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대원군의 개혁 2편 - 호포제 실시, 그리고 탄핵.

시북(허지수) 2013. 10. 15. 01:14

 지난 문서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진행하며, 이대로는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뭔가 눈으로 좀 보여주고 싶고, 위엄도 드러내야 했기에, 마침내 경복궁을 중건하기에 이릅니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그 궁, 이제는 잡초만 무성하고, 폐허와도 같았던 그 경복궁 재건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참 많은 시련이 있었어요. 궁들은 나무로 만들어야 하는데, 나무이다보니 아무래도 화재가 잘 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중건을 하면서도 몇 번이고 화재가 발생합니다. 계속되는 경복궁 사업, 그 막대한 비용이며, 노동력이며, 정말 많은 것을 소진하면서까지, 끝까지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입니다. 당시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건에 필요한 "돈"이 었습니다. 정부에서는 급한대로, 원납전이라고 해서 기부금을 대놓고 받습니다. 뭐, 사실상 기부금 내놔! 에 가까웠지요, 것참... 백성들은 원망하면서 납부해야 하는 쩐이라고 야유하기도 합니다.

 

 또한 당백전을 발행합니다. 말그대로 백배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고액화폐를 막 발행합니다. 이건, 정부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돈이 모자르니까, 그냥 고액권 찍어내버려~ 라고 생각하고 정부에서 마구 잡이로 화폐를 만들었지요. 이러다보니, 어떻게 될까요~? 경제에서도 나오지만, 화폐를 시중에 마구 풀면, 화폐가치가 폭락하는 전철을 밟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물건값이 계속해서 오르는데, 이걸 인플레이션 이라고 합니다. (*간단히 비유해, 나라에서 돈을 마구 발행하면, 동물라면 너ㅇㅇ 값이 몇 달만에 2천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간 정리를 살짝 해보면, 나름대로 흥선 대원군은 강하게 개혁을 밀어붙였고,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서원 정리 등을 시행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무리하게 경복궁 중건하느라, 원납전에, 당백전 무리하게 찍다보니, 경제 시스템이 흔들리는 모습도 파악할 필요가 있겠네요. 여기까지가 왕권강화의 모습이라면~

 

 다음 개혁 주제는 민생안정 입니다. 무엇을 했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전정(토지문제)을 해결하기 위해서, 양전사업을 실시합니다! 어려운 건 전혀 아니고,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서, 면세지를 찾아내고, 거기다가 세금을 때리는 모습입니다~ (*아! 요즘 인터넷 유행어로 말하자면 - 이 면세지 색출 사업을 힘 있는 지주들이 싫어합니다!) 덧붙여, 대원군의 양전사업이 면세지 색출의 성격이라면, 훗날 고종의 양전사업은 토지소유권을 정하는 취지가 있다는 것을 참고해 두시면 됩니다.

 

 군정의 정비는 참 중요했습니다. 군포 때문에, 당시 워낙 부정과 비리가 많았으니까요. 몇 가지 대표적 부패 사례를 볼까요. 황구첨정이라고 해서, 어린애까지 군포를 내라고 요구하고, 백골징포라고 해서,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내라고 요구하고 있었으니, 뭐 거의 깡패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군포를 내기 싫다고, 도저히 못 내겠다며, 누군가 도망가버리면, 남은 몫은 이웃이나 친척에게 떠넘겨버리며, 끝까지 악랄하게 군포를 수탈했었습니다. 당시를 묘사한 기록에 의하면, 군포가 너무 지독해서, 아예 남자이기를 포기해 버리는 모습도 목격됩니다. 여하튼, 군정의 문란을 해결 하기 위해서, 대원군은 초강수를 꺼내듭니다. 앞서 살펴본 서원정리와 함께 대원군 개혁의 하이라이트! "호포법 시행" 입니다!

 

 상세히 살펴보자면, 호포법은 초기에는 동포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포라는 것은 옷감을 내라는건데요, 동포제가 뭐냐하면, 한 마을 마다 단위를 정해서 얼마만큼씩 포를 내라고 할당을 해버립니다. 정말 중요한 건 양반도 내라고 했다는 점!!! 이 동포제에서 좀 더 나아가, 급기야 나중에는, 아예 개별 호(가구) 마다, 양반이고 백성이고 간에, 모두가 전부 포를 내라고 합니다. 호포제의 시행입니다. 시험 단골 손님이고, 특히 중요하므로 강조하느라 또 반복하자면, 양반이고, 백성이고, 상관없이 포를 다 내라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빼놓지 않고 포를 내라!!! 이러다 보니, 거센 반발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호포제는 왜 엄청난 저항에 직면했을까요? 조선시대에서 양반과 상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양반들은 포를 내지 않는 특권이 있었어요. 그런데 호포제를 시행하니까, 집집마다 모두 다 내라고 했으니까, 양반인지, 상민인지,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 (양반 입장에서는) X같은 호포제로 인해, 양반의 증거이자 위세였던 군포(군역)를 면제받던 특권이 사라진데다가, 세금까지 내야한다니, 얼마나, 그야말로 얼마나 싫었을까요!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의 정비가 있었습니다. 본래 환곡은 구휼하는 취지로 운영되어야 했음에도, 관리들이 환곡에 쓸데없이(!) 개입하면서, 필요도 없는데 봄에 쌀을 막 빌려주고, 가을이 되면 쌀을 엄청난 고리로 뜯어내 갑니다. 이 폐혜를 막기 위해서, 곡물 빌려주는 제도를 운영할 때, 아예 관리들의 입김을 없애버립니다. "사창제의 도입" 입니다. 예컨대 마을이 있고, 마을 구석에 곡물 창고가 있다면. 민간인이 창고관리를 하게 됩니다. 덕망 높은 사람을 뽑아서, 사창을 운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잠깐 여담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공직자가 있으면, 백성이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는지, 우리는 가슴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대원군 개혁의 모습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자, 그런데 이제부터 또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거의 스릴러급의 서늘한 반전이랄까요. 반격이랄까요. 여하튼 역사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꽤 많습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지금 대원군의 강한 개혁들 중에 일부는 유생들과 양반층에게 아주 격렬하게 반발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서원 정리 및 만동묘 철폐, 호포제의 실시는, 기득권(유생,양반)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밌게도, 유생들은 명분을 들고 나옵니다. 기본적으로 서원 정리나 호포제는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고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면세지를 없애서 세금을 충당하고, 특권을 없애 모두에게 포를 걷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돈으로 이야기 하면 곤란하니까, 유생들이 집중 공격하는 건, "대원군은 지금 양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라고 들고 일어납니다. 결국 이런 흐름 속에서, 대원군은 최익현에 의해 탄핵 상소를 받습니다. 대원군은 10년만인 1873년 정권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보수적 유학자였던 최익현은 대원군의 반성리학적 행동들과 무리한 경복궁 중건을 계속해서 비판해 왔던, 대원군의 맹렬한 반대파였습니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어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기에 앞서 잠깐만 간단한 족보를 파악해 두면 좋겠네요.

 흥선대원군이 있고, 그의 아들인 고종이 있습니다. 고종의 아내는, 명성황후 였고요. 간단하지요~

 

 자, 고종의 아버지였던 흥선 대원군은 상당히 고심하고, 고심하면서 며느리를 받아들이는데요. 당연히 지난 시절 세도 정치로 악명 높던 풍양 조씨, 안동 김씨 집안은 절대로 아니 아니, 아니 되었지요. 그래서 세력이 없어보일듯한 (!)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데려다가 고종의 아내로 삼았지요. 그런데 현실은 참... 여하튼, 대원군이 물러나면서, 이제 민씨 집안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그렇게 흘러갑니다.

 

 만약 이 장면에서 왕실의 분위기를 빼고, 보통 가정 집으로 묘사한다면, 아들(고종) 하나 놓고, 시아버지(대원군)와 며느리 집안(민씨 세력)이 서로 집안의 주도권을 놓고 격렬히 싸우고 있는 콩가루 분위기가 솔솔 납니다 -_-; 나중에 대원군이 죽을 때는, 고종이 아버지 임종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집안이 파국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 키워드가 명성황후 였는데요. 정작! 명성황후를 들인 것은 대원군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인해, 끝내 민씨 집안에 의해서 대원군이 좇겨난다는 게 참으로 묘한 아이러니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섭니다. 민씨 정권은 대원군과는 완전 다릅니다. 정권이 바뀐 겁니다. 왕이었던, 고종은 어찌보면 당시에는 조금 안타까운 신세였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 주장에 끌려가고, 정권이 바뀌자 민씨 집안 주도에 의해서 흘러가고 있고요. 어쨌든 민씨정권은 대원군과는 차별적 정책을 지향 하게 됩니다. 그 모습들은 이후 또 계속해서 배우게 될테니 전혀 걱정마세요~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질 테니까요!

 

 지금까지 흥선 대원군의 개혁을 길게 살펴보았습니다. 대원군은 조선을 일으키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작정 열심히 달리기 보다는, 때로 방향성을 생각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 로마 시대의 이야기를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로마 시대 때 어떤 사람이 배를 탔습니다. 노를 젓는 역할을 맡게 된 사람이었지요. 그는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노를 저었지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힘이 남아있지 않자, 배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나의 한 평생을 바쳤던 배를 돌아보니까, 안타깝게도(?), 그 배의 깃발에는 해적선(!)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삶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열심히 살긴 살았는데, 정작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모습이 아니었는지요. 인생에 있어서, 어디로 달리고 있는가, 그 방향성은 우리가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대원군의 개혁 한계는 이 지점입니다. 대원군이 지향했던 목표 - 복고적 왕권강화를 추구했던 점, 그래서 근대를 지향하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점, 어쩌면 그 방향성이 묘하게 안타까웠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근대적인 조선을 추구하는 모습이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이랄까요. 흥선 대원군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바라보는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문서에서는 계속해서 대원군의 대외적인 모습을 살펴봅시다! 정말 신나는 근대사~ 계속 됩니다.

 

 오늘의 영감 - 저는 가끔 인류가 발전만을 하는게 아니라, 역주행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게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원전이지요. 뒤처리를 할 수 없는 건데도, 일단 급한대로 설치를 해두지만, 세상에 절대로 완벽하고 안전한 건 없다는게 새삼 증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20세기에는 에너지, 이를테면 석유 같은게 커다란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면, 21세기는 식량, 특히 물 같은게 커다란 투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석유면은 부족해도, 물은 충분히 풍부합니다.

 

 그런데 역사는 가끔 공교롭게도 어떤 땅의 자원이 부족할 때는 멀쩡하고, 안전하다가, 정작 뭔가 매력적이고 가치로운 게 발견되면, 격전의 장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19세기 중반부터의 근대사를 세심하게 잘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한국 주변에는 손꼽히는 강대국이 많다보니, 여기서 현명하게 잘 해나가야 한다고 종종 생각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은, 사실 그래서 무서운 말입니다. 경계하고 정신차리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최근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내세우며,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거기에 대해서 "반대한다"라는 말도 못하고 있다면, 이건 너무 안일한 현실판단이 아닌가 문득 우려되었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