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을 겪었던 고종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아내가 죽었고, 뒤이어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개인사로만 본다면 고종은 어쩌면 좀 안타까울 수 있습니다. 가정은 붕괴되었고, 따르는 백성들은 원망하고 있으니, 불행한 삶이지요. 더욱이 이제 고종을 도와줄 큰 세력이 없습니다. 대원군도 없고, 명성황후도 이제 없으니까요.
이제부터 정치적 선택을 하는 고종이 등장하게 됩니다. 재밌게 비유하자면, 예전에는 머리 회전이 빠른 아내를 만나, 약국 셔터맨을 하면서 결제 도장만 찍으면 간단했다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대신 해결해 줄 수 있는 해결사가 없습니다.
선택의 순간, 고종이 내린 결단은 1896년 아관파천 이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왕이 피신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년도순으로, 94년이 갑오년, 95년이 을미년, 96년이 병신년 인데요. 그래서 이런 노래가 불려졌다고 합니다. "갑오세, 갑오세, 을미적, 을미적 거리다가 병신 된다네." 웃을 일이라기보다는, 훨씬 심각하고 슬픈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동학농민운동은 끝내 좌절되었고, 일본에 의한 친일적 개혁이 단행되었으며, 그렇게 병신년이 되었으니까요. 아관파천은 치욕에 가까웠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왕이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집조차 지키지 못하여, 불안에 떨다가, 다른 나라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한 국가를 지킬 수 있단 말이에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고종의 선택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뒤에서 비난만 하기에는 간단합니다. 그러나, 고종이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가, 이 점 역시도 마냥 무시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종 입장에서는, 죽임 당한 아내의 못 다한 꿈, 그러니까 러시아의 힘을 빌려서라도, 일본을 견제하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다만, 고종의 경우 명성황후처럼 궁궐 내에서 일을 처리하기 보다는, 아예 대놓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목숨 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관파천도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처음 언급한대로, 왕이 피신해버린 민망한 치욕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집도 못 지키는 왕이, 무슨 나라를 위한단 말이냐. 라고 병신년에 병신되었다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아관파천은 고종이 선택한 절묘한 정치적 한 수였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갑오개혁, 을미개혁을 통해서 일본의 영향력이 조선 사회로 마구 밀려들어오고 있는 그 순간에, 아관파천을 단행함으로서, 일본화 되는 조선에 "잠깐! 멈춰!" 을 외칠 수 있었고, 그 결과 조선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팽팽하게 맞서는 정세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장에 일본도 지금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공사관에 쳐들어가서, 러시아와 맞짱 뜨기는 매우 부담스러웠으니까요. 그러므로,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실행하고, 자신의 뜻을 펼쳐나가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고종의 아관파천은 처참한 상황에서 보여준 탁월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한계점이 분명 존재합니다! 계속 살펴봅시다.)
자, 외세를 끌어들이면, 정권은 유지할 수 있지만, 그 대가가 가혹할 때가 있습니다. 본디, 세상에 공짜란 없기 마련입니다. 도와주었다는 명분 하에 외세가 요구하는게 커지면 커질수록, 나라가 거덜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습니다. 1896년을 기점으로 해서, 열강의 이권침탈이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른바, 최혜국대우 조항 때문에 뒤이어 일어나는 현상들은 더욱 비극적 입니다. 각 나라한테 줄줄이 이권을 뜯기고 있는 처참한 조선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구체적으로 보면요.
러시아는 삼림채벌권 (나무내놔!), 절영도 (석탄내놔!)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최혜국대우 조항으로 인해, 열강들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내줘야 했습니다. 자연스레 열강들이 조선에 침탈스러운 요구를 들이밉니다. 미국은 금광 내놔! 라고 요구했으며, 일본은 철도 부설권 내놔! 라고 요구합니다. 유행어를 빌리면, 지금 조선이 이 무슨 글로벌호구가 되는 느낌입니다. 아휴, 마음 아프게 말이지요. 그러나 냉정히 본다면 자초한 측면도 있습니다. 외세를 끌어들여서 정권을 유지해 나갔으니, 그 대가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했던 것입니다.
국내 상황도 달라졌습니다. 먼저 갑오-을미개혁의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인해 정국이 바뀌었으니까요. 이제 조선은 일본이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 흔들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갑오-을미개혁의 일부 조항들이 무효화 됩니다. 상징적인 장면인데, 개화의 아이콘인 "김홍집이 군중에 의해 피살" 되었습니다. 집요하게 살아남았던, 김홍집이 드디어 정치적 생명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어서 고종은 단발령을 강제로 하지 않겠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머리스타일은 강제가 아닌 자율에 맡기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추진되던 재정의 일원화도 잠정 중단되었습니다.
또한, 곧 등장하게 될 독립협회와의 권력 투쟁도 전개합니다. 아무래도 이 점이 좀 아쉽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상상을 해본다면, 만약 정국을 전환시키는데 성공한 고종이, 독립협회와 싸우지 않고, 손을 잡고서 기층 민중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보려고 했다면, 역사는 좀 더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1896년 아관파천에서 1904년 러일전쟁까지 대략 8년 정도가, 조선이 일어설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 시기를 활용하고, 힘을 잘 길러나갔더라면, 과연 우리가 식민지로 추락하진 않았을텐데... 라는 안타까움 입니다. (*독립협회 쪽은 있다가 다른 문서에서 또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고요.)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 아관파천은 일단 보기에 흉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환궁을 결정하게 됩니다. 외국공사관들이 많이 있는 덕수궁으로 돌아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건물이 있는데, 원구단과 황궁우 가 있습니다. 원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존재는 중국의 황제밖에 없었으나, 이제 대한제국도 황제의 나라니 하늘에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는 사실상 손을 뗐다고 봐야겠지만, 여하튼 조선 역시도 황제가 있는 나라임을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덧붙여, 황궁우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보조해주는 보조건물입니다. 드디어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었네요! 열강에 휘둘리며, 여전히 위태로운 대한제국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곧이어 개혁에 돌입합니다. 광무 개혁의 시작입니다.
대한제국은 광무개혁을 1899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하며, 러일전쟁이 펼쳐지는 1904년까지 시행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1899년부터 본격 개혁드라이브가 걸린 걸까요? 그것은 독립협회와 권력투쟁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1898년까지 독립협회와 투쟁을 펼치다가, 정부는 아예 독립협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 권력이 고종 황제에게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99년부터 본격 개혁의 시동이 걸리는 것이지요. 물론 년도가 중요한 건 아니고, 전반적인 배경이 그렇다는 이야기 입니다.
정말 중요한 건 광무개혁의 정신입니다. 구본 신참을 내세웁니다. 옛것을 본으로 하고,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상당히 유사한 개념으로는 동도서기가 있겠네요. 과거 온건 개화파가 주장했었던, 동쪽의 도를 따르되 서쪽의 기술만큼은 받아들인다는 것과 유사성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종도 구본 신참을 깃발로 내걸고, 이제 광무개혁이 추진됩니다. 그 내용들은? 너무 길어질테니, 광무개혁은 다음 문서에서 계속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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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잡문이니 패스하셔도 좋아요!) 오늘의 영감 - 동호회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미드 뉴스룸을 패러디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제목부터 꽤 멋집니다. "대한민국이 위대한 이유" 이 영상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가난과 싸워서 이겨내며, 이른바 잘 사는 나라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가난 대신에, "가난한 사람"과 싸우고 있다고 풍자하고 있었습니다. 꽤 무서운 분석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좌나 우라는 깃발을 삼아 둘로 쪼개지면서 서로 싸우고 있고, 끝내 한 쪽의 목소리를 외면해 버리는 탄압적 선택을 한다면? 대한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불과 8년안에 휘청거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훗날 대한제국이 망하기 직전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은 약 1%라고 합니다. 그래서, 역사라는 것이 비극이며, 위대하며, 또한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바쁘고, 무관심에 차 있고, 자신의 이익 탐하기를 즐겨하기에,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몇 번 언급했지만, 저는 고된 밥벌이에 피로한 99% 잉여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멸망 앞에서, 힘써 싸웠던 사람들 만큼은 잊지 않고자 소박하게나마 노력 중입니다. 오늘날, 너는 죽어도 되고 나는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이 되면, 참극이 재현될까봐 우려됩니다.
작년 이맘때 타계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붐은 그래서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조국 교수님 트위터에서 인용)"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으며, 나아가 작가 루쉰의 주장처럼, 침묵 속에서는 집단이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쿠, 너무 무거우니, 가벼운 이야기도 잠깐 소개! 역시 루쉰의 이야기 입니다. "유행이면 여기에 붙고, 또 유행이 바뀌면 저기에 붙고, 그럼 당신의 진짜 생각은 과연 무엇인가" 저는 늘 우리가 다양한 생각을 갖출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하지현 선생님은 예능을 보면, 위로가 되고 즐거움이 되고 회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그 말이 너무 좋았습니다. 고정된 사고의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저는 오늘도 끙끙 대며 헤매는 중입니다. 하하. 오늘도 노력중 이라고, 모니터 위에 써 붙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
정말 오래 전 일인데, 야학 시절에 인생을 정말 열심히 살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격투기를 배운다면서, 하루는 얼굴이 부어서 온 적도 있었고요. 아무리 피곤해도 절대 아침 6시에 일어나는게 삶의 원칙이라고 말하던 "성실의 꽃"같은 훈남이셨어요. 그런데 정작 그 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때로는, 99%의 노력보다 1%의 영감이 더 중요해요. 그 1%가 인생을 바꾸기도 하니까요." 앞의 말이야 꽤 알려진 대목이지만, 뒤의 붙어 있는 말이 인상적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딘가 있을지 모르는 내 인생의 영감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렇게 10년 넘게 세월이 흘러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영감은 언제나 발 밑에 이미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이미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벌써 다른 곳에 눈을 두려고 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지금부터 노력했을 때, 달라지는 것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어쩌면 1%의 생각전환이, 인생을 다르게 만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꿈꾸던 일을 시도해 보는건 어떨까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