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끝나지 않은 삶 (An Unfinished Life, 2005) 리뷰

시북(허지수) 2013. 9. 26. 19:51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작 영화, 끝나지 않은 삶에 관하여 고찰형 리뷰에 도전해 봅니다. 살아가다보면 견디기 어려울만큼 힘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류머티즘으로 인해 양쪽 발목 부위를 절개하는 수술을 했었습니다. 굉장히 어릴 때라 잘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아흔에 가까운 할머니께선, 그 때의 장면들을 수십년이 지났어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입장에서는, 손자의 고통을 바라보는 행위가 인생에서 견디기 어려웠던 부조리한 순간이었다고 회상되겠지요.

 

 아주 힘겨웠던 순간은 그렇게 강하게 기억 속에 자리 잡아서,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저는 할머니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기에, 그 따뜻한 마음만큼은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화 끝나지 않은 삶은, 이처럼 인생에서 정말 괴로운 경험을 가슴에 품고서도, 계속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크게 다치고, 또 사랑했던 남편을 잃기도 하고,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버린 영혼은 과연 다시 일어날 희망이 있는가, 희망의 등불이 이미 꺼져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라는 아주 무거운 질문 앞에서, 영화는 차분히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은 인생을 망가뜨리지 말자. 다시 한 번 살아가자." 이제, 그 빛나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주인공격인 할아버지 에이나는, 십년 전의 행복한 시절을 그리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삶은 참 속상하기만 합니다. 너무나 아꼈던 아들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몇십년을 함께 해왔던 동료인 밋치는 심하게 다쳐서 제대로 걷기조차 힘이 듭니다. 인생의 좋았던 순간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지고, 그저 소박하게 시골 구석에서 여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탓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며느리 때문에 우리 아들이 그렇게 되고 말았어, 나 때문에 밋치가 저렇게 되고 말았어." 그런데, 가끔 그 누구의 탓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비난을 멈추는 것, 거기서부터 가능성은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모건 프리먼이 열연한, 밋치의 경우, 야생 곰에 의해서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밋치는 자신에게 커다란 해를 입힌 야생곰의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곰은 단지 자신의 본능을 따랐을 뿐" 이라며, 누군가의 탓을 하지 않습니다. 자책도 하지 않으며, 당시 곁에 있었던 동료 에이나를 전혀 탓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픈 생활이 아주 불편하긴 해도, 책을 읽고, 상상을 해보며,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에이나의 표현대로, 거의 종교인 같기도 해서, 살짝 경외감이 들기도 했고요.

 

 밋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사로잡힌 곰을 만나보고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이 녀석은 나를 해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라고, 마침내 오랜 친구 에이나에게 당부하지요. "저 곰을 다시 야생으로 풀어주게나." 정작, 에이나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입니다. 저 곰탱이를 총으로 쏴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다시 놓아주라니...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영화의 압권은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에이나가 마음을 열고, 손녀와 며느리까지 받아들이는 대목입니다. 특히 자칭 카우걸이 되고 싶은, 귀여운 11살 손녀딸에게 각종 생활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대목은 굉장한 청량감이 있습니다. 에이나는 그동안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의 소중한 것이 깨져버린다면, 그것은 절대로 쉽게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 접시 하나 깨진 것에도, 상대를 쏘아붙이며 화를 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고집스러운 생각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소중한 것이 사라져서, 그 공허함을 달랠 길이 없어 보이겠지만, 또 다른 문이 열릴 수도 있다는 걸 마침내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에이나와 손녀는 새로운 콤비가 되어갑니다. 눈물날만큼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이지요.

 

 여기서 시점을 달리해 본다면, 무려 11살에 운전을 체득한 이 꼬마 카우걸은, 아주 위기의 순간에서도 할아버지를 재치 있게 구해내고, 도로를 달리고 달려서, 에이나를 구해냅니다. 두 사람간에는 수십 년이라는 세월의 장벽이 있겠지만, 그게 중요한 걸까요? 아닙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서로의 진심과 얼마나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에이나는 손녀에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르쳐 주었고, 반대로 손녀의 존재로 인해 에이나는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한 사람의 만남으로 인해, 훨씬 더 삶이 풍요로워진 것입니다. 이 점이 저는 너무너무 좋습니다. 캄캄한 인생길에서도, 혹은 추락해버린 삶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화는 새로운 네 명의 식구가 가족처럼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밝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끈끈한 공동체는, 악동으로 끈질기게 등장하고 있는 삐딱한 게리를 완전히 내쫓아 버리는데요. 앞으로는, 눈물과 침묵 대신에, 웃음과 여유로 살아갈 수 있음을 흐뭇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밋치는 그 평화를 만끽하며, 절묘하게 대사를 툭 던집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네..." 그리고, 이 이유야 말로 불행 앞에서도, 열심히 살아갈 대단한 힘을 선물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불행 뒤편에는 반짝이는 무지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쉽게 실망해서도, 좌절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인생 길이라는 게, 허무하고 속상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나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정작 나아지는 형편은 없고, 간혹 믿었던 인간에게 배신 당하기도 하고, 내 모습이 왜 이렇게 초라하기만 할까, 심지어 왜 그 때 바보 같은 선택을 했던걸까 라고 답도 없는 후회를 해보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해보는 힘있는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지금부터 펼쳐지는 삶의 모습들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손녀와 에이나가 얼마나 더 즐거운 순간을 많이 만들어 나갈까요. 또한 며느리 진 양 역시도, 새로운 이웃과 함께 돈을 벌고, 다시 출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있음을 놀라워 할 때가 있습니다. 참 좋은 사람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즐거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밋치는 담백하게 표현합니다. "사실 난 말이야 이렇게 지낼 수 있어서 매일이 행복했다고, 카우보이처럼 사는게 꿈이었는데 이루었잖아, 그러면 된 거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담담하게 살아가고,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멋진 삶이 된다면 좋겠다 싶습니다. 어느 독일 노인의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몸이 약해 아무 도움을 줄 수 없어도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이 시는 밋치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지 않겠어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삶이란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지요. 또한 그 내면의 강인함이야말로, 야생의 곰을 다시 만나게 되는 순간 앞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는 용기를 주는 거 아니겠어요. 친절하고 지혜롭게 나이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한 번쯤 도전해볼만한 매력적인 인생이라 생각해 봅니다.

 

 읽고 있는 책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 문득 밋치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서 덧붙여 놓으면 좋겠다 싶네요. "고통은 인간을 생각하게 하고, 생각은 인간을 지혜롭게 만든다. 그리고 지혜는 인생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지금까지 숨은 명작, 끝나지 않은 삶을 고찰해 보았습니다. / 2013. 09.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