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이앙법의 일반화 및 근대화의 가능성 1편

시북(허지수) 2013. 8. 20. 18:09

 이번 문서에서는 조선 후기 경제와 사회 현상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근대화가 된다는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제는 자본주의, 사회는 신분 평등사회로 진입해 나간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를 유심히 들여다 볼수록, 이른바 자본주의의 가능성, 근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건 지난 수십년간 사학계에서 조선 후기의 경제사를 대단히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식민사관 - 일본이 정체된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 - 라는 논리를 깨부수기 위해서, 많은 연구자들이 노력한 결과이지요. 그러므로, 이번 문서부터 굉장히 흥미롭고 재밌을 겁니다. 네, 또 머리 아픈 경제 이야기가 재밌다고 강요하는 듯 한데... 여하튼 출발하지요. 하하.

 

 음,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복잡해진다는 게 인류 역사의 교훈 아니겠어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계급사회의 출현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청동기", 왜 계급사회가 나타났나요. 남는 잉여물이 생기고, 많이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잖아요. 다시 말해, 잉여물이 증가하면 모두의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대신, 오히려 갈등과 투쟁이 심화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생산력이 증가했다는 게, 어쩌면 모두에게 달콤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라는 통찰이 매력적이지요. 이제는 21세기 하고도 10년이나 훌쩍 더 지났는데, 앞으로는 사회가 부를 많이 가질수록, 더 평화롭고 더 평등해지는 놀라운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고요.

 

 조선 후기에는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 늘어나는데, 이로 인해 각종 문제점들과 변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즉, 생산력의 발달만으로도 사회는 많이 변화되는구나 라고 접근해 들어간다면 재밌을 것 같아요. (생산력이라는 것을 - 유물론적 관점인 "물질이 결국 사회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보기는 조금 곤란할 수 있더라도, 일정 부분은 사회에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는건 분명한 것 같고요. 다르게 써본다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표현했는데,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생산력의 발달로 인해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게 되고, 자연스럽게 생각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아 복잡한가요. 쉽게 말해 경제 발달 → 사회 변화가 찾아온다 입니다. 쉽죠? 하하.)

 

 자 그렇다면, 생산력의 발달은? 계속해서, 쉽게 쉽게 생각합시다. 내가 농사를 짓는데, 그 결과물이 잔뜩 늘어났다는거에요. 어머 좋아라~♡ 생각만 해도 좋은 일이네요. 그 원인은, 농기구의 발달, 비료기술의 발달, 농법의 발달 등이 있겠네요. 그러면 농사에 대해서 천천히 살펴볼께요. 밭농사부터 말이에요.

 

 조선 전기의 밭농사는, 2년 3작이 일반화 되었고, 자급자족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각종 작물들을 재배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 점점 "상품작물의 재배가 활성화" 됩니다. 상당히 커다란 변화지요. 이제 담배나 야채류 등 돈이 되는 걸 재배하고, 상품화 시켜서 내다 팔기 위한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농작물의 매매가 지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논농사를 보면, 일단 조선 전기의 농법은 직파법이 일반화 되고 있었어요. 직파법은 그 뜻 그대로, 씨앗을 뿌릴 때 논에 직접 휙휙 뿌려대는 방법입니다. 위험부담이 없고 무난한 농사법이지요. 물론, 고려말부터 내려온 신기술 이앙법은 여전히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시행되고 있었고요. 그러면, 왜 보다 생산량이 좋았던 "이앙법"을 정부에서 장려하지 않았을까요? 이앙법은 위험부담이 커서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즉 이앙법은 생산력 증가와 위험도 증가라는 양날의 검이랄까요. 생산력 잡으려다가, 사람 잡는 이앙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참, 이앙법은 모판에다가 미리 키워놓았다가, 봄이 되면 모판에 있던걸 옮겨 심는 기술입니다.

 

 이렇게 옮겨 심으려면 특히 물이 중요합니다. 물공급이 원활해야 제대로 옮겨 심을 수 있어요. 그런데, 이앙법 시도하다가 만약 5월에 가뭄이 들어버린다면? 그러면 그야말로 "농사 멘붕!!! 이앙법 흑흑!!!" 한 해 농사 완전 망하고, 끝장나는 겁니다. 이러니 정부에서는 차라리 안전한 직파법이 낫겠다 싶었지요. 여기까지가 조선 전기의 풍경이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놀랍게도 이앙법이 일반화 됩니다. 저수지 기술도 발달하고, 여러 가지 농업 기술이 도입되다보니, "농사의 자신감"이 붙은 겁니다. 이렇게 이앙법이 일반화 되면서, 이제는 쌀과 보리를 함께 왔다갔다 하면서 재배하는, "이모작이 가능"해 집니다. 가령 겨울에는 보리를 키워서 5월에 추수를 하고요. (쌀은 4월에 미리 모판에 따로 키워놓았다가~) 5월이 오면, 보리를 싹 추수한 다음에, 거기다가 이앙법으로 쌀을 옮겨 심는 겁니다.

 

 아, 이모작 너무 좋은데요. 생산량이 이로써 듬뿍 올라갑니다. 게다가 고맙게도 보리는 소작료 수취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즉 지주에게 지대를 낼 때, 쌀에 관해서만 지대를 지불하고, 보리는 그냥 농사 지은 사람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겁니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야말로 조선 시대의 건강성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지주 양반들이 볼 때, 농사에 있어 "보리까지는 손대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사실 조선 시대는 환국이니, 세도니, 정치면이 우중충 하다보니 부정적으로 바라볼 때가 참 많은데요. 그런데, 경제면에 있어서는 정책도 그렇고, 나름대로 못 사는 사람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농민들이 숨쉴 여유를 어느정도 배려해 줄 수 있었기에, 500년을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성리학도 기본적으로 화려함과 사치보다는 "검약"을 중시하고요. (여담으로, 어릴 때 하던 쌀보리쌀쌀보리 하던 놀이가 생각납니다. 이건 쌀,보리,쌀,보리 하면서 주먹을 내밀었다 뺐다 하는 놀이였는데, 보리 때는 잡으면 안 되는 겁니다! 쌀만 잡는다는 거!!! 수취대상에서도 보리는 안 잡힌다는 거!!!)

 

 이앙법은 효과가 좋았습니다. 과거 직파법으로 막 뿌릴 때는, 잡초제거가 참 큰일이고, 힘들었습니다. 잡초(피)와 벼가 참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지요. 여기저기 잡초가 같이 자라다보니, 이걸 제거하려면 아무래도 노동력 부담이 큽니다. 그런데 이앙법 같은 경우, 아까 살펴본 것처럼, 옮겨심는거잖아요. 일렬로 딱딱 자로 잰듯이 정확하게 심어놓기 때문에, 정해진 선 밖에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잡초들은 그야말로 쓱쓱 없애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앙법으로 인해, 생산력이 증가하고, 노동력까지 절감되는, 일석이조의 대단한 효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앙법이 널리 확산되면서, 사회적 영향도 상당했는데요. 문서가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여기에서 잠시 끊고, 다음 이야기에서 이앙법 후편 계속할께요 :) 한 번 미리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과연 생산력이 증가하고, 노동력이 절감되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 후에 일어날 일은 어떤걸까요. 하하, 당연히 부자가 된 사람도 있고요, 한편 곤란해진 사람도 있고요, 여하튼 경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b 아래부터 여담이니 패스하셔도 좋습니다!

 

 오늘의 잠깐 영감 -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이라는게 있었습니다. 기술이 계속 발달하자, 점점 자신의 생계가 곤란해질 수 있음을 느끼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기계를 파괴하는 등 투쟁을 이어나갔던 운동입니다. 늘 그렇듯이 생산력이 발달해도, 여전히 가난하다면 무엇인가 "잘못"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표현대로 "폭동은 가난 때문에 생긴다"는 거지요.

 

 러다이트 운동의 뒷배경에는 "일을 해도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정부까지도 자본가와 결탁해서 "단체 협상"을 못하게 막고 있었으니, 그들은 결국 파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렇게 볼 때, 근대 사회가 된다는 것은, "협상 가능성"이 얼마만큼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협상도 못하고, 가난에 시달리다가, 병들어 죽는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생산력의 발달을 주시함과 동시에, 얼마만큼 그 몫이 균형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이 점도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일을 해도 먹고 살기 조차 괴로웠다는게 19세기 초 영국만의 이야기 일까요? 그 이후로는요?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는, 20세기 중반 남미를 여행했던 체 게바라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칠레의 어느 광산에서 하루치 빵을 벌기 위해 위험한 채굴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지요. 추운 날, 담요 한 장 없이 부둥켜 안고 자는 어느 노동자 부부... 이것이 그가 만났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21세기의 미국 한복판. 2011년 포드재단 등에 따르면, 열심히 일을 해도 생활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워킹 푸어"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나 발전해 왔지만, 아직 먹고 사는 문제는 "현재 진행중 혹은 더욱 심각해 지는 중" 인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한국도 예외는 아니지요. 1700만 노동자 가운데 거의 절반이 비정규직인 사회. 그래서 서로 살아가야 하는 세계조차 다른, "격차 사회"로 굳어져 버린다면, 그 끝은 아마 유행하는 영화 설국열차 처럼 "항의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어갑니다. 퇴출된 노동자가 갈 곳이 없어진다면, 상황은 점점 비극이 될 수 밖에 없잖아요. 근대화로 접어들면, 신분관계가 사라지고, 계약관계가 등장하는데, 이제 시간이 한참 흘러 이 계약관계가 변질되며, 새로운 신분관계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는건 아닌가 때로 걱정됩니다.

 

 예컨대, 내가 시키는대로만 열심히 일해, 내가 돈 주는 사람이니까, 이러면 이건 평등한 계약관계가 아니라, 거의 주종관계니까요. 개인적 생각을 조금 펼쳐봤는데, 21세기는 격차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생산력이 증가함으로서, 우리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더 멋진 미래의 모습이 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생산력 발달이 계속해서 더 심화된 갈등과 투쟁만을 낳게 되지 않을까요.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이 먹고 살지 못하면, 정말 거기에는 "창조니 뭐니" 그럴싸한 이야기조차 의미가 사라지며 말장난이 되고 맙니다.

 

 오래된 책 사마천의 사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며 오늘 문서 줄입니다. 장문 죄송했습니다 ^^ "무릇 사람들은 자기보다 열 배 부자에 대해서는 헐뜯지만, 백 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의 일을 해주고, 만 배가 되면 그의 노예가 된다" 격차사회는 불안과 두려움의 사회, 나아가 노예와 주인의 사회의 다른 말이 아닐까, 그런 아픈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