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서에서는 조선 후기의 대외 관계를 살펴봅시다. 복습을 먼저 해본다면, 조선 전기의 대외 정책은 기본적으로 "사대 교린"으로 갑니다. 일종의 명분론이기도 한데, 큰나라인 명나라를 사대하고, 이웃나라 여진 및 일본과는 교류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교린이 뭔가 하니, 강경책과 온건책을 섞어쓰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여진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4군6진개척, 사민정책(이사장려), 토관제도를 도입했고요. 반면 온건책도 있었습니다. 무역소를 설치하고, 여진족 사신을 환영하고자 북평관도 운영했고요. 아궁, 복습이니까 이 부분, 더 자세한 건 조선 전기 대외 관계 문서를 참고하세요. 하하.
일본에 대해서는 조선 초반에 강경책이 있었습니다. 세종 때, 쓰시마섬 정벌에 나섰고요. 또한, 온건책으로는 3포를 개항하고 무역을 하기도 합니다. 뭐, 그럭저럭 15세기까지는 이렇게 흘러갔는데요. 16세기부터 일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서히 갈등이 커져나갔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더 많은 교류를 요청하고, 조선이 거절하고, 이런 갈등은 3포 왜란, 을묘 왜변으로 표출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격변의 임진왜란까지 일어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여진의 경우, 점차 성장해 나가더니, 나라 이름을 후금으로 정하고 강성해 집니다. 후금은 나중에 명나라를 정복하며, 거대한 땅을 지배! 청나라로 탈바꿈 하고요. 이 무렵, 후금 vs 명나라 의 갈등 속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대목을 체크해 둡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 및 강홍립의 (후금) 투항사건은 문제로 자주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또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노선은 기존 조선의 "명분론"과는 맞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 하고요. 명분론으로 들어가보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를 도와줬으므로, 당연히 우리도 명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과감하게도 명분론 대신, 중립 외교 + 실리 노선을 걸었으니, 신하들이 말이 많았겠지요.
광해군은,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통해서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서인정권은 명분론을 참 좋아하는데요. 거의 친명! 배금! 노래를 부르는 정도 입니다. 국제 정세를 치열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 1636년 커다란 일이 일어나지요.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조선에 쳐들어 오면서, 병자호란이 발발. 조선은 항복을 선언하고,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는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고 맙니다. 뭐, 왕자들도 줄줄이 끌려가고 말이지요.
조선은 굴욕을 맛보고, 이후 "북벌론"이 등장합니다. 이 북쪽의 오랑캐들을 치자는 건데, 명분도 딱 좋습니다. 효종과 숙종 때, 특히 북벌론은 힘을 얻었고요. 송시열이나 윤휴 같은 인물이 대표적입니다. 사실 북벌론은 그 명분만 그럴싸하고, 실제로는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북벌을 과감하게(?) 시도한 적도 없었고요. 그러므로, 북벌론의 밑바탕에는,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정치적 결속을 유지하려는 측면"도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결사항전 전쟁모드!"라고 구호를 내걸면, 당장 기득권으로 올라오는 내부적 불만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즉 (성리학의 질서가 흔들리며) 내부의 모순이라는 시선을, 외부로 돌려버리는 전형적인 정치공학 이랄까요. 따라서 지배층 입장에서는 "북벌"을 내세우면 일거 양득이었습니다. 민중들을 아우를 수 있지요, 군비를 증가시킬 수 있지요, 그럼으로서 강한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게 가능할테니까요.
그런데, 정작 실제로 청나라에 건너갔다온 사람들은 굉장히 놀랐습니다. 자체적인 문화도 있었고, 이제 서양의 문화까지 들어와서 "없는 게 없는 청나라" - 굉장히 발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분과는 맞지 않더라도) 이제 우리도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오고, 받아들이자는 "북학운동"도 있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이 대표적이겠고요. 뭐, 북학운동에 대해서는 이후 문서에서도 또 다루게 될테니, 지금은, 북학운동도 있었으며, 나중에 개화파로도 연결되는 모습이 있다, 정도만 체크하고 넘어갑니다.
아,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 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숙종 때, 청나라와 조선이 영토분쟁이 붙어서,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졌습니다. 나라의 경계선을 정했다는 건데요, 거기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 이라고 써있습니다. 문제는 서쪽이 압록강이라는 건 확실한데, 토문이 어디냐 라는게 나중에 논란이 되었습니다. 토문? 청나라는 그거 두만강이라고 주장했고, 조선은 토문강이 저 위쪽에 있다며 백두산 북동쪽의 간도지역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계속되었고, 나중에 대한제국 시기에는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하면서, 적극적으로 간도관리에 나서려고 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안타까운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근.현대까지도 이어지는데) 20세기 초, 을사조약으로 우리가 외교권을 빼앗기는 참사를 맞이했고, 결국 간도는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이 협상함으로써 정리되어버립니다. 이른바 간도협약을 통해서, 간도는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일본은 대신에 안봉선 철도부설권을 가져갔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이권을 나눠먹어 버린겁니다. (생각해보면, 을사조약 자체가 불법이므로, 간도협약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는 상황이고요.) 여하튼, 숙종 때 정해진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지금까지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인지한다면 좋겠습니다. 토문이 지문에 딱 나오면, 숙종-백두산정계비-훗날 간도다툼, 바로 이런 내용들을 유추할 수 있다면 좋겠지요.
한편, 왜란을 겪은 이후 - 일본과의 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습니다. 지난 날 왜란으로 국교가 끊기자 일본은 교류가 이루어지 않아, 경제적 곤란함을 겪게 되었고, 지속적으로 조선과의 교류를 요청 합니다. 정복자 도요토미와는 달리, 새롭게 집권한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 적대가 아니라, 앞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고요.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과의 재교류에 관해 논란이 있었으나, 비교적 일본과 유화적이었고, 실리를 중시하는 광해군이 17세기에 기유약조를 체결하면서, 단절되었던 관계가 다시 정상화 되기 시작합니다. 이 무렵, 왜란 시기에 일본으로 끌려갔던 포로 수천명도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요.
도쿠가와 막부는 더 적극적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통신사를 우리에게 파견해서, 우리의 정권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건데, 조선에서도 거기에 화답하며 이후, 12회에 걸쳐서 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에서도 통신사에 대해서는 정중히 대우하며 국빈으로 맞이했고요. 조선 통신사는 유명해서, 당시 관람하려고 일본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고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원조 한류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한양에서 에도(도쿄)까지 왕복하는데 대략 8개월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사람들은 일종의 문화 축제를 즐긴 셈입니다. 일본 막부로서는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자신들의 권위(및 정당성)를 올린다는 이점도 있었고, 당시 통신사의 행렬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통신사를 "지나치게 우리 문화의 우월성" 시각으로만 접근한다면 조금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조선 역시도 과거 명으로 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명나라에 조공사를 파견하기도 했으니까요. 즉 선진문물은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겠지요. 일반적으로 문화는 높은 쪽에서 낮은 쪽으로 전파되어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덧붙여, 훗날 근대 개항 이후 고종 시절, "수신사"라고 등장하는데, 이 수신사는 통신사와는 개념이 완전 다릅니다. 수신사는 반대로 일본의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이는 입장 에 가깝습니다. 간혹 통신사와 수신사를 비교하는 문제가 등장하므로 함께 체크해 둡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안용복" 입니다! 들어본 분도 있겠지요. 바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일본에 건너가서, 확인을 받아온 인물 입니다. 숙종 시절이었는데요, 한 가지 여담으로, 안용복은 조선의 관리가 아니라 일반 어부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의 관리라고 거의 사칭해서, 인정을 받아온 것이지요. 때문에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한 때 관리사칭죄로 사형처리까지 논의되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지금에 와서는, 한 어부의 용감함 도일 행위로 인해, 독도 분쟁에서 역사적 근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일본 측에서는 여전히 안용복의 진술을 신용하지 않으며, 말이 잘 안 맞는다고 우기고 있으나, 하나씩 논거를 따져들어가면, 실제로 안영복이 일본에 갔고, 울릉도 독도가 조선령이라고 받아온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또한 18세기 일본 학자가 그린 "삼국접양지도" 에서도 역시 독도를 조선 지역으로 표시하고 있고요.
정작 독도문제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 지역이 강제로 일본쪽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 을 겪습니다. 말하자면, 일본에 의해 1910년 강제 합병 되기 앞서, 우리가 독도부터 잃어버렸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독도는 우리 주권회복의 상징이며, 다케시마라고 우기는 일본측 주장은 제국주의 때의 점령지식 발상, 과거 식민지 영토권 주장과 별반 다른게 없습니다.
여하튼 영토분쟁 - 백두산정계비 (간도), 울릉도 및 독도 이야기는 조선 후기, 숙종 때 부터 그 발단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네요. 이렇게 보니 역사란, 과거의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문제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제 다음 문서는 조선 후기 경제파트로 넘어갑니다. (아래부터는 개인적인 잡문이자 생각이니, 그냥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오늘의 영감 - "가깝고도 먼 나라" 이 일곱 글자를 생각하면, 일본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까지는 불과 200km, 배로도 3시간이면 갈 정도로 가깝습니다. (비행기로는 30분이면 벌써 해외지요)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400km가 넘잖아요. 또한 한국과 일본은 함께 월드컵을 개최할 만큼 가깝기도 했다가, 독도나 위안부 문제에서 보여주는 작태로 아주 밉상으로 보이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2008년 유엔에서까지 위안부 문제 책임을 인정하라고 권고했지만, 정신줄 놓은 일본 우익 인사들은 위안부를 부정하는 망언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 지방의회에서 "위안부 망언을 중단하라"며, "일본 정부가 성실히 나서야 한다"고 의미 있는 주장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결국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에 눈 먼 일부 정치인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들도 들었고요. 말하자면, 침략을 일으킨 도요토미 같은 제국주의자들이 문제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방송인 사유리 처럼 일본 사람임에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수천만원의 성금을 전달하는 걸 보면서, 지나친 일반화 (가령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에 대한 마구잡이식 비난) 는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국적이나, 소속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 가 아닐까 싶고요.
욕망으로 가득차서, 나만 잘살자, 우리만 잘살자 라는 생각만 가득들어찬 인간이라면,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가 무슨 나라 사람이든, "인간으로서 실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반면에, 타인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고, 입장을 배려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인간다움"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폐혜"들이 바로 잡아질 수 있겠다는 희망도 들었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