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조선후기 정치사 - 예송논쟁의 이해 2편

시북(허지수) 2013. 8. 7. 16:40

 지난 문서에서 계속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송 논쟁이라 함은, 예법과 관련된 논쟁인데요. 서인과 남인의 견해가 달랐습니다.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살아남은 두 당이 "공존의 토대"를 유지해 왔다면, 결정적인 두 차례의 예송 논쟁 이후로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싸움이 격해져 갔고, 급기야 나중에는 한 쪽이 독식하는 "일당 전제화"로 흘러가는 씁쓸한 모습으로 진행됩니다. 대체 예송 논쟁이 뭐였는가,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우선 1차 예송 논쟁부터 천천히 파악할까요. 인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어요. 첫째는, 소현세자이고, 둘째는, 봉림대군 입니다. 그리고 인조 시기에 조선 최대의 굴욕 중 하나인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게 대패하며 항복선언" 을 하잖아요. 왕자도 청나라로 끌려가고요. 이래저래 비참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꽤 흥미롭습니다.

 

 인조의 아들들 - 첫째인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확 바뀐 시대 흐름을 보고서 돌아옵니다. 문물을 받아들이고, 교류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반면, 둘째 봉림대군은 분노를 삭힐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오랑캐 출신들에게 우리가 당하다니 두고보자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이미 굴욕을 경험한) 아버지 인조는 누가 예뻐보였을까요? 당연히 봉림대군이 후계자로 보이고, 소현세자를 괘씸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한 발짝 떨어져서 다르게 접근해 본다면, 소현세자가 가진 현실적 안목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지만, 당시 왕실의 입장에서는 배은망덕한 왕자로 내몰리기 십상이었습니다. "뭬야? 어디서 친청이냐! 북벌론을 하지 못할 망정... 고이한 녀석"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일찍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아무래도 독살 등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그러면 왕위는요? 당연히 둘째 봉림대군 = 즉, 효종이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아 소현세자여, 왕자로 태어났건만, 목소리를 제대로 내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았으니 씁쓸하지요. 왕자가 항상 멋지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한편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는, 인조와 나이차가 많이 났습니다. 대략 30살 차이, 한마디로 인조에 비해 엄청 젊었었다는 건데요. 따라서 자연스레 새로 왕위를 이어받은 "효종"과는 나이가 비슷했습니다. 왕과 왕의 엄마가 나이가 비슷한 형태였지요. 효종의 입장에서야 자의대비는 계모 정도가 되겠고요. 여하튼, 효종이 자의대비보다 더 일찍 죽게 되면서, 논란이 일어납니다. 음, 그냥 쉽게 정리하자면, 왕인 효종이 죽었고, 친엄마는 아니지만, 형식상 왕의 엄마, 자의대비는 아직 살아있는 겁니다! 때는 17세기 현종 시기, 이 때 과연 자의대비는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할까요? 이것이 서인과 남인이 맞붙은 예송 논쟁의 출발입니다.

 

 서인이 볼 때는, 효종(=봉림대군)은 장자가 아니고, 둘째였잖아요. 그래서 1년만 상복을 입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남인은 아니 그래도 효종이 왕이었는데,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요. 사대부 예법을 따르지 말고, 자의대비가 상복은 3년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보통은 정답 없는 논쟁으로 이렇게 싸우면 힘이 센 편이 이길 때가 있잖아요. 당시 뒤를 이은 현종은 아직 어린데다가 서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1차 논쟁은 서인이 승리를 거둡니다.

 

 자? 그런데? 자의대비는 참 오래 사십니다. 이번에는 효종의 아내까지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또 예법 가지고 논쟁이 일어납니다. 2차 예송 논쟁의 출발입니다. 역시나 서인은 여전히 짧게! 9개월 정도면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그래선 곤란하다고 왕비의 예우를 하자고 1년은 상복을 입어달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현종의 선택이 재밌지요. 현종이 나이도 이제 좀 들었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자, 가만히 생각할수록 서인들 이야기가 기분 나빴던 겁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왕인데 왕 대우를 충분히 해줘야지, 자꾸 사대부 예법을 들고 나오는 서인들이 자꾸만 짜증났던 겁니다. 그에 비하면 왕을 높여주자고 주장하는 남인이 꽤 마음에 듭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최종 승리자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게 뭐에요? 예법? 상복 입는 걸로 저렇게 싸우고? 또 이거 가지고 정권이 바뀌다니, 이게 뭐에요? 하하, 물론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이 "예송 논쟁"은 당시의 명분과 이념 논쟁 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통이고, 우리가 맞는 길이야 라면서 목소리를 내던, 비중 있는 싸움이었지요.

 

 예를 들면 요즘도 우리 생각이 옳아, 너희들의 생각은 이 종X, 좌X 야 라면서 공격하기도 하잖아요, 또 반대로 우리의 가치가 소중한데 너희들은 이 수X, 꼴X... 라고 공격하기도 하고요.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우리가 맞다고" 박터치게 논쟁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치에서 "하나의 테마"를 정해서 이것으로 화제를 집중시키는 수법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걸 물타기 수법이라고도 하고요. 수십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반공"이라는 테마를 정하고, 이걸 안 따르면 "몰이"를 해버리는 수법이 잘 통하기도 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거의 학력고사 라인인 70년대 후반 태생까지만 해도 반공 글짓기, 반공 그림그리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럼 왜 예법 논쟁이 정권을 뒤엎을 만큼, 하필 그토록 크게 다뤄진 걸까요? 그것은 지난 몇 차례의 양란으로 성리학의 실체가 폭로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돌보고, 질서와 명분을 중시한다는 성리학이, 정작 왜란 때 지배층이 도망가고, 호란을 통해서 이번에도 박살나자, 사회 전반에 질서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회를 다시 조여나가기 위해서 "예법"이라는 무기 혹은 테마를 들고 나온 겁니다. 예를 논하고, 예를 지키는 지배층이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일종의 정치적 "예법 물타기" 랄까요.

 

 이를테면, 한국 전쟁 후에, 이승만 정부가 "반공"을 들고 나오면서, 국면전환을 크게 해버립니다. 전쟁이 주었던 충격파를 다른 데로 돌리면서 결집을 노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17세기에 일어났던, 예송 논쟁도 그런 성격이 있었음을 함께 읽어낼 수 있다면 좋겠네요. 여담으로, 남인들이 왕을 자꾸 높여주는 데에는 역시 이론적 배경도 있었습니다. 남인은 이황의 성학십도를 따랐는데, 거기에서는 "왕은 스스로 좋은 군주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높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지난 번 살펴 보았던 "왕과 대등한 신하를 추구했던 서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예송논쟁이 오고갈 때까지만 해도, 붕당이 서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비판도 해나가며, 그래도 공존의 모습이 있었는데... 저렇게 박터지게 싸우고, 논쟁에서 밀리면서, 정권도 뒤바뀌고, 이래저래 자꾸 불편하잖아요. 에라, 이 참에 권력을 잡게되면, 아예 우리끼리만 하자, 상대를 없애버리자는 욕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권력의 단맛을 추구하며, 17세기 후반 숙종 때 부터는 붕당의 변질, "일당 전제화"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각 당이 목숨 걸고 싸우는 환국 정치의 모습과 드디어 탕평론의 등장! 다음 문서에서 계속!

 

 오늘의 영감 - 우스갯 유머가 생각납니다. 꼬마 아이가 있었는데, 아침에 배가 고파져서, 몰래 냉장고에 들어있던 "먹지말라던 달콤한 음식"을 냉큼 집어먹어 버립니다. 그런데 엄마에게 딱 걸린 겁니다. 이 때, 아이의 변명이 기막힙니다. "아, 나한테 동생이 있었으면... (동생 탓을 했을텐데...)"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보다는, 시선을 다른데로 돌려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한편으로는 치졸하고, 한편으로는 참 뻔뻔합니다.

 

 바로 이러한 수법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정치공학"에 속지 않아야 하고, "정치구호"에 조심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 중에서는 "계산된" 것들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에게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는, 더 빨리 "남을 탓할 수 있는 꺼리"를 만드는데 정말 능숙합니다. 남을 탓하고 비난하고 있는 동안에는, 당장 나에게 오는 시선을 차단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남을 비난하기 바쁜 사람들 중에서는, 정작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컨대 타인의 외모를 엄청나게 신랄하게 뭐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각도 없는 사람도 있고요. 그런 사람을 우리는 "꼴불견" 또는 "너나 잘하세요" 라고 부르잖아요. 저는 개인도 그렇고, 정당도 그렇고, 자정능력을 갖추는게 중요하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최근 낙동강에는 설치된 "보"로 인해서 유속이 느려지고 녹조가 만연해 있는데, 결국 자꾸 욕망을 쓸데없이 갖다 박으니 강이 자정을 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는구나 싶었습니다.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품격, 반성할 줄 아는 태도, 그래서 계속해서 자정능력을 갖추어 나간다면,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정말 아끼는 녀석 하나가, 얼마전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최근, 엄청 후회한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그 쪽 길은 전혀 미련을 두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선택하고, 후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경험이라고 받아들이며 디딤돌로 삼는다면, 다음 선택에서는 보다 더 발전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없이, 선택도 없이, 회피하는 삶이 된다면, 계속 어딘가를 비난만 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용기를 내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있기를 늘 바랍니다. 무더운 여름, 오늘도 힘내시길 응원하며.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