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9월29일/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마태복음24:32-5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0. 3. 21:3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29일 주일 예배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마태24:32-51)

오늘의 말씀은 어떤 분의 특별한 부탁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한국전기연구원 신우회에 특강을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특강을 마치고 회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신천지가 사람들을 미혹한다고 하면서 그 구절의 정확한 의미를 물어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이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주님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재림의 시기를 분별할 수 있는 교훈을 주시고 재림의 확실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앞절29-31절에는 자신의 재림시에 일어날 특별한 사건들을 언급하시고 이제 여기서는 그 시기를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비유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입니다.

본문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재림의 시기와 그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갑자기 그 시기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이제”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자 지금부터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로부터 그 시기를 분별할 수 있는 법을 배워보겠습니다.’

한글 역에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로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무화과 나무가 주는 비유’로 되어있습니다. 즉 무화과 나무를 보고 그 생장 변화 원리에서 비유를 배우라는 말입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뭔지 애매한 표현이었는데 조금 더 명확한 표현인 것이지요.

우리 주님은 재림의 확실성을 재차 강조 하고 난 다음 이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재림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때에 관한 말씀은 직접적으로 ‘몇 년 몇 월 며칠 이다’고 하시지 않고 그냥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시는데 이게 지금 이단들이 발호하는 좋은 핑계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의 때에 관해서 무화과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은 그가 재림의 때에 대해서 뭔가 신비하게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쉽고 명확하게 재림의 때에 관해서 말씀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인 개념들이 부족하였던 고대에 상당히 복잡하고 모호한 종교적 개념들을 구체적이고 회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당시에 비유로 말하는 이러한 기법들이 널리 사용되었기에 예수님도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뭔가 신비롭게 하려고 , 또는 일부러 감추기 위해서 이렇게 비유를 드신게 결코 아닙니다.

아마 주님의 설교하시는 곳 주위에 무화과나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알기 쉽게 그걸 비유의 소재로 삼으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에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가 바로 무화과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비유로 들면 사람들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말씀한 여러 가지 징조들이 하나 둘씩 발생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재림이 가까운 것을 깨달으라는 의미에서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무화과 나무를 대표로 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본문의 앞에서 여러 가지 징조들을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아 때가 되었구나, 때가 가까워 오는구나!’ 이렇게 알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가 특별해서 예로 든 것은 전혀 아닙니다.

무화과 나무의 잎사귀가 돋아나고 커지기 시작하면 그 때가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라는 사실은 지중해성 기후에서 항상 반복되는 자연 법칙이며 역시 듣고 있는 제자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서로 잘 아는 대상을 가지고 비유를 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름이라는 말은 ‘데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카이츠’의 번역어인데요 이 말의 뜻은 ‘여름’ 외에도 ‘추수’나 ‘결실’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을’이 ‘추수’나 ‘결실’의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이 말은 ‘최후’나 ‘끝’을 의미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또한 아모스 선지자는 ‘여름’을 ‘역사의 끝’과 ‘최후에 있을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아모스의 이런 비유를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이나 말씀을 듣는 유대인이나 서로 잘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알기 쉽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이지요. 곧 종말의 때가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언제요?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래요 한꺼번에 이런 징조들이 일어난다기 보다는 이런 징조들이 한 개씩 두 개씩 일어나기 시작하면 ‘아 이제 때가 가까웠구나!’하고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자, 뭐 이까지는 우리도 충분히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다음 3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골치 아픈 구절입니다. 성경 말씀이 일점일획도 거짓이 없다면 이러한 징조가 예수님 당시에 아니면 그 말을 들었던 사람들의 당대에 일어나야만 했습니다. 즉 이미 세상이 끝장이 났어야 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왜 아직도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습니까? 성경이 틀렸습니까?

골치 아픕니다. 그 신우회의 회장님이 골치 아파 했던 일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직역하면 “이 모든 것들이 될 때가지 이 세대는 결코 지나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 져야만 그때에야 비로소 이 세대가 지나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헬라어 원문을 가지고 번역을 하는 작업은 매우 어렵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글로 설명을 하려합니다.

우리말에는 번역되지 않은 부분으로 ‘~까지’를 나타내는 전치사 ‘헤오스’가 있습니다. 이게 몇몇 조건하에서는 그 때가 언제인지 불확실할 때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재림 전에 있을 것으로 예언된 환난들과 징조들이 모두 다 성취될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결코 ‘이 세대’가 지나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온 ‘이 세대’는 당연히 재림 전에 일어날 환난들과 징조들을 모두 다 겪게 될 것입니다.

또 세대로 번역된 ‘게네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뜻은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전체 무리’ 또는 ‘시대’‘한 세대’와 같은 다양한 뜻이 있지만 ‘출생’ ‘혈통’같은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이 단어가 혈통이나 출생의 의미로 쓰였다면 이 세대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리킵니다.
만일 이 단어가 ‘동일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미로 쓰였다면 ‘이 세대’는 유대인을 포함한 동시대의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만일 이 단어가 ‘시대’의 의미로 쓰였다면 ‘이 세대’는 한 세대를 나타내는 기간인 30-40년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주후 70년경에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성벽 중에서 통곡의 벽만 남아 있는데 바로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파괴되었을 때 남은 곳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본장에 기록된 많은 예언이 이루어 졌습니다.
가령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란 말도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본장이 단순히 당시 예루살렘의 멸망 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의 이 예언을 기억한 많은 기독교도들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 성을 탈출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 할 수 있었지만 이 장은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대’는 주님의 재림 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시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과 이후
주님 초림 이전과 주님 이후의 시대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여기서는 주님의 재림 이전의 시대와 이후의 시대를 나누는 경우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를 나타내 주는 말이 여기 있습니다. 3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기서 ‘진실로’가 바로 헬라어 ‘아멘’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멘 아멘이라고 화답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의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이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 진다고 재차 확증하셨습니다.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시편102:26에 보면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본장에 예언된 말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신천지의 주장이 어떠했길래 그럴듯하게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성경 원문을 정확하게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 때문에 이만명의 기독교도들은 예루살렘성이 멸망할 때 잠시 예루살렘 성문이 개방된 시점을 틈타 성을 탈출해서 요단강을 건너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영원히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는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에 결코 멸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전에 성의 멸망을 생각한다면 그건 저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것이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한 결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가 끊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의 멸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와 로마간의 전쟁에서 초반에 유대가 승리하고 로마군대가 패퇴하는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기뻐 날뜁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예루살렘성내는 성을 분할해서 점령한 여러명의 종파 지도자들의 내분으로 살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유대를 구원할 메시야를 자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지요. 외적이 물러나자 내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내분은 로마의 침공보다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상대방의 세력을 꺾기위해 양식창고와 물저장고를 불태우고 약을 풀고 골목골목마다 서로 싸워서 시체가 산을 이루었지만 아무도 치우지 못합니다.

성문을 열지 못하므로 성내에서 시체가 썩어가고 이에따라 전염병이 돌고 굶어 죽고 찔려 죽고 병들어 죽고.......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고통을 겪기 보다는 차라리 로마군의 손에 죽기를 더 소원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광신도들의 득세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어때요, 성경본문의 내용과 일치하지요?
사실은 로마의 황제가 급서하는 바람에 황제위를 차지하려고 급하게 귀국한 걸 모르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로마군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물리쳤다고 생각했고 처음 며칠간은 성문을 열어놓고 기뻐했지만 곧 내분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성을 탈출하자 바로 성문을 닫아 걸고는 서로 싸움으로 매일을 지냅니다.

이때는 먹을 양식을 불태우고 상대방의 세력권에 있는 물 저장고에 독약을 풀고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를 잡아 먹는 끔찍한 일을 벌이면서도 여호와의 성도는 영원할 것이며 자기의 영도 하에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베스파시안)가 아들 디도에게 군대를 주어서 디도는 일거에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키고 성벽을 파괴하고 모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결코 다시는 돌아 오지 못하도록 명합니다.
이때 죽은이는 수십만에서 최대 이백만까지로 봅니다. 이정도면 유대인들에게는 세상의 종말 같겠지요?

당시 로마의 유대총독은 플로루스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대제사장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입고 음담패설을 함으로써 전 유대인들의 공분을 샀고 무장봉기한 유대인들에 의해 쫓겨납니다.
그러자 더 상급기관인 시리아의 총독인 갈루스가 진압에 나섰지만 역시 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드디어 메시야가 이땅에 도래해서 새로운 왕국을 만들 때가 왔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각 분파뿐만 아닐 자칭 그리스도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됩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로마의 네로황제는 당시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베스파시안을 급파했는데 이 사람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황제가 갑자기 죽어버리자 로마로 빨리 돌아가서 황제 위를 차지하려고 포위를 풀고 돌아 가버립니다.
당시 이러한 사정을 알리 없던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열정과 환희에 차서 서로 메시야를 자처하며 자기를 따르기를 요구합니다.

이때 예루살렘성이 처음 몇일동안 열렸었는데 주님의 이 예언을 기억한 사람들이 요단강 동편의 펠라 성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게 됩니다.
유대기독교도들이 탈출하고 난 며칠 후 성문은 유대인 정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다시금 닫히고 이후로는 죽고 죽이는 끝없는 참상을 연출하다가 마침내 제위에 오른 베스파시안의 명령을 받은 그의 아들 디도에 의해 멸망하고 맙니다.

사실 본문은 이 때에 기독교도들 2만명의 목숨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대 살육을 당하고 맙니다.

성경의 뜻을 임의로 해석하는 것은 사실 상당히 위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요한계시록이나 묵시록 종말에 관한 여러 예언들을 임의로 해석하여 이를 입에 달고 있는 이들은 대게 이단일 확률이 높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기존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인간 그리스도가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뭔가 종말의 비밀에 관해서 숨기려고 한다고 생각한 이들은 그럴듯한 말로 신비를 가장하여 혹세무민합니다.

그러다보면 마치 자기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듯이 느껴지고 그리스도를 자처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도 제법 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이땅에 살면서 분명이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결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이지요.

그러나 몇가지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징조를 보면 종말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쁜 나만의 삶 가운데서 헤매지 말고 하나님과 영교하며 그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를 기다린답시고 현세의 일을 등한시하거나 이 땅에서의 인연을 무시한다면 이는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는데 그때를 말한다면 이는 그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를 자칭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균형된 시각을 가지고 주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 갑시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됩니다. 할게 많습니다.
우리 힘차게 주님과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갑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를 따라 걸어 가되 그분의 보호의 날개 아래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떤 세상의 파도도 우리를 결코 침노치 못하도록 합시다. 담대하게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9월 2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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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벌써 몇 차례 들었던 바가 있습니다만, 참 이 설교를 좋아합니다. 자세한 배경설명이 그렇고,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좋습니다. 저는 오래전에 교회 소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신다는 말을 하셨기에, 자주 하늘을 쳐다보면서 간절히 바랐다고 합니다. 일종의 긴장감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지요. 고대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알았을 법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이루어진다고 체험하게 되었을 테니까요.

나만이 해석을 독점할 수 있으며, 이러한 풀이야 말로 절대적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광신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웃이 사라지고, 자기만 중시되며, 타인을 멸시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선 곤란합니다. 너무나도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될테니까요. 나그네에게 물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 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 희생의 가치를 아는 사람, 성도의 삶이 현실에서 이렇게 펼쳐져야 하지 않을까요.

며칠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의 원어식 설명을 본적이 있습니다. 원어로는 생각을 바꾸어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에 근접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쾌락과 탐욕이 주인되는 세상에, 우리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친절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며, 이웃에게 무례하지 않아야 하며, 내가 조금 손해 볼지라도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있는 한 사람의 의인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썩어가는 현실 앞에서, 이것을 버려둔채 천국에 우리만 가겠다는 생각에 저는 좀처럼 납득하지 못합니다. 현실이 지옥같다면, 우리는 그 거센 파도 앞에서, 올바른 삶을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전체로 답한다면 좋겠습니다. 말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웃에게 힘이 되고, 용기가 될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좋겠습니다. / 2013.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