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수록, 재미있고 유익한 근대사 이야기, 지난 문서 복습부터 잠깐 해봅시다! 대원군이 대내 개혁을 강하게 밀고 나가잖아요. 중요한 초점이 무엇인지 기억 나는가요. 왕권강화 와 민생안정 이라는 키워드는 잊지 마세요. 서원정리나 호포법 등 아직 기억에 남아 있지요? 뭐 생각 안나면, 그냥 다시 보면 되니까, 걱정은 접어두고, 이번 문서에서는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내용이 길어지다보니, 이번에도 2개로 문서를 나누었습니다. 우선 서론은 동아시아 정세로!
당시 조선의 대외정책과 사건의 흐름들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 동아시아 정세를 한 번 차분히 파악해 볼께요. 배경이 어땠는가를 살펴보자는 겁니다. 조선을 두고, 왼쪽에는? 청나라가 있고요, 남동쪽은? 일본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청나라와 일본이 처한 상황도 썩 좋지 않았습니다.
세계적 정세가 이른바 "서세동점"이라고 표현되는데, 즉 서양 세력이 계속해서 동쪽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서양 세력의 힘에 의해, 청나라와 일본이 그대로 나가떨어집니다.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을 겪으며, 결국 강제로 문을 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 거대 중국이 힘에서 밀리며 불평등조약을 억지로 체결한 거지요. 이렇게, 1842년에 청나라 문호가 개방됩니다.
일본도 함포를 앞세운 서양 세력 앞에서 곤란을 겪습니다. "어이, 전쟁 한 번 해볼래?" 라고 반쯤은 협박하는 행태 앞에서, 일본 역시 백기를 들고 나옵니다. 일본은 1854년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가운데 끼어 있는 모습이었지요. 흐음! 자, 그러면, 문을 연 이후, 청나라와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먼저 청나라는 그야말로, 멘붕! 유행하는 말로 "충격과 공포"의 상황이었습니다. 이제껏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청나라가, 서양에 의해 치욕적으로, 강제로 문호를 열게 된 겁니다. 이 때부터 중국은 우리도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자각이 시작됩니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추진하는데요. 이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중체서용 입니다. 중국의 몸(정신)은 그대로 있되, 서양의 발전된 기술만큼은 받아들이자는 겁니다.
일본도 펼쳐진 상황 자체는 다소 비슷했습니다. 일본도 이대로는 안 된다며, 메이지유신을 단행했으니까요. (메이지유신 정보는 ebs 5분사탐 추천 → http://youtu.be/hZItYPzlomU) 그런데, 이 메이지유신을 살펴보면, 청나라 분위기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경우, 이왕 바꿀 꺼 제대로 다 바꾸자고 밀어붙였고, 급진적인 근대화 개혁을 추구하게 됩니다. 다른 말로, 아시아 전통을 버리고, 서양식으로 가자는 "문명개화론" 으로 전개됩니다. 생각해보면, 참 재밌고 신기하지요. 이렇게 중국과 일본은 선택지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이 생각의 차이가 초래한 결과는? 두둥!!! 것참, 그 결과 하필이면 조선이 중간에서 피해를 보고 맙니다. 하이고야! 뭐, 어쨌든, 서로 다른 선택지를 집어들었던 청나라와 일본은 마침내 한 판 붙게 되는데요. 그런데, 어디서 붙느냐... 다름아닌 한반도(!)에서 붙습니다. 계속해서 나중에 쭉 가면 배우겠지만,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네, 이렇게 되짚어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어보이고, 기가 차지만, 이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최근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내세우며, 자기맘대로 개입하려는 행태를 강력히 반대하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자,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이 당시 중요하게 봐야할 게 뭐냐하면, 중국의 중체서용 노선과 일본의 문명개화론 노선이 맞붙게 되었고, 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겁니다. 문명개화론의 승리로 귀결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파악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전반적 배경이해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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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 국경과 맞닿은 연해주 지역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청나라를 둘러 싸고 서양에서 이권다툼을 하는, 그 시기를 틈타서, (당시 청나라 땅이던) 연해주 지역을, 1860년경 러시아가 냉큼 차지해 버립니다. 한마디로 장난 아니에요~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은, 지금 서구 세력이 점령해 버리는 완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소식을 전해듣고 있는 조선 입장에서는 당연히 공포스럽지 않을까요? 그렇게 강대하던 청나라가 지금 무장해제 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게다가 이제 조선도 당연히 서구 세력과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어느새 연해주 - 북동 국경선 끝이 러시아 땅이 되었으니까요.
이 때, 조선은 흥선대원군 정권 하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대원군은 강력한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추진 합니다. 그 내용들을 이제부터(!) 살펴봐야 겠지요. 서론이 참으로 길었는데요. 그래도 이렇게 정세를 짚고 출발하면, 상황 파악이 한결 수월해질꺼에요.
첫 번째, 1866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 여기서 잠깐! 너무 지나치게 년도와 일어난 일들을 기계적으로 다 외우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건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자연스럽게 느껴봅시다! 이게 더 중요해요!) 여하튼, 1866년 병인박해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병인박해가 무엇인가?
러시아가 조선국경과 맞닿아 있으니까, 조선 정부는 경악했습니다. "아놔, 이를 어찌하나! 어찌합니까! 충격! 당황! 두근두근!" 이런 상황에서, 대원군이 가만히 보니,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랑스 신부들이 보이네요. 그리고, 이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저 옆 청나라에 주둔해 있는 프랑스 군대를 좀 활용해서,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를 견제해주면 안되겠니?" 그러나 이 제안은 불발로 그치고 맙니다. 프랑스와의 교섭과 타이밍이 잘 안 맞았던 겁니다.
게다가! 당시 자꾸만 서양에서 신부들이 와서 종교활동을 펼치고 있으니, 전국의 유생들이 대거 들고 일어납니다. 저 서양사람들 좀 나가라고 해라! 이단 종교들 좀 없애달라! 라고 항소문이 빗발칩니다. 자, 지난 문서와 함께 파악해 본다면, 흥선대원군은 지금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서원정리도 하고, 굳센 개혁 속에서, 사실상 유생들이 계속해서 손해를 보고 있단 말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대원군은 당시 지배계층과의 긴장감도 마다하지 않고, 개혁드라이브를 하고 있다보니, 유생들이 주장하는 요구를 철저하게 끝까지 무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나름대로 들어줄 건, 들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득권과 사사건건 적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개혁을 밀어붙이다가는, 자칫 큰 역풍에 그대로 쓸려갈 위험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른바 정치는 하나를 내어주고, 하나를 얻는 묘랄까요. 정치라는 게, 이런 특성이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유생들이 요구하는 대외적인 요구 - 프랑스 신부를 잡아서 혼 좀 내라 - 라는 항소는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신부박해)를 양보하고 들어줄테니, 대신 다른 하나(개혁)는 밀어붙이는 힘이 얻어지는 거지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었음을 이해해보는게 재밌습니다. 그래서 결국 1866년 국내에 있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합니다. 이것이 병인박해 입니다. 쉽지요~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자, 어쨌든 그 결과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습니다. 천주교 신자도 약 8천명이 죽습니다. 어마어마한 박해 였습니다. (*잠시 덧붙이면, 이 대목도 이렇게 휙 넘어가기에 앞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사건입니다. 당시 프랑스 신부는 제사를 거부했고, 한국의 전통적 미풍양속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 혹은 이단적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와 다른 주장을 한다고 해서, 수천명을 그렇게까지 죽일 수 있는걸까요?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행위로 결론내리고, 그냥 어물쩍 넘어가곤 한다지만, 어쩌면 우리는 역사를 지나치게 자문화중심적으로 보거나, 외국X가 역시 나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한 번 고민해 볼만한 사건이 아닐까 합니다. 당했던 역사만을 바라보기 보다는, 반대로, 소수집단을 가해했던 역사도 있음을 우리는 함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당연히 큰 사건이 되었고, 조용히 넘어갈리가 없겠죠? 프랑스에서 군대를 끌고 오겠죠? 자, 그건 다음 문서에서 계속되고요~ >.<
한편, 그 프랑스와의 충돌(!)에 앞서, 1866년 늦은 여름, 평양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 벌어집니다. 이 쪽은, 미국 세력과의 충돌인데요. 음... 기본적으로 서양 세력들은 아시아에 대해서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그 나라에 가면 금이 있다 카더라~ 보물들이 많이 있다 카더라~ 그런 식으로 관심과 호기심이 있었던 겁니다. 좀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서양인들은 덜 발전된, 혹은 미개한, 서양과는 다른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사진을 찍는 등 접근을 해왔던 겁니다.
평양으로 제너럴셔먼호가 들어와 교역요구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분위기는 위키백과의 표현을 빌리면 "프랑스의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관원들은 전전긍긍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 였기 때문에, 국내 사정상 이 통상요구는 당연히 거절됩니다. 관은 그렇다고 칩시다.
이제껏 외국인들에게 조선 사람들 참 잘해주었고, 착하고 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양선들이 출현하고 하니깐, 좀 당황스럽습니다. 게다가 이 미쿡인들이 땡깡을, 생떼를 부리며, 조선 사람들 괴롭히기도 하고, 자꾸 귀찮게 구니까, 결국 확 열받는 거지요. "아 XX 쟤네들 뭐야!" 그래서, 평양을 담당하던 박규수의 지도 하에, 제너럴셔먼호 싹 불태워 격침시켜 버립니다. 이대로 미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그럴리 없겠죠~ 아이쿠, 지금 다 조선을 향해 들어오게 생겼네요. 소문대로 프랑스도 곧 올꺼고, 머지않아 미국도 올꺼고... 흥미진진한 근대사 이야기 계속됩니다! 아후 두근두근 하잖아요! 헉, 저만 그런가요... 다음 문서에서 계속!
오늘의 영감 - 그냥 패스하셔도 좋은 ^^ 언제나처럼의 잡문입니다. 개인적 여담으로서, 요즘 한 번 고민해 보는 내용을 과감히 꺼내어 봅니다. 21세기 일본의 우경화, 강한 일본,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관하여, 최근 미국이 지지를 하고, 영국, 호주 등도 일본에 힘을 실어줍니다. 중국 압박을 위한 전형적인 포석이겠지요. 미국은 자국내 재정부담이 커지는 상황에서, 중국 견제를 직접 나서기보다는 이른바 일본 같은 우방을 통해서 시키는 쪽이 더 편할 듯 하고요. (좀 더 극단적으로는 긴장감을 좀 만들어야 무기도 계속 팔 수 있고...)
전통적으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통해서, 중국을 견제하는 노선"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은 확실히 예전 만큼 사이가 좋지 못한 터라, 월드컵 공동개최국이었다는 게, 가끔씩은 진짜 그랬던가? 라는 먼 추억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쯤되면 참 힘겨운 현실이지요. 한국이 일본과 손잡고 중국 견제한다는게 국민 정서상 당연히 용납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미국은 굳이 둘 중에 한 쪽을 민다면 한국 보다 일본을 밀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요. 간혹 사람들이 일본을 좀 가볍게 볼 때가 있는 편이지만, 일본은 여전히 경제적 대국이니까요. 결론적으로 그래서 일본의 행태를 잘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가능성은 낮아도, 자칫 잘못 뒤통수를 맞는다면, 또 다시 한국이 일본이 되거나, 혹은 중국이 되거나 하면, 이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니까요.
마르크스가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인물과 역사는 두 번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고 헤겔은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여야 한다.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코미디로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이른바 세계대전은 두 번 일어났고, 조선도 왜란에 이어 호란이 일어나며 처참한 현실을 맞이했습니다. 사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자국의 이익을 우선할 것이라는 건 지극히 당연합니다. 앞으로 일본은 군사적으로 보다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은 쉽게 가능합니다. 한국이 지혜롭게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하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을까요. 최근 자주 회자되는 말, 심지어 축구장에서까지 보았던 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13년과 2014년은 특히 일본의 동향을 잘 봐야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