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반,후반 ~ 18세기 초반, 숙종이 다스리던 시절을 "환국 정치" 라고 부릅니다. 정권이 몇 번씩이나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게다가 정권이 어느날 딱 바뀌면, 반대파에게는 집앞에 사약그릇이 친절하게(?) 배달되기도 합니니다. 치열한 정치싸움 때문에, 부작용도 심각했던 시절이지요. 처음에 정권을 잡았던 것은 남인 세력이었지만, 빼앗기고, 다시 뺏고, 하다가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쪽은 "서인"이었습니다. [환국 정쟁]을 거치며, 남인은 세력이 거의 몰락 해버렸고, 잘 알려진 장희빈(장옥정)도 남인쪽이었기 때문에 사약을 먹어야만 했지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마련이라서, 장희빈이 정말 독한 여자였을까 라는 것도 의문을 가져볼만 합니다. 승자 서인 세력이 써놓은게 진실은 아닐 수도 있을테니까요.
이제까지 조선의 붕당 현장을 우리가 여러번 목격했잖아요. 꼭 보면 승리 이후에, 파가 또 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동인당과 서인당이 갈라질 때도 그랬었고요. 마찬가지로, 승자가 된 서인 세력은, 이번에는 왕위계승, 남인처리 등을 놓고 시각이 달라서 또 한 번 갈라지게 됩니다. 온건한 소론은 경종을 밀었고, 강경한 노론은 영조쪽에 붙었습니다. 왕위는 경종이 물려받았지만, 정작 경종은 일찍 죽었고, 이후 통치는 영조가 하게 됩니다. 또한, 이렇게 해서 지배정당은 노론이 되었지요. 그리고 이제부터 중요한 탕평 정치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탕평은 숙종 때부터 등장은 합니다. 그런데 이 때의 탕평은 - 숙종이 각 당을 왕권강화책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각 정당이 서로 맞붙도록 유도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름만 탕평이지, 나중에는 아예 한 쪽 정당 (남인) 이 사라져 버리잖아요. 균형을 이룬다는 취지의 탕평이라면서, 그 최종 결과는 무슨 서인 몰빵이 되고 말았으니, 숙종의 탕평은 어딘지 이름 뿐이랄까요. 어쨌든, 눈뜨면 집앞에 사약그릇이 와있는 환국정쟁의 잔혹한 모습들, 이런 부작용은 이제 막아야 되겠죠? 영조와 정조의 개혁들, 이제 시작합니다. 나라를 바로 잡으려는 모습들을 보면서, 감동한다면? 아, 그러면 정말 좋지요! 시험에도 거의 필수이고, 정말 중요한 대목이니, 영조와 정조의 개혁 흐름을 천천히 음미해 보세요. 솔직히 앞까지는 거의 문서 2개가 넘게, 당끼리 논쟁하다가, 이제는 사약배달까지, 만날 싸우는 이야기 지겨웠잖아요. 하하.
영조는 왕권강화를 밀어붙이며, 본격적인 탕평책을 추진 합니다. "완론탕평" 이라고도 합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기본적으로 붕당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재도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들을 등용했고, 붕당색이 적은 관리들로 나라를 꾸려나갔습니다. 산림, 그러니까 배후에서 영향을 주는 선비들, 이를테면 뒤에서 배놔라 감놔라 하는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내친 김에 서원까지도 정리해 버립니다. 붕당의 세력 기반에 직격탄을 날리는 거지요. 그 뿐 아니라, 예전에 관료들이 모여 자기당끼리 추천하고 세습해먹던 "전랑"의 권한도 대폭 약화 시킵니다. 자연스레 왕의 힘은 더 세졌고, 붕당의 힘은 약해질 수 있었지요. 붕당끼리 설치면서 죽음의 사약놀이 하던 심각한 폐단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치고박고 쉴새없이 싸우던 정국이 드디어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개혁적인 시도도 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면에서는 균역법을 도입했는데, 1년에 1필만 납부하라며 농민들의 군역 부담을 덜어줍니다. 사회적으로도, 사형수 3심제를 도입하며, 억울한 죽음을 방지하려고 했고요. 자신의 개혁 정책을 법전으로 정리해, 속대전을 편찬했습니다. 참 많은 일을 했지요. 농민의 세금 부담을 확 줄인, 영조의 균역법 실시는 경제파트에서 또 만나볼 수 있을테고요, 음, 이래저래 조선의 중흥군주로 힘쓰면서, 스스로는 검소하게 살았던 군주가 영조였지요.
한편! 그런데, 붕당이 아예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조는 즉위시절부터 "노론"쪽에서 밀어주었는데다가, 탕평을 추구했음에도, 영조 후기로 가면 점점 노론쪽 경향으로 흘러가는 모습이었고요. 아무래도 친 노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한계가 있습니다. 당시, 노론과 소론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다가, 소론에 가까웠던 아들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똑똑한 아들 사도세자가 자꾸 아버지 영조에 비판적 의견을 내며, 소론을 보호하기도 하니까, 결국 노론에 의해서 사도세자는 제거됩니다. 훗날 사도세자의 아들인 - 정조가 극렬히 붕당 싸움을 혐오한 건 당연합니다.)
이제 정조의 정치를 살펴봅시다. 뜬 눈으로 책을 보며 밤을 새웠던 똑똑한 임금 정조. 왕권을 강화하고, 실력 있는 이들을 키워나가며,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힘을 쏟는 모습, 그리고 역설적인 부작용까지, 정조를 떠올려보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선 하나씩 천천히 살펴봅시다!
정조의 탕평은 - 준론탕평이라고도 합니다. 영조 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정조의 경우, 붕당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각 의견에 들어보고,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합니다. 예컨대 사안이 있으면, 논쟁을 해보라고 하고, 그 결론을 들어보는 거지요. 그래서 좋은 의견을 채택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당연히 이게 작동하려면, 첫째 왕이 똑똑해야 하고, 둘째 왕에게 힘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정조는 당시 기득권 세력인 노론과도 사이가 정말 나빴습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게 결국 노론 및 그들의 정치싸움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노론의 힘줄을 끊어놔야 했지요.
정조는 신해통공 을 실시하며, 기존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일종의 독점) 을 없애버리고, 이제 누구나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열어둡니다. 기존의 시전상인들은 아무래도 노론과 가까웠고, 배후에서 노론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는 성격이 있었으니, 노론 약화를 위해서라도 "신해통공 실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또한 노론이 지배하는 수도 한성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수원화성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최신 기술들이 투입되면서 거의 3년만에 완성되었고요. 한 때, 수도를 천도하는 계획도 있었다고 합니다.
즉위 때부터, 암살 위협을 받기도 했던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군권을 장악하고, 자신만을 위한 정예부대가 꼭 필요했으니까요. 가르치는 군주, 철인 군주 였던 정조는 규장각의 권한을 대폭 강화 했고, 초계 문신제를 시행하여 중 하급 관리라도 실력만 있다면,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덕분에 정약용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배출되기도 했고요. 정조는 법전 대전통편을 편찬하기도 했고요. 어쨌든 총명한 정조가 격무와 과로로 40대에 요절한 것은 이래저래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ㅠ_ㅠ...
정조가 한 일 중에, 양날의 검이 되었던 것은 - 지방 수령의 권한을 강화한 일입니다. 이제까지 향촌은 사림 및 양반들 입김이 셌고, 그러다보니 이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누르기 위해서, 왕의 명령을 따르는 수령에게 힘을 대폭 실어준 것이지요. 당장에 사림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붕당의 힘이 떨어졌고,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방에서 사또의 권한이 커지니까, 각 향촌의 노론 세력은 약화되겠지요?
자, 그런데, 역사에서도 그렇고, 최근에도 본 적이 있지만, "기득권의 반격" 이라는 게, 때로는 공포영화보다 더 서늘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뛰어난 임금인 정조가 죽고나자, 조선은 "세도 정치"로 흐르고 말았고, 심지어 정조가 정치를 잘해보겠다고 만들었던 개혁 및 강화 정책들이 오히려 뒷목 잡는 부작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문서가 조금 길어졌지만, 그 장면들까지 이번 문서에서 마저 살펴봅시다.
정조 사후, 세도 정치로 흘러가면서, 소수가문에 의한 통치가 시작됩니다. 이들은 비변사를 적극적으로 활용 했고요. 풍양 조씨 라든가, 안동 김씨 라든가, 이 세도 가문들은, 무슨 기준도 없습니다. 같은 성씨만 우리 편이고, 자기들끼리 다 해먹고, 정조 때 등용된 인재들은 퇴출되기 십상이었죠. 이제 왕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감을 가졌고, 반칙이 성행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으로, 권한과 힘이 세졌던 수령과 + 향리 집단이, 손을 맞잡고, 이 세도 가문과 결탁되어서 매관매직을 자행하는 참사로 변질 됩니다.
구체적으로 장면을 들어가 봅시다. 세도 가문에게 잘 보이며, 돈으로 일단 "수령"이라는 관직을 삽니다. 그리고선 그 지역에 가서는, 어떻게 했겠어요? 야, 이거 만큼 남는 장사가 어딨냐, 이제 본전을 찾아야지 하면서, 그야말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겁니다. 아 정말 열이 머리 끝까지 올라오는 장면이지요. 슬프게도, 이미 수령의 힘이 대폭 강화되었기 때문에, 누군가 횡포를 견제하고 막아줄, 힘있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도 양심 있는 양반이나 지방 세력들이 이런 "미친 짓"은 못하도록 힘을 썼을 테지만, 이제 정신 나간 미친XX들이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어도, 백성들은 하소연 할 데가 없습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수령의 부패쇼가 펼쳐지자, 기층민중에게는 고통이자 생지옥이었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드디어 민란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대규모 항거 운동도 일어납니다.
뭐, 이번 문서는 대략 여기까지 정리하도록 하지요. 다음 문서는 대외관계를 살펴보겠고요. 지금까지 재차 이미지를 요약해 보면, 붕당이라는 공존에서, 일당 전제화가 되었다가, 이제 아예 소수 가문이 통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권력이 한 곳에 쏠리니 많은 부작용이 발생 하는구나를 생각해 볼 수 있겠고요. 물론, 탕평책이 동원되고, 현명한 소수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일부 가문의 세도 정치로 흐르면, 살기가 예전보다 더 못해지는, 그야말로 역사가 거꾸로 가는 기분도 들고요. 결국, 시스템 자체가 튼튼하지 못하면, 소수의 총명함 만으로는 완성되지 못한다는 아주 씁쓸한 교훈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이후는 잡문이니 과감히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
오늘의 영감 - 소수가 특권을 독점하면 어떻게 될까요? 특권층이 낭비와 부패를 일삼으며, 국가 재정이 파탄나고, 민중에 대한 세금착취가 심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사례를 살펴보면, 프랑스에는 "짐이 곧 국가" 라는 절대주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소수가 화려하게 살아가던 시대라서, 힘없는 약자들은 요즘같은 여름 밤이면, 영주의 편안한 수면을 위해 밤새도록 개구리를 쫓아야 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루소는, 그래서 절대적 권력에 복종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력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루소는 민중들이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다시 노예가 되어버리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정치적 본질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정치가 민중을 "호구"로 보고, 평소 함부로 행동한다는 의미인데, 저는 요즘 시대까지도 간혹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대단히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과연 발전하는 걸까요? 오래도록 고민해보는 질문임에도, 저는 아직 긍정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소수의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하더라도, 오히려 그 뒤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역사적 사례들이 많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현명해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금권과 손잡고,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끔찍한 장면은, 이제 역사 속에서나 존재하는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여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날을 막대한 자본을 가진 몇 가문이 정치적 로비를 하며, 천문학적인 부를 쌓고 황제처럼 살았다 라고 쓰진 않을까 염려합니다.
루소는 "국민은 다른 사람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되고,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 된다" 라고 일갈했는데, 마치 오늘날은 자본을 위해서, 스펙을 한없이 그것도 스스로 비용을 들여서 쌓은 후, 어렵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정도로 열악해지고 가난해진게 아닌가 걱정도 합니다. 그 위에서 소수의 국민만이 인간을 샀다가 버렸다가를 반복하고 있다면, 이런 사회 역시도 "살기 힘든 모습", "자살이 만연한 모습" 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는데, 결국 지나친 힘의 불균형은 국가와 조직을 망쳐버릴 수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견제받지 않던 집단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걸 막아낼 힘 역시도, 행동하는 현명한 국민에게 달려 있겠지요. 정치가 잘못되면 살기가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길었던 잡문은 이만 줄입니다 :)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