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글이 넘실대는 정혜윤 작가님의 책 한 권을 리뷰해 봅니다. 과감히 에필로그의 한 대목을 천천히 음미해 볼까요.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 그건 역사가의 꿈, 수집가의 꿈, 혁명을 원하는 자의 꿈, 진보를 믿는 자의 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자의 진정한 꿈이다. 그리고 언젠가 사랑을 잃어본 적이 있는 자의 꿈이다."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에 이토록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니, 참 즐겁고도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제 블로그가 전반적으로 오래된 것, 이미 지나간 것을 테마로 하고 있는 편이라서, 더욱 와닿았습니다.
저는 한참 고민에 잠기게 되었는데, 과연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경우 - 스스로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오래된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며 - 세련된 돌직구를 던지는데, 여튼 벤야민의 경우 오래된 것을 흡수하고, 먹어치움으로서,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답은 찾지 못한채, 다만 한 가지 힌트는 얻었는데, 낡은 것 조차도 사실은 거기에서 "얼마든지 진보의 영감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요.
저자 : 정혜윤 / 출판사 : 푸른숲
출간 : 2008년 07월 07일 / 가격 : 12,000원 / 페이지 : 323쪽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정신 승리법(!)도 좋은 위안이 되었는데요. "남이 나를 비난하거나 내가 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마다 나는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사랑하는 나의 정신에 의지하자." 부끄러움으로 휘청대거나, 자신감이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을 때, 형편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자괴감이 끈질기게 밀려올 때, 우리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자신"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나도 좋았던 면이 있지, 라고 긍정성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인데, 이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과 같은, 마크 트웨인의 표현은 꽤 깊숙하게 인간의 비밀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이 가진 15가지 재능으로 칭찬받기보다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한 가지 재능으로 유명해지기를 원한다." 상당히 놀라울 정도인데,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 보다는, 못난 점을 주시하고 괴로워 할 때가 많습니다. 하기야 타인과의 비교가 일상화 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삶이 표준이 되어가면서, 우리의 모습이 더 팍팍해지고, 더 우울해져가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도, 꽃들이 강물처럼 바다에 이르려 하지는 않잖아요. 꽃은 피어나고 저물어가면서 그 존재로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우리가 재능 밖의 영역까지도 계속해서 탐하려는 마음을 한웅큼 덜어낸다면, 삶은 한결 부드럽게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연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보는데도, 여전히 살아가는건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끔은 인생의 대부분을 "돈버는 기계"처럼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겠지요. 저는 책에 소개된, 김승회 시인의 한 줄을 또렷히 바라보며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왜 늘 벼랑이 있고, 벼랑에서 추는 춤만이 왜 홀로 아름다움의 갈기를 가졌는가를......"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 같은 인생일지라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출발하자마자, 어려움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계속해서 움직여 나간다면, 그 모습 자체가 "미" 라고 부를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한없이 주저앉아서 자꾸자꾸 마음 아파 하다가도, 그래도 다음 벼랑을 바라보며 움직여 보려는 그 끈질긴 의지야 말로, 저는 "번뜩이는 아름다움"의 한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종속되지 않는 우아한 자유" 이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저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카프카 식으로는,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는 거지요. 얼어붙어서, 점점 고정되어가는 삶의 모습을 깨부수는 힘이, 책에 담겨 있고, 글에 담겨 있고, 대화에 담겨 있는 셈입니다. 저자 정혜윤샘의 표현을 빌리면, - 2층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가능성과 실재 사이의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 입니다. 즉, 우리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힘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그런 것 같습니다. 꿈을 이루는 삶의 형태는 늘 곁에 있지만, 그 도끼를 집어들지 않습니다. 차라리 얼어붙은 마음으로 가만히 있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게, 무미건조한 삶을 "선택"하고 있는건 아닌지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열적인 삶은 무엇일까요? 저는 책에서 이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 대단히 기뻤습니다 "사람들이 정열이라 부르는 것은 영혼의 힘이 아니라 영혼과 외부 세계와의 마찰이다"
바깥과 부딪히는 태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삶을 생생함으로 물들여나가는 열쇠가 아닐까 싶어요. "이걸 해볼께요, 이번에는 이렇게, 그 다음에는 또 다르게..." 계속해서 외부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앞으로 가고 있으면, 한 번 뿐인 인생이 훨씬 의미있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매력 없는 시간 보내기를 멈추고, 당장 도끼를 들어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생각부터 하라는 말을 한다면, 너무 과격한가요? 하하. 지은이가 미상인 조선 후기 추정의 "완월회맹연"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무려 180권, 그리고 세월이 흘러 현대에 그 고전소설을 읽어내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집어치우는게 좋지 않을까 라고 스스로 한계를 그어버리지만, 혹자는 그저 180권 짜리 책을 썼고, 또 누군가는 그 책을 또 읽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적당한 눈으로 계산부터 내리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에서 조차 똑같은 계산의 기준점을 내밀며, 애써 외면하고 있는게 아닌가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매일이 똑같지, 라면서 말이에요.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잠겨, 거의 익사하기 직전인 상황에서는, 삶의 의미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리뷰를 마쳐야 겠네요. 저는 매일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메모를 붙여놓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다양하고 색다른 생각에 감탄하고, 오늘에 환희한다면 얼마나 멋질까 라고 상상해 본적이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떨어진 빵 조각 같은 것도 다 정성껏 주워 먹곤 한다. 그러는 것은 결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어느 것 하나도 낭비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다."
어느새 거만해져서,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나를 즐겁게 해줘봐, 나를 만족시켜봐" 라면서 지루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혹여 나의 모습이라면, 우리의 모습이라면, 저는 오늘 여기에다가 도끼를 찍어버리면 좋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을 꿈꾸며, 세계와 마찰하는 용기 있는 인생, 그렇게 살아간다면 아주 작은 일에서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두 번째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 2013. 08.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