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2월1일/신앙의 승리(에스더7: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2. 2. 02:0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1일 주일 예배

신앙의 승리 (에스더7:1-)

오늘은 역시 지난주에 이어서 에스더서7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혀 하나님에 대한 언급, 기도라는 단어 자체도 들어있지 않은 정말 희한한 성경인 에스더서는 그러나 각종 흥미를 끌 문학적 요소들이 골고루 들어 있어 읽는이들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흥미뿐입니까 그 담담한 사실전개의 뒤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하며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을 받겠다고 하는 희망을 부어 줍니다.

어떤 이들은 에스더서의 내용이 너무 동화 같아서 마치 사실이 아닐것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사실입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이 일을 기념하여 이스라엘에서는 부림절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결코 이게 거짓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모르드개의 공을 알게 된 왕이 그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의 어마에 태워서 하만이 그 말꼬삐를 잡게하여 백성들의 앞에서 하루종일 유세를 하게하는 당시에서는 최고의 영예를 받은 것을 보았습니다.
자, 이제 오늘은 모르드개와 하만, 그리고 에스더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1절에는 왕이 하만과 더불어 이틀째 왕후의 개인적인 잔치자리에 나가는 걸로 시작됩니다.
이 잔치는 술을 마시게하기위한 잔치입니다. 왕은 술을 마시고 기분이 흡족해서 다시금 에스더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곧 허락하겠노라”
이 말은 이미 5:3에 나왔습니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면서 왕에게 나아갔을 때 왕이 자기의 금홀을 내어밀며 한 말입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이때 자기의 소원을 말하지는 않고 다만 왕과 하만이 자기의 연회에 참석해 주기만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단순하게 그 자리에서 말해서 이루어질 요청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좀더 아하수에로왕의 마음을 확고하게 사로잡기위한 계교일 수도 있습니다. 왕은 왕후의 요청을 너무나 알고 싶어서 하만을 급히 불러서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참여합니다. 그리고는 또 에스더의 소원을 물어 봅니다.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이 말은 3절의 내용보다 매우 진전된 것입니다. 3절은 제대로 번역한다면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또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집니다. 그러나 6절에는 구체적으로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라는 말입니다.

확실히 하루의 잔치가 왕의 마음을 더 애닳게 만든게 확실합니다. 이제 왕은 에스더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결코 자기의 소원을 말하지 않고 다시 하루의 연회에 왕과 하만을 초청하는 걸로 자기의 소원을 대신합니다.

이게 에스더의 인간적인 책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은 에스더의 이와같은 의도에 의구심을 품기도 하고 왕후의 요청이 무언지를 알고 싶은 호기심으로 마음이 촉급해 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만과의 관계는 상당히 의문으로 남게 만듭니다.

왕은 틀림없이 이 잔치가 뭔가 하만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왕후가 외간 사내를 아무리 총신이라지만 일개 신하를 왕과 왕후의 잔치에 그것도 야밤에 벌어지는 잔치에 이틀이나 연달아 초청할 리가 없겠기 때문이지요.
이때 에스더는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창피를 당한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분위기가 이제 무르익었습니다. 마침내 결단만 남은 것입니다.

왕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 아내의 소원이 무엇인데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것일까?
이제 마침내 왕후 에스더는 자기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충격적인 것입니다.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실로 놀라운 말입니다. 누가 자기의 아내이지 이 나라의 왕후인 에스더의 목숨을 노린단 말입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사실에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에스더의 소청은 이어집니다.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에스더의 자세는 명확합니다.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모르드개가 질책할때의 자세와는 전혀 다릅니다.

모르드개는 망설이는 에스더에게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라고 말했습니다. 민족과 자신의 생명을 동일한 선상에 놓지 않았언 에스더가 이제 스스로 자기와 유다인의 목숨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 같습니다. 나만이 잘살기위해 간구하는 것에는 우리 주님은 별로 관심이 크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 먼제 우리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에스더가 유다민족을 구하기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자기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동족의 목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려는 결단입니다.

에스더가 이렇게 말한 이유가 이어집니다.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에스더는 일부러 누구에게 팔렸는지 누가 팔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하만이 여기 있는 자기의 남편 아하수에로에게서 은 일만개로 샀지요. 유대인들을.
따지고 보면 남편이 아내를 은 일만개에 팔아서 죽이도록 내어준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황당한 일이지요.

그러나 에스더는 아하수에로의 이름은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왕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자기의 목적, 유대인의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서입니다. 에스더는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게 문제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하는 드라마는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왕에게 감성적으로 호소한 에스더는 이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왜냐면 왕은 이미 하만으로부터 은 일만개를 뇌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만은 유다인의 재물을 빼앗아서 이를 보충하고 더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단순히 감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왕에게 실리적인 측면을 들어 호소합니다.
유다인이 노비로 팔렸다면 왕에게는 아무런 손해도 없겠지만 이제 유다인이 진멸된다면 왕에게 손해가 너무 큰 것으로 도저히 보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손실이 노비로 삼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더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더의 이러한 말에 왕은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꾀하느냐고 묻습니다. 누군지 알기만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왕은 자기가 하만에게 한 약속을 잊어버린 걸까요?
이미 유다인을 멸하기로 한 조서를 반포한 사실을 잊은 걸까요?

왕의 이러한 확실한 지지에 힘입어 에스더는 원수의 이름을 말합니다. 하만이 자기의 원수랍니다.
그러자 하만은 왕과 왕후 앞에서 두려워했답니다. 하만은 어제까지만 해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영 좋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모르드개를 말에 태우고 고삐를 끌며 창피를 당했고 이제는 왕후의 입에서 자기가 왕후를 진멸하려는 원수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에스더의 마음속에서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꼭 꼭 숨겨두었던 하만의 이름이 사정없이 정죄의 대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에스더는 가장 효과가 극대화될때를 기다리며 하만의 이름을 감추었습니다. 한번, 두 번, 세 번째에서야 비로소 그는 하만의 이름을 내놓고 자기의 처지를 호소합니다.
‘하만이 저와 동족 유대인을 진멸하려 합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동족인 유다인을 살려 주십시오. 한 민족을 멸하려는 것은 왕에게 은 일만개의 이익이 아니라 도저히 벌충할 수 없는 손해입니다.’

하만은 좀 억울한 면이 있습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왕도 이미 내락하고 허락의 교서를 반포해 놓고 자기만 죽일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 일만개까지 받아 놓고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뭔가 자꾸만 어긋나고 있습니다. 유다인을 진멸하기는커녕 이제 자기의 목숨을 걱정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이후의 사건 전개는 좀더 극적입니다. 왕은 노하여 일어나 잔치 자리를 떠나 왕궁 후원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이때 하만은 왕후에게 엎드려 자기의 목숨을 구걸하려합니다. 하만은 벼슬아치 답게 눈치가 비상합니다. 왕이 지금 후원으로 나간 것은 자기를 벌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만은 에스더에게 엎드려 자기의 목숨을 구걸하려 합니다.

유다인을 멸하려던 하만은 이제 그 유다인 멸절 계획 때문에 자기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 그런데 하만의 이런 어슬픈 구명시도는 더 상황을 꼬이게 만듭니다.
왕이 후원에서 돌아와서 뭐라고 합니까?
“저가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가”

왕은 하만이 살려달라고 에스더에게 매달린 모습을 보고는 엉뚱하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왕이 보기에는 하만이 에스더가 앉은 걸상위에 엎드려있기 때문입니다. 영락없이 왕후를 욕보이려는 시도같습니다.
물론 왕이 제정신이라면 당연히 그런 의심을 할리 없지만 이 사람은 술도 되었고 상당히 변덕쟁이고 독재자이므로 자기가 본대로 그냥 상황을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옛날 페르샤의 의자라는게 우리로 치면 낮으막한 평상입니다. 여기에 배게같은걸 베고 길게 드러누워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서 보면 마치 하만의 행위는 왕후를 능욕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비스듬히 누워있는 에스더보다 더 머리를 낮춘다면 이건 완전히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구걸하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나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던 하만은 이제 더할 수 없이 낮아져서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오히려 그의 죽음을 재촉합니다. 왕후의 고발로 최대의 위기가 왔는데 하만은 그의 오해를 산 행위로 인하여 더 일찍 더 강력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왕의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군사들이 하만의 얼굴을 싸버립니다. 이제 하만은 사형집행을 위해 형장으로 끌려 갑니다. 하만이 그렇게나 뻐기던 권세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하만뿐만이 아니겠지요. 지금 하만의 집에 모여서 유다인을 멸절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그의 식구들과 가신들과 일당들도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9절은 심지어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여서 달려고 한 높이 오십규빗의 장대의 존재를 알게된 왕은 그 장대에 모르드개가 아닌 하만을 달라고 명합니다. 그리고는 하만을 장대에 달고는 노를 그쳤답니다.

우리 속담에 ‘남잡이가 지잡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마 표준어론 ‘제잡이’겠지요?
남을 잡으려고 무고하기위해 새벽에 들어갔던 하만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그날 밤에 남을 달아 죽이려고 자기가 준비한 장대에 달려 죽게 된 것입니다.

뭐 이야기는 계속됩니다만 오늘 본문은 여기까집니다. 이후에는 모르드개가 하만을 대신하여 총리대신이 되고 오히려 시세가 역전되어 유다인들을 진멸하려던 무리가 유다인들에 의해 진멸되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만의 모든 집은 모르드개의 관리하에 들어갔습니다.
아마 재산은 몰수되고 사람들은 노비가 되었겠지요. 아니면 죽음?

이제 오랫동안 기다림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인들을 구하려 무려 5년전에 에스더를 왕후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악한 여인 왕후 와스디를 폐하셨습니다. 와스디가 폐해지고 공석이된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또 삼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90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생에 비해 너무 오랜 기다림입니다. 갑갑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가장 극적으로 효과가 발휘될 때까지 상급을 주시는 시기를 늦추셨습니다.
심지어 원수를 징벌하는 시기마저 늦추셨네요. 그러나 인간의 눈에 그렇게나 늦게 보이는 바로 그 시점이 가장 효과가 극대화 되는 시점입니다.

기독교는 항상 ‘때가 차기까지’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때가 차기까지 모든 일을 미루시고 기다리십니다.
그 오랜 기다림 동안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점점 더 어려운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의 공로를 남이 가로채는 더러운 꼴을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때가 차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 전에 나의 목숨이 안전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가능한 일은 어느 것도 없습니다. 인생에서 만만한 것은 그 어느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후라도 왕, 자기의 남편에게 속사정을 호소하기가 이렇게나 어렵습니다. 하물며 남편이 왕이 아닌 일반 우리네 서민들은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합니까?

왕후도 이루기가 그렇게나 어려운데 다른 평범한 이들은 말해 무엇합니까?
왕궁의 수문장도 어쩌지 못해 베를 무릎쓰고 단신했는데 청와대 근처에도 못가본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그래요, 비록 우리가 세상의 권력자하고 친하지도 않고 돈이 무지 많지도 않고, 좋은 자리에 있지도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오직 우리를 말없이 이끄시며 보호하시는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말못한 소원이 있습니까? 인간 권력자가아니라 세상의 주관자이신 우리 아버지께 아뢰십시오. 나는 하늘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결코 멸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두려워 말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의 일은 지독히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보면 질투가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요 결국은 정의가 이깁니다. 결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나가는 성도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권세가 우리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전면에서 전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는 아무 말씀도 없으시며 잠잠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은 각자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 같고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네처럼 싸울줄 모르는 사람은 그러한 싸움판에 끼어들기도 두려운데 세상사람들은 잘도 싸우고 잘도 쟁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외감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필요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는 결코 나를 버리지도 외면하지도 아니하시며 그는 나를 배신하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비록 급박하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긍휼과 섭리를 믿고 당당하게 믿음위에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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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의문스러웠던 점은, 왜 에스더가 왕후가 되고, 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느냐 라는 점입니다. 바로 즉시 나타나서, 하만의 계략을 박살내고, 모르드개를 높이면 훨씬 좋았을텐데... 정말 꾹꾹 때가 차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모르드개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절망과 공황에 빠져있고, 하만은 자신의 꾀에 너무 신나서 즐거움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느껴집니다.

갑자기 몇 달 전, 동호회 지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계획하고,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허우적 거릴 때가 있더라고, 그런 바보 같은 일을 우리가 조심할 필요가 있어." 몇 번을 음미해봐도 참 지혜로운 말이다 싶었습니다. 당연히 저도 비슷한 삽질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최근에야, 미래를 알 수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이, 오늘을 충실히 산다는 것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지만, 예전의 저는 "언젠가 찾아올 좋은 날"을 위해서, 많은 것을 쌓아놓는게 더 현명하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날을 믿었고, 미래의 멋진 모습을 믿었습니다. 무척 쓰기가 민망하지만, 저는 꼭 이 꼴이 마치 하만 같다는 통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계획하는 정교한 꾀를 가볍게 제압한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때가 차면, 당신의 놀라운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에 대해서 결단하고,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에스더가 요구 받았던 것 처럼, 모르드개가 요구 받았던 것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반드시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다. 때로는 아무 선택을 하지 않는 것처럼 얼렁뚱당 넘어가는 것 조차도, 정확히는 "결단을 피하는 선택"을 한 것임을 명심해야 하고요.

어제는 충격적인 책의 연구결과를 보았습니다.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게, 70여개국을 조사해보니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타적인 행동양식"을 삶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타인의 행복, 사회적 정의, 동정심, 책임감 같은 가치가 - 부, 권력, 쾌락, 성취 같은 개인적 행동양식보다 -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 "사람이 가지는 의식"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에도 부귀영화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주 거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선하게 살아가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면, 이른바 내면의 신성함을 갖고 있다면, 왜 그토록 그 멋진 태도는 발휘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입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경쟁체제에서 승자가 되어야만 행복한 삶을 누리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을꺼라는 이상한 착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저는 얼마 전 절친 B군을 만나서 기묘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있잖아 B군,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는데, 옛날보다 하루하루가 참 즐거워." B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삶은 그렇게 알 수 없는 순간부터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아... 라고요.

그렇게 본다면, 굳이 특별한 날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요? 다르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기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힘내서 살아가도록 격려하시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며, 마음을 돌이키려고 노력하며, 초점을 하나님께 맞춰가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기쁘게 당신의 일을 나타내실 것이라 저는 믿을 뿐입니다.

하만처럼 자신의 완벽하고 지혜로운 꾀에 신나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르드개처럼 동족의 진멸 위기 앞에서 슬퍼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보며 사명적인 삶을 살 것인가?

높은 곳을 탐하고 열망하는 삶을 살 것인가? 낮은 곳을 살피며 돌아보는 삶을 살 것인가? 저로선, 솔직히 너무 답하기 어려운 곤란한 질문이지만, 적어도 하만 처럼은 되지 말자 라고 다짐합니다. 내 미래는 어차피 밝을 꺼니까, 너희 같은 듣보잡 (듣도 보도 못한 잡놈) 은 좀 비켜라... 라는 오만함이야 말로, 딱 하만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그렇게 괴물로 변해갈 수 있음을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나의 화려한 미래를 볼 것인가, 오늘 우리 이웃의 힘든 현실을 바라볼 것인가. 이 점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 201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