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문서에서는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내용(1899~1904)"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전혀 어렵지 않고, 핵심적인 내용들은 간단할 정도입니다. 다만, 그 의미들도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개인적으로, 처음 드는 느낌은 빛과 그림자 였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따라온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 그래서, 앞날이 환해지는 대한제국이 된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흘러가지는 못했고요. 한계도 분명 있었습니다. 서론은 그만하고, 어서 살펴봅시다. 하하.
정치 측면 : 연호를 바꿉니다. (건양이었던) 연호를 광무로 바꿉니다. 자, 이게 왜 중요한가 하니, 나중에 1907년이 되면 고종이 퇴위되거든요. 그 후, 순종이 즉위합니다. 그 때 나오는 연호가 융희 입니다. 즉 연호들이 일종의 그 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로서 시험에 굉장히 자주 등장하니, 잘 파악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예를 들어 봅시다. 개국기년하면 바로 갑오개혁 이야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건양 이라면? 아, 을미개혁 입니다. 또한, 광무 라는 연호가 나오면 오늘 다룰 문서의 내용들이 떠오르면 OK 입니다. 한편, 융희라는 연호가 나오면 음, 대한 제국 말의 순종 때구나. 이런 식으로, 한 번 정리해두면 분명 시험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광무 개혁에서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1899년)를 반포합니다. 이제 대한제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용은 모든 권력은 황제에게 집중된다는 걸 담고 있으며, 따라서 황제권 강화 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내용만 덩그러니 실려있으면 곤란하니까, 실제로 작동되기 위해서 원수부를 설치하는데요. 원수부 밑에는, 시위대(왕실호위군), 친위대(중앙군), 진위대(지방군)를 배치시켜 놓습니다. 간단히 말해, 원수부를 설치하고 군권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이지요. 대한 제국은, 모든 군이 황제 통솔 아래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멈춰서,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볼 점은 "황제권 강화" 이게 과연 근대에 어울리는 제도였을까요? 시대의 흐름은 점차 근대로 향하고 있는 시점이고, 또한 근대가 된다는 것은 다른 말로 민주주의를 향해간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국민주권론 처럼, 권력이 한 사람에게 몰빵되는 것을 멀리하고, 권력을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렇게 본다면, 고종의 대한제국 및 원수부 설치는 어쩐지 황제 몰빵이라는 느낌이 확연히 있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접근입니다만) 결국 이런 황제권 중심의 구조 속에서, 시간이 약간 흘러 1904년 러일전쟁 시점이 되고, 대한제국은 일본과 여러가지 조약을 맺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일본이 아주 쉽게 우리 나라를 탐하며 먹어치워 갔던 이유는, 황제하고만 이야기가 잘 되면 만사 통과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황제 몰빵은 치명적 폐혜도 있다는 것이 역설적입니다. 만약, 대한제국이 초기에 권력을 분산시켜 놓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기 위해서, 투표를 하거나, 복잡한 절차 혹은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요. 이런 험난한 과정이 없었기에, 결과적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을 훨씬 쉽게 집어삼켜나갔던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 점에서 고종의 이 선택은 안타까운 면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군권 개편 및 장악이라는 적극적인 취지는 좋았지만, 권력이 지나치게 쏠렸다는 그림자도 컸다는 생각입니다.
다시 이야기로 얼른 돌아와서, 정치면에서는 황제권을 강화했다는 점,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요? 어쩌면 아버지 대원군 시절의 개혁과 상당한 유사점도 있네요. 대원군 시절도 왕권 강화노선을 걸었는데, 고종 광무개혁 때는 황제권 강화 노선으로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경제 측면 : 중요한 정책이 등장하는데요! "지계 발급" 입니다. 광무개혁의 핵심 내용입니다! 지계 발급을 풀어쓰면, 토지소유문서를 국가에서 발급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에서 인정하는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의 확립"을 위해서 시행했던 정책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계 발급이 왜 중요한 걸까요? 개인의 소유권이 명백하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 근대적인 사회로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기가 내 땅이야" 라는 개인의 권리가 확실히 부각되는 모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옛날 시대와 비교해 보면, 모든 땅은 사실 왕의 소유라는 고대의 왕토사상과는, 이제 완전히 달라진 생각을 느낄 수 있겠고요.
(*한편, 가만히 보면, 일본 덕에 근대화가 되었다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한제국 시기 때에도 조선은 여전히 근대적이지 못했던 미개한 국가일 뿐이다 라며 접근하고는 합니다. 과연 조선은 일제로 인해 근대화 되었을까요? 글쎄요. 이렇게,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본다면, 대한제국 시기의 지계 발급 이라는 대목은, 식민지 근대화론의 중요한 반박 주장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이미 대한제국은 자본주의 사회로 조금씩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양지아문을 설치해서, 양전사업(토지조사)을 실시합니다. 자, 그런데 왜 또 갑자기 아문이냐...! 8아문은 7부로 개편되었다면서요? 네네 맞습니다. 여기서의 양지아문은, 탁지부의 영향 아래에 있는 새로 만든 부서입니다. 그러니까 의정부 8아문 시절의 그 정도의 위상을 가진 곳이 아니라, 탁지부 밑의 토지조사부서였다 라고 파악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토지사업들을 총괄하고 있는 곳은 사실상 재무관리를 하는 탁지부가 되겠고요.
다만, 지계 발급 역시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취지의, 지계 발급은 전국적 시행까지는 아니었고, 도중에 러일전쟁이 터지면서, 결국 지계의 확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서야,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이 법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결과로만 보면, 일본에 의해서 토지소유권이 근대화 된 것 같지만, 가만히 놔뒀어도 대한 제국이 해내지 않았을까요. (*비유하자면, 대한제국이 나름대로 근대국가를 만들어보려고 퍼즐맞추기를 노력하고 있는데, 근대화를 좀 더 빨리 끝낸 일본이 노골적으로 "내가 해줄께" 라며, 대한제국에 개입하면서 자기들 입맛대로 토지소유권 근대화를 최종적으로 이뤄놓습니다. 그래놓고 식민지 덕분에 근대화 되었다! 라고 합리화 하는 셈이지요. 에휴.)
대한제국 시기에는, 상공업 진흥도 추진했습니다. 국가가 힘써서,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킨다는 "식산흥업" 정책입니다. 쉽게 말해, 나라에서 직접 회사나 공장도 만들려고 했고, 기술자들도 키워보려고 했고, 발전 좀 시켜보자! 라는 열의를 불태웠다는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측면에서 본다면, 학교를 많이 세웁니다. 기술 학교를 세워서, 철도 기술, 양잠(누에를 사육해 섬유를 만드는 일!)을 가르칩니다. 근대산업기술을 배우고, 익혀서, 상업과 공업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말하자면, 상공업 진흥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국가 주도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것이지요! (아마, 오늘날로 친다면 우주 개발붐에 도움이 되려고, 국가가 우주승무원을 후원해준다거나 그런 식입니다.) 또한, 대한제국이 선포가 되면서, 이 시대의 위대함, 황제의 나라의 위엄! 을 보여주면 훨씬 멋지고 좋잖아요. 그래서 이 시기에, 전차 개통과 경인선이 개통 됩니다. 189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까지를 간단히 요약해보며, 중요한 키워드를 볼까요. 1899년부터 본격 개혁 드라이브가 걸리고요. 정치면에서는 대한국 국제를 제정해 황제권 강화를 추구했고, 경제면에서는 지계 발급, 상공업 진흥에 노력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기술학교 등장, 전차와 경인선 개통! 가볍게 한 문단으로 정리되는 내용이군요! 그렇지만, 광무개혁의 내용들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특히, 황제권 강화와 지계 발급 잊지 맙시다! 덧붙여,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개혁 같은 다른 개혁들에 비해, 광무개혁은 외세가 아닌 자주적으로 추진했던 개혁이라는 점도 평가받는 대목이고요.
색다르게 접근해보면, 광무개혁은 정치면에서는 "옛 것을 본 받는" 구본의 모습이 보입니다. 왕권(황제권)을 끌어올리는 보수적인 색채가 강하고요. 그러면서도, 경제나 사회면에서는 "개혁적이고 새로운" 신참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광무개혁의 키워드인, 구본신참이라는 말도 기억해둡시다~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의미입니다. 지난 문서에서도 구본신참 이야기는 했습니다만, 사람의 기억력이 원래 그렇듯이, 반복하다보면 금방 익숙해집니다 >.<
여기까지 흥미로운 광무개혁을 살펴봤습니다. 대원군 없이, 명성황후 없이, 홀로 선 고종의 선택은 아관파천과 광무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탁월한 점도 있었고, 또한 불편하고 안타까운 한계점도 분명 있었습니다. 아관파천에서는 - 러시아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 그리고 광무개혁의 정치면에서는 - 시대에 역행하는 황제 중심으로 나갔다는 점(권력이 쏠리는 전제 군주제로 갔다는 점)이 대표적인 한계겠지요. 그렇다면, 다음 문서에서는 민(民)의 이야기,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 1896~1898년 독립 협회의 모습을 살펴볼까 합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대한제국의 시대를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는 즐거운 시간이 될꺼에요. 신나는 근대사 이야기 계속 됩니다! 다음 문서에서 계속...!
오늘의 영감 - 나는 왜 사는가? 나의 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오래도록 보이지 않다가, 뒤늦게 내 곁에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어느새 한국사 100번째 문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지극히 개인적으로 시작했던 정리였고, 약 50개면 충분히 끝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이어질 이야기가 제법 많습니다! 결국 최태성 선생님의 아래 이야기가 맞았던 것 같습니다.
최선생님은 꿈에 대해서 이렇게 접근합니다. 꿈은 내가 달려가야 할 때도 있지만, 어쩌면 꿈이 내게로 다가올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최샘은 고교 교사가 될 때까지도 꿈이 무엇인지 명확히 와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이 더 지나서야, 어떻게 살 것인지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 말이, 저는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겪어온 경험에서 비롯된 살아숨쉬는 이야기는 정말로 감동적인 느낌을 줍니다.
꿈이나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시작할 때는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입니다. 지금의 내 한계를 믿지 말고, 일단은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할 수 있는데까지는 끝까지 열심히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의지를 충전하고, 힘내서 도전하다보면, 놀랍게도 꿈이 먼저 내게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정말로요.
"기적은 항상 극단에서 일어난다." 저는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힘내서 살아간다면, 어느 순간 기적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해답이 다가오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나는 되는 게 없는 사람인가봐... 라면서 자책이나 실망하지 않기를 감히 바랍니다. 나는 왜 하고 싶은 게 없는걸까... 라면서 남들과 몹쓸 비교를 해가면서 슬퍼하지 않기를 또한 감히 바랍니다. 매일을 힘내서 조금 더 노력하는 하루를 살아가다보면,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극단까지 가보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시인 T.S.엘리엇의 이야기로 마칩니다. "너무 멀리 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신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났을 때, 한 번 엄청나게 멀리까지 시도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