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문서에 이어서 사법기관을 정리합니다. 사실 행정기관과 같으므로,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중앙에 사헌부에서 사법업무를 보았고요, 대역죄인을 처리하는 의금부도 사법적인 일들을 하지요. 수도업무를 보는 한성부에서도 사법처리를 담당했습니다. 다소 특이한 것은 노비 문제를 담당하는 장예원이 있었다는 점. 조선 초기에는 특히 노비 소송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방의 경우는 관찰사와 수령이 사법 처리를 담당합니다. 수령은 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지요. 수령7사라고 해서 임무들을 살펴보면, 농업을 장려했고, 조세 균등을 추구했으며, 교육도 해야 했고, 인구 관리도 합니다. 수령들은 사법권, 행정권, 심지어 군사권까지 갖고 있었으므로, 역할이 막중했다고 볼 수 있고요.
재밌다고 해야할지, 특이하다고 해야할지, 소송 중에서는 조선 초기에는 노비관련 소송이 많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묘자리를 놓고서 다투는 산송이 증가합니다. 산송은 풍수지리와 연관된 것이지요.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소송을 불사하면서 치열하게 싸웁니다. 심지어 사헌부 법관들까지도 산송 처리가 정말 어려웠다고 호소할 정도이니, 얼마나 목숨 걸고 묘지를 중시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임에도, 어째서 이상하게 풍수지리 묘자리에 관해서 집착했던건지, 아마도 부모에게 끝까지 예와 효를 갖추는 것이 묘자리 마련이라고 여겼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상 중요했던 것은 조상의 모습을 기억하고 말씀을 잘 실천하는 것이었음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위안을 얻는 물질적 선택을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날도 장례 비용이 천만원이 넘을 만큼 다소 지나치게 비싼 것도, 마지막 길을 풍성하게 보내야 한다는 의식의 영향이 남은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고요.
이제 향촌 사회의 모습들을 들여다 봅니다. 우선 중앙에서는 관찰사를 파견합니다. 수령을 감시하는 역할인데, 고려 시대와 달리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은 당연히 향촌을 책임지는 아주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고요. 그러다보니 중앙에서는 획기적인 제도를 만들어 둡니다. 바로 임기제와 상피제의 원칙 입니다. 부정부패의 가능성을 선차단 하는 관점에서, 각 지역에 파견할 때 임기를 두었고, 상피제를 통해 그 지역 출신은 의도적으로 배제해 버리도록 합니다. 예컨대 충청도 사람이라면, 충청도 지역에서 일하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는 사람에게 호의적이거나, 또는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고 본거지요. 즉 조선사회는 비리를 막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고, 신경을 썼던 거지요.
아쉽게도 문제점은 있었습니다. 이렇게 운영되다보니 새로 파견되는 수령이 부임된 지역을 잘 모를 때가 있겠지요. 이럴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게 보좌하는 "향리" 입니다. 향리가 지역 상황에 대해서 보고를 하고, 또 수령의 지시를 받아서 직접 대민업무를 실행하기도 하고요. 그러므로 향리 역시도 부패하지 않아야 했으며, 수령이 향리를 바로 옆에서 감독하지요. 바꿔 말해 수령도 향리도 맡고 있는 역할을 공정하게 잘 감당해야 했습니다. (결국 문제가 뭐였느냐 하면, 향리와 수령이 서로 입맞추고 지위를 남용하게 되면, 농민을 수탈한다는 거지요. 청렴한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날도 당연히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지역의 양반들, 이른바 "사족"들도 영향력이 있다보니,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도 합니다. 물론 수령은 기본적으로 사족을 감시했겠지요. 수령 입장에서는, 사족이 "어떤 여론을 만들어가는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관계에 놓입니다. 왜냐하면 사족들은 유향소라는 기관을 통해서 여론을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족들은 향안, 향규 같이 향촌 지역의 규칙을 주도하기도 했고요. 서원에서 인물을 키우고, 교육시킵니다. 사족이 여러모로 하는게 많지요. 이렇게 인재를 키워서 끊임없이 중앙으로 진출하기도 합니다. 예학, 소학을 보급하고, 족보를 중시 여깁니다. (옛날에는 학문 중에 족보를 달달 외우는(!) 것도 중요시 되었습니다. "얘야, 공부할 시간이야, 족보를 다시 외워봐라!") 이런 식으로, 사족 세력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되새기려고 했던거지요. 마지막으로 사족은 향약을 통해 "농민을 통제"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처럼 하는게 많다보면, 역할이 커지고, 점차 세력화 될 수 있으니까, 중앙에서 보기에도 사족은 견제가 필요해 보입니다.
중앙에서도 이제 향촌 세력을 (사족을) 견제하는데, 사족을 감시하고자 경재소를 만듭니다. 그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겁니다. (덧붙여 경재소와 유향소는 고려 사심관 제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혹시 사족이 이상한 일이라도 꾸민다면, 가만두지 않겠어! 라는 느낌.) 한편, 반대로 사족은 지방 자치를 계속해서 원하고, 중앙의 간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지역에서 힘이 있는 향리의 형태를 감시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관찰사나 수령은 사실상 왕의 오른팔이며 중앙집권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들을 사족들이 마냥 반길리가 없으니까요. 조금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면서, 견제하고 나름대로 권력의 균형을 맞춰보려고 했다는 느낌을 기억하는게 중요할 듯 합니다.
마지막으로, 면리제를 더 들어가보면, 한 면에 여러 리들을 나누어 놓습니다. 리 안에서도 오가작통제로 계속 감시하고요. 어쩌면 이렇게 잘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조직적인 반란이 처음에 쉽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한편, 농민들도 나름의 자치 조직이 있었는데, 상장제례 같은 일들은 "향도"를 통해서 해결하고요, 농사를 지을 때는 같이 힘든 일을 해나가는 두레를 조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게 있는데, "사족의 질서인 향약"과 농민자치조직들은 대립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양반들의 향안, 향규, 향약까지는 자신들이 농민에게 강요하는 규약이었다면, 자치조직의 향도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농민의 모임"이었다는게 중요합니다.
복잡한 시스템이 구축되어 나간 본질은, 다시 말하지만, 서로 견제하기 위해서, 촘촘하게 얽혀 있다는겁니다. 그래서 결정적 문제는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든다고 해도, 운영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성과나 승패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토록 제도에 심혈을 기울여도, 비리가 발생하고, 운영이 잘못되면 좋은 시스템까지도 와르르 무너지는 거지요. 전에도 언급했지만,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는, 견제하는 구도를 공들여 만들어 놓았지만, 시스템을 우습게 여기고 악용하는 무리들에 의해서, 점차 부정부패로 문란해져 갔다는게 상당히 가슴 아픈 대목입니다. 오늘의 결론은 사람이 중요합니다. 특히 관리자의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합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이기심으로 탐욕스럽게 괴물로 변하면,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흘린다는게 역사가 전하는 뼈아픈 교훈 중 하나입니다.
개인적 오늘의 영감 - 고백하자면 저는 시스템적 사고를 중시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은 중요합니다. 시스템이 비교적 잘 되어있는 미국 같은 나라는 대통령도 비리와 관련되어 있으면 거세게 비판 받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시스템에 의한 감시가 체계화 되어 있지요. 그런데 결국 이게 제대로 작동되려면, 각 사람의 의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결국 잘못된 것에 대하여 "NO"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예컨대 향약의 경우 간부들이 서로 다투고 질서를 해치는 모순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게 과연 조선시대에만 있는 풍경은 아닐 듯 합니다.
원칙을 어기면서 빠른 길로 가려는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원칙대로 가면 조금 느릴 수도 있고, 양보도 필요할 지도 모르고, 조금은 더 불편하거나, 조금은 더 귀찮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원칙을 중시하고, 약속을 지키고,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요. 그런 날을 반드시 이루기 위해서,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봐야 겠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