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근세문화사 3 - 조선의 불교와 민간신앙

시북(허지수) 2013. 6. 4. 01:13

 제목은 일단 불교와 민간신앙이지만, 워낙 성리학 관련으로 분량이 많다보니, 지난 이야기에서 못다한 후일담까지 살펴보도록 할께요. 16세기에 마침내, 절대로 성리학! 을 주류로 삼고 있는 사림파들이 집권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학파별로 계보가 나눠지게 됩니다. 계보로는 서경덕 - 조식 - 이황 계통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동인당" 이 있고요. 이이와 성혼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는 "서인당"이 있습니다. 이른바 동서로 분당이 된거지요.

 

 한편 이후에 또 분화가 일어나는데요, 서경덕과 조식의 영향을 받아 북인 / 이황쪽의 영향으로 남인 / 이이쪽은 노론 / 성혼쪽은 소론, 이렇게 각각 연결되어 나갑니다. 큰 흐름을 기억해 둔다면, 사림은 분화되었고, 성리학자들은 세부적으로 상당히 의견이 달랐음을 염두해 둔다면 좋겠네요. (게다가 본질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특징을 생각해본다면, 주장을 쉽사리 굽히지 않았을 테고요)

 

 지난 문서를 재점검하며, 이황과 이이의 뒷배경까지도 이해해 봅시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은 "리"를 본질으로 하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리를 중요하게 보긴 하는데요, 다만 이이는 그 중에서 상대적으로 기도 중요하다고 본 거지요. 그렇다면 왜 이황은 이상주의자가 되었고, 이이는 현실주의 노선을 걷게 되었을까요? 시대적 배경도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이황이 활동할 당시는 권력 주도권을 놓고서 사림이 권력투쟁을 펼쳐나가던 시대였습니다. 훈구파가 집권이고, 사림파는 일종의 야당세력이라 할 수 있겠네요. 상대적으로 야당이 되면, 아무래도 견제를 중시하고, 비판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비판하는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가치를 중시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보면, 정통 "리"가 사림이다, 훈구를 "기"라고 보면서, 본질이 무엇이며, 정통은 어떠해야 하는가 를 주장하는 셈입니다. (어쩌면 이런 굴하지 않는 정신이 있었기에, 네 번의 사화 속에서도 사림은 집권세력 교체를 이루었는지도요.) 어쨌든 이황이 활동하던 당시 사림파는 야당 성향이 있고, 잘못된 제도를 바로 잡고, 바꿔야 한다고 주장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조금은 더 이황의 이상적인 주장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이 때는 배경이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이가 활동할 당시에는 사림이 이미 집권세력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사림이 어엿한 "여당, 집권당"이므로, 정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 때, 변치 않는 "리"와 절대적 원칙만으로는, 세상사 실제 일들을 겪어나가고, 작동시키기에는, 어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타협이 필요하고, 절충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작동하는 모습은 상대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기"라는 요소를 끌고와서, 이이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접근 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건 농담으로 통용되는 우스갯소리입니다만, 이황은 (시대상황도 있고) 실질적으로 정책에 입안하고 참여한 게 적었으므로 천원의 인물로, 이이는 적극적으로 현실 개혁을 외치며 영향력을 많이 끼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더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오천원, 이라는 여담도 있습니다. 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 뭐 어쨌든, 여기까지 성리학의 발달을 이해해 보기 위해서, 많은 분량을 할당해, 장황하게 풀어쓰게 되었네요.

 

 이제야 문서 제목의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_-; 불교와 민간신앙을 살펴봅시다. 조선의 불교상황 말이지요. 분위기가 예전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서, 불교가 철저하게 탄압받는 편 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는 도첩제가 있었습니다. 즉, 관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누구나 출가를 못하게 막았는데요. 지배층에게는 유교적 성리학 세계관이 있다보니,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를, 성리학자들은 "가출"로 보는겁니다. 아니, 부모님을 모셔야 할 사람이! 품에 벗어나 가출을 했다고 보고, 출가행위를 불효막심한 모습이다, 반드시 막아야 한다 라고 본거지요. 또한 세종 때는, "교단정리" 에 들어갑니다. 선종과 교종 36개 사찰만을 인정하며, "여기만 절이다!!!" 라고 확 정리해 버립니다. 정말 강력한 압박이지요. 절도 다 절이 아니라고 보았고, 사원이 가질 수 있는 토지도 제한 했고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런식으로 강경책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세조 때는 살짝 다른 모습도 있습니다. 물론 조선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의 나라이며, 보여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을 강조"한다지만, 생각해보면 불교의 역사는 천년도 넘습니다. 과연 오랜 종교가 단칼에 쓱하고 없어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고통스러울 때, 부처님에게 빌면서 민중들에게 위로를 주는 종교가 불교였고, 집권자들 또한 백일기도도 하고, 그런 문화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에 따라서는 불교에 친화적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세조 때는, 간경도감을 설치함으로서, 국립기관을 통해 불교 경전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해서 불교 지원을 상당히 많이 하기도 합니다. (시험제도인) 승과도 잠깐이나마 부활하기도 했었고요. 정리하자면, 숭유억불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교의 끈은 여전히 연결되고 있었다 라고 이해하면 OK.

 

 이제 도교를 볼까요. 나라에서는 제사를 관장하고 있는 소격서가 있었는데요. 떠오르는 사림파들은 이런 문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개혁가 조광조 등은 소격서 폐지를 강하게 주장하며 "민간신앙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으로 보며 탄압합니다. 결국 소격서는 폐지 되었고요. 성리학자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믿는다니, 말도 안 된다!" 라며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당은 아예 천민 취급을 받았고요.

 

 생각해보면, 종교의 베이스는 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샤머니즘"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기복신앙 혹은 비는 신앙의 형태가 되어가는, 이런 모습의 종교로 변해가기 쉽다는 거지요. 여전히 기복신앙의 정서는 남아있고, 깔려있는건지도 모릅니다. 어떤 종교가 처음 발생했던 외국에서 한국을 본다면, 어쩌면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모릅니다. 어라? 왜 한국의 종교는 전부 비는 신앙이 되었지? 비나이다, 비나이다, 새벽에 빌고, 108번 빌고, 무당에게 빌고... 종교의 "본질"이 비는 행위에 있는건, 당연히 아닐텐데 말이지요. 깨달음은 어디로 가고, 실천은 어디로 갔는지, 넓은 자비는 다 어디로 가고, 깊은 사랑은 다 어디로 갔는지...!

 

 끝으로, 풍수지리를 살펴봅시다. 풍수지리하면, 무엇보다 "한양천도"에 있어서 잘 활용되었고요. 또한 좋은 묘자리를 찾아서 집착했는데, 묘자리 분쟁인 "산송"에서도 많이 등장 하곤 합니다. 좋은 묘자리에 "매장"을 중시하는 풍습도, 명당을 찾고 차지하려는 마음도, 조선시대 풍수지리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오늘 문서는 여기에서 끝. 이제 다음 문서에서는 근세 문화사의 다른 이야기들로 계속됩니다~ (아래는 여담이니 패스하셔도 좋아요!)

 

 오늘의 영감을 두서없이 써봅니다. - 맹목적으로 달리기는 오히려 쉬우며, 생각하면서 방향성을 말하기란 어렵다는 점을 고민해 보면 좋겠네요. 종교계의 흔한 농담이 있는데, 자녀를 위하는 마음에 백일기도에 가는 사람을 붙잡고, 그렇게 비는 기도는 해봐야 별로 효과가 없을텐데, 효과가 있다면 오히려 불공평할텐데, 왜 그렇게 매달리냐고 물었더니,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해서..." 라는 놀라운 현실적 답변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뼈있는 농담에는 한가지 통찰이 들어있습니다.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하기 보다는, 기도라는 행위를 통해서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내 모습을 정당화" 시켜놓는게 얼마나 더 편안한 길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순간은 기도하는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정작 자녀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진심과 대화라는 점.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

 

 사람의 뇌는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전력질주를 하면서 복잡한 생각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두 자릿수 곱셈을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암산하는 것은 가능해도, 뛰면서는 그럴 여유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매순간 달리기만 한다면,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생각하는 모습을 상실해 버린채, 어느 순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라는 허무한 마음이 밀려오며 적잖게 당황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확보한 후, "충분히 편안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멈추고, 생각에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언제라도 좋습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원하던 삶은 무엇인지," 그 깊은 마음까지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을 잘 알아가는 시간을 가진다면 좋겠습니다. "이것 하나만큼은 내가 정말로 원하던 것인데, 이루었다니 이 얼마나 좋았던 삶인가" 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원하는 것"은 누가 정해주는 것도 아니며, 미디어가 유혹하는 거대한 부도 전혀 아닙니다.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며, 나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기쁨은, 각자의 몫이니까요.

 

 꿈이라는 것, 목표라는 것, 시시때때로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인식과 경험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10대 때의 꿈과 20대 때의 꿈과, 30대 때의 꿈이 전부 다르다는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아무런 목표도, 희망도, 꿈도 없다면서, 오늘을 낭비하는 태도야 말로, 위험을 알리는 적색 경보등이 아닐까요. 워런 버핏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험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데서 옵니다."

 

 적당히 안주하지 않고, 불확실한 상황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당연히 두려움이 들고, 불편함이 발생하며, 막막한 감정도 있을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하며, 도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격려해야 합니다.

 

 제가 그나마 공부방 시절에 "잘했던" 이야기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한 번은 시험의 점수가 안 나오고, 실망하더라도 괜찮아, 그래도 하고 싶은 일에 있어서는 실망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데까지 정말 열심히 해보렴,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서, 말만 하고, 정작 전혀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까 재밌게 열심히 사는게 정말 중요한거라고, 시험 점수에 기죽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고, 점검하면서 지내도록 해!"

 

 끝으로 최근 열독중인 하워드 교수의 이 질문이 너무 좋아서 함께 소개합니다. "삶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고 싶은가?" 이 질문에 관하여 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설령 완성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성장하고 발전하며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면, 인생 뭐 대충 살다가 가는거지 라고 어물쩍 넘기며 대답한다면, 10년 뒤의 삶 역시도 지금과 비슷하거나, 혹은 변화된 환경에도 안일함을 유지하다가 더욱 가혹한 삶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멈춰서서 고민하지 않는다면, 결국 오늘의 즐거움만 탐하다가 무의미한 하루만 반복될 겁니다. 그렇게만 살기에는 슬픈거 아니겠어요. 산다는건 훨씬 더 멋지고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힘들 때가 있겠지만, 힘든 순간만 계속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분명 좋은 날도 있으니, 꼭 힘냅시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