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처음 올드보이를 극장에서 봤을 때, 저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누군가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담고 있다고 말하였고, 누군가는 벽을 넘어가는 사랑에 대하여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만 해도, 한참 풋풋한 20대 였기에, 저는 멋진 해석을 해볼 역량이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감탄했을 뿐이었지요.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나는 것이 좁은 복도에서 괴물 같은 최민식이 싸우던 장면, 내가 웃으면 세상 모두가 웃을 것이라는 대사, 잘못된 질문으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유지태의 일갈 정도가 제법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때마침 영화채널을 통해서 올드보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재미는 물론이고, 생각의 다양한 힌트를 파격적으로 던져주는 구성까지, 정말이지 천재 박찬욱 감독이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예컨대 고전 소설 어린 왕자처럼, 10년에 한 번씩,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는 한국 영화의 전설이 아닐까 합니다. 여하튼, 생각난 김에 리뷰를 후다닥 남겨보려 합니다.
독방에 갇혀서 15년간의 세월을 빼앗겨버린 남자 오대수. 그는 복수를 다짐하며, 현실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범인을 찾는, 스릴러 풍의 전개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빠르게 전개됩니다. 그 모든 과정이 사실은 도청되고,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 서서히 밝혀지는데요.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사람이 최면을 통해서 사고의 흐름, 행동의 흐름이 통제받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금 과장되게 쓴다면, 과거의 경험에 따라서 현재의 선택이 지배받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최면술사에 의해서 오대수의 생각이 통제받지만, 현실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최면을 걸기도 하고, 또는 거짓말 조차 반복되면 진실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면, 개구리 비유가 있습니다. 개구리를 넣고 서서히 물을 끓이면, 개구리는 온도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열탕 속에서 죽어버린다는 비유가 있는데, 실제로는 픽션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사람도 온도변화에 예민해서 환절기에는 감기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은데, 개구리 역시 온도 변화를 모를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워낙 여러차례 개구리 비유를 접하다보면, 정말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떡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의식이란, 그렇게 볼 때 얼마나 가볍게 느껴지는지요. 질문하고 의심하기보다는, 순종하고 착하게 살기를 교육받아 왔기에, 우리의 의식은 과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화의 멋진 표현을 빌리면, 상상해보기는 잘하지만, 용기내어 살기는 두려워 합니다.
한편, 극중의 매력적인 악역 이우진이 보는 세상은 가벼운 느낌을 주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이고, 잘못을 저지른 인간은 태연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었기에, 우진은 스스로 인간을 벌하는 신의 영역에 다가섭니다. 그 대상은 바로 오대수 였지요. 오대수학을 전공했다는 짧은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오대수를 증오했는지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힌트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이우진은 오대수가 가장 고통스러워할 장면을 계획했고, 실천에 옮깁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던 것은, 오대수와 미도가 생각보다 매우 간단하게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아저씨뻘 되는 심한 나이차이도 쉽게 극복되었으며, 외로움을 지독히 타는 두 사람은 치명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서로를 완전히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조금 과하게 쓴다면, 이우진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얕잡아 봐서 실험에 돌입하는데, 실제 계획보다도 훨씬 더 사람은 약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그래서 올드보이에 대한 거부감이 어느정도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근친이라는 무거운 주제와 함께, 가볍게 조종당하는 사람의 비극적 모습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야, 사람은 작은 계기로 인해서 행동양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올드보이의 뼈아픈 직언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으며, 반대로, 말 한마디로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어떤 말을 담으며 살아갈 것인가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몫이 아닐까 합니다. 말을 우습게 여기는 자는, 그 말로 망할 수 있음을 올드보이는 자극적이면서도 진지하게 되묻고 있습니다. "그대, 타인의 인생 비웃기를 즐거이 하지 않았는가?" 이런 질문이 어울리는 영화였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슬픈 인물은 미도가 아닐까 합니다. 극중 오대수의 절규처럼, "그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냐" 라고 항변하는 모습과, 스스로를 벌해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지키려고 하는 모습은, 진짜 사랑의 모습을 한가득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진은 진정으로 누이를 사랑하지는 않았음을 재차 깨닫게 되고, 생의 의미를 잃고 자살을 선택하는 과정까지 모든 것이 정말 처절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의 의미 발견은 "타인을 통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제 아무리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막대한 부를 얻는다 한들, 비겁한 선택을 했고, 의미 있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결국 자기만족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에 비해, 오대수의 삶은 뻔뻔한 악인의 삶으로 출발하지만, 살아갈 권리는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오대수는 세월을 잃었으며, 말을 잃었으며, 아마 가난하게 살아갈 테지만, 그에게는 단 한 사람이 존재하고 있기에, 소중한 이를 지켜낼 수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봤습니다.
눈에 확 띄는 성공을 거두어라, 그러면 모든 게 저절로 다 따라온다 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20대 시절은 참 빨리도 끝나버렸습니다. 점점 평범에 가까워져 가는 30대 중반이 되고, 낭만 대신에 현실적 선택을 거의 절대적으로 강요받는 하루를 살아야 한다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하는 타인의 존재" 가 아닐까 합니다. 그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잔혹하게 군다고 할지라도, 세상이 나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 들어오면서 비난을 해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사랑 받는 존재임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카프카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목이지만, 사람은 바퀴벌레처럼 쓸모없는 역할이 되어버리면, 곧바로 버림받고 외면받고 비난받기 쉬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비록 그런 날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그 인생은 여전히 아름다운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고 저는 믿습니다. 올드보이가 살아갈 힘을 주는 영화라고 조금씩 느껴졌다는 것이, 어쩐지 신기했습니다. / 2013. 11.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