바닥으로 추락해 가고... 16세기부터는 도적들이 급증합니다. 몇 번 언급한, 임꺽정 같은 인물들이 있었지요. 이런 16세기를 살아갔던 비참한 농민들은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어쩌면 국가야말로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도적집단"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임진왜란 당시 슬프게도, 기층 민중들이 경복궁을 불태우고, 함경도에서 왕자들을 잡아서 왜군에게 던져주었다는 역사는 많은 것을 뼈아프게 알려줍니다. 기득권의 탐욕스러운 횡포는, 먼저 기층 민중들의 애국심을 뺏어가는 겁니다.
오늘날로 비유하면, 차라리 이민 가고 싶다, 저 나라가 부럽다 라는 말을 하는 상황으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태어난 나라를 버리고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걸까요? 아니면 막돼먹은 나라에서 살 수 없다며, 이민을 생각하게끔 만드는 "국가가 이상한" 걸까요? 조선으로 친다면, 태어난 고향을 버리고, 각지를 떠돌며 도적질을 생각하는 사람이 미친걸까요? 아니면 가혹한 수탈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도적을 양산하는 문란해진 국가제도가 미친걸까요? 국가의 품격이 있다면, 16세기 조선은 낙제점을 피할 수 없으며, 어쩌면 21세기 한국에게도 충분히 이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영감겸 여담으로 - 저는 핀란드 사람들을 가끔 생각합니다. 그들이 여유로워서? 교육환경이 좋아서? 복지가 좋아서? 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가난했던 이 나라는 과거 소련과의 전쟁에서 전력으로 맞서싸워서, 흡수되기를 거부했던 나라라서 인상적입니다. 국가 청렴도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나라라서 인상적입니다. 바꿔쓴다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청렴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는, 자연스럽게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이 될터이고, 부패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는 점점 사람 살기 가혹한 세상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요즘 사는게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온다면, 혹여 이것이 "부패" 때문은 아닐까요? 만약 어떤 나라에서, 기득권이 자본과 손잡고 합법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즐겨한다면, 싸우고 개혁하지 않으면, 밝은 미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희망은, 부패를 거부하며, 청렴한 마인드와, 함께 사는 상식으로, 단단히 무장하고, 참여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국격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여기서부터 세상이 변화할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때로는 아는 게 부족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뭘 모르면 좀 어때요, 보통사람의 심성을 가지고, 공동체와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이들이야말로 "가슴 벅찬 감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부족한 글이고, 정리도 두서 없을 때 많았지만, 장문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선생님이 자주 강조하는 말처럼 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않고, 깨어 있는 한 사람으로서 당당히 서 있을 수 있기를 힘껏 응원합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