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본 아이덴티티 (The Bourne Identity, 2002) 리뷰

시북(허지수) 2013. 8. 8. 23:51

 첩보 액션 영화로는, 본 시리즈가 멋지다 라는 의견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본 아이덴티티" 역시 굉장히 매력적인 전개를 자랑하는 걸작입니다. 정체를 잃어버린 남자,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여인이 만나서, 첩보기관에 맞선다는 설정이 흥미롭게 펼쳐지면서, 몇 가지 생각을 툭 던져주기도 합니다.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며, 2003년 북미 비디오 대여순위 1위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명작 첩보 영화, 본 아이덴티티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자, 우선 서론으로 가볍게,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우리는 얼마만큼 답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직업으로 답할 수 있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OO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겠고요. 혹자는 쿨하게 "나는 나지" 라고 짧게 말할 것 같기도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식으로 말하자면, 당신이 하고 있는 그것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음, 그렇게 보면 주인공 제이슨 본은 보통 사람은 아닌 듯 합니다. 하는 행동들이 어딘가 매우 날카롭고, 전문적이기 때문이지요. 제이슨 본?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영화는 기억을 잃은 젊은이, 총탄이 몸에 박힌 젊은이, 그리고 경찰 두 사람 정도는 가볍게 제압해 버리는 젊은이, 여권명 제이슨 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 본은 영화 내내 감시당하고, 추격당하고, 위험한 상황에 계속해서 노출되는데, 이를 통해서 본이 "확실히 중요한" 인물임을 파악하게 되고요. 또한 훈련된 개인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가를 실감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본의 운전기술은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른듯 보입니다. 하하.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벌써 11년전의 영화가 되었지만, 한 개인이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신상이 철저히 추적될 수 있음을 묘사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전직 CIA요원인 본이야 당연히 위치가 파악당할 수 있다지만, 일반인으로 등장하는 마리양까지도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파악되며, 주요 행동 장소가 지도에 나타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느 은행에서 돈을 인출했고, 어디서 카드를 사용했고, 어떻게 댓글을 달았는지 까지도, "누군가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요.

 

 아, 그런데 주인공 본은 스스로가 CIA 출신이다보니, 누구보다 조직의 행동양식을 잘 파악합니다. 지문을 철저하게 지우는 꼼꼼한 태도로 추격망을 따돌리고, 단번에 총이 어디쯤에 숨겨져 있을지도 알아챕니다. 과연 엄청난 예산으로 키워낸 전직 "정예 요원" 답습니다. 문제는 본이 스스로 누구였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예전에 총을 몇 발 맞은데다가, 임무 중에 겪었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본은 존재를 망각하고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정말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본을 키워낸 조직의 태도 입니다. 이제 본이 조직에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나니, 가차없이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비밀 조직이 들통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이 박살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다고는 해도,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풀기 보다는, 일단 입막음부터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정말 기묘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몰상식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본 아이덴티티는 시대를 앞서간 작품일까요? 하하.

 

 CIA의 조작질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뒤에서 움직이면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드는데 능숙합니다. 진실은 "그들이 끼워맞추는 모양" 대로 가공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서류상 본을 죽은 걸로 처리해버렸던 CIA 일당은, 진실을 끼워맞추기 위해서 이제 모든 전력을 동원해서 본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던가요. 계획대로 처리되기는 커녕, 무적의 본에게 불쌍한 대원들만 처참하게 당해서 돌아올 뿐입니다. 시종일관 멋지게 그려지는 본의 행동과 대사들이 맛있습니다. 특히 굉장한 현실 앞에서 멘탈이 거의 붕괴된, 마리양을 흔들어 대면서, 정신 차리고 일단 여기서 움직여야만 살아날 수 있다고 다그치는 모습은 너무 근사했네요.

 

 그렇게 보면 제이슨 본은 정말 인간적입니다. 냉혹한 암살자, 차가운 킬러라기보다는, 너무나 사람냄새나는 인물입니다. 거금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리에게 던져주는 쿨함도 가지고 있고요. 대체, 본에게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위험을 각오하고, 호텔을 탐방하기도 하고, 조직의 상부와 거의 정면으로 맞서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밝혀지는 본의 과거. 역시나 인간적입니다. 그는 애시당초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암살자"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르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계같은 사고방식은 훈련될 수 없음"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고요.

 

 영화는 마무리까지도 매력적으로 전개되면서, 기득권을 위해서 거의 죽을 힘을 다해 움직이던 CIA고위간부가 버려지는 장면을 서늘하게 그려냈습니다. 가장 높은 상부에서 봤을 때는, 결국 비밀 조직이란, 새롭게 그려놓은 "또 다른 시나리오대로만 진행되면 충분히 OK"였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제이슨 본은 새로운 정체성, "마리의 연인" 을 찾게 되었습니다. 최후에 본이 등장해, 마리에게 스쿠터나 좀 빌려달라고 유쾌하게 농을 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저절로 미소짓게 됩니다. 본이 찾은 두 번째 인생의 출발이 상쾌하게 펼쳐지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누구에게나 두 번째 인생을 누릴 자유가 있다 라고 표현한다면, 너무 느슨한 통찰일까요. 그런데, 저는 우리가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나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답변을 한 번쯤 생각해 보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영화 리뷰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고, 그런 피곤한 행위를 어떻게 꾸준히 하느냐 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몇 번 시도해봤다가, 스스로가 끈기와 재능이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 그러면 단순히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생각해보고, 영감을 떠올려보는 건 해볼만 하지 않을까?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써보는 거야 부담도 없지 않을까? 라는 소박한(?)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마구 쓰다보니 어느새 백여편의 영화 이야기를 즐겁게 써보고 있습니다. 결국 가치관이 살짝 바뀐 셈이지요. 그러므로 한 번씩, 여유를 가지고, "나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해보면, 가끔 색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하나를 잘 못할지라도, 또 다른 가능성은 분명 열려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마리는 극의 격렬한 중반부에서, "본과 함께 갈 것인지" 중요한 결단을 요구 받습니다. 돈을 가지고 어디론가 도망쳐서 살아가는 방법도 충분한 선택지였지만, 마리는 본과 함께하는 위험한 길을 "선택"했고, 곧이어 "변화를 받아들이며" 머리를 짧게 잘라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강한 인상을 받았는데요. 우리가 어제와 다른 선택을 한다면,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겸허함도 있어야 겠지요. 그 변화가 불편하고, 때로는 하기 싫더라도, 한 번 결정한 이후로, 끝까지 본을 신뢰하던 마리의 감정도 참 좋았습니다. 좀 더 편하고자, 쉬운 길로만, 가벼운 선택만 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면, 이왕 힘든 현실, 마리처럼 과감하게 부딪혀 보는 편이 더 빨리 터널을 벗어나는 길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본처럼 자신의 다른 정체성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모습, 마리처럼 인생의 후반을 다르게 펼쳐내는 모습, 그런 변화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끈덕지게 기득권만을 유지하려는 CIA 간부보다는, 얼마나 더 근사한가요! 꽃은 만개할 때가 절정이듯이, 우리의 인생도 더 멋진 "만개"를 위해서 좀 더 노력해 보고, 고민해 본다면, 좋겠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결코 세상의 평가기준으로 자신에게 낙인찍으며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길 재차 바라봅니다. / 2013. 08.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