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1월24일/왕이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하다(에스더6: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2. 1. 14:40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24일 주일 예배

왕이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하다 (에스더6:1-11)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에스더서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에스더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어떤 소설보다 더 극적이며 스릴이 넘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다른 성경본문과는 달리 중간에 생략된 부분이 적고 일의 진행상황을 아주 자세하게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본문에 이어 5장을 살펴보아야 하지만 5장에는 에스더가 왕과 하만을 연회에 초청해서 뭔가 일을 꾸미려고 하는 내용으로 밋밋하기 때문에 이건 생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왕후 에스더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해서 너무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낸 왕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잠이 오지 않아서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읽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궁중일기지요. 왕실의 대소사와 왕의 말과 행동 같은 것들을 기록한 왕실 역대일기입니다.

그런데 5장의 하반부와 6장의 전반부는 같은 시각이고 장소만 다릅니다. 그래서 1절의 “이 밤에”라는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에스더가 유대인을 살리기위해 머리를 쓰고 있는 그 밤, 하만은 유대인을 멸절시키기위한 계략을 짜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유대인을 멸절시키기 전에 바로 날이 밝는대로 모욕을 주고 죽이려고 계획을 꾸밉니다.

앞장에 나온 내용으로는 오십규빗이나 되는 높은 장대에 달아서 죽이는 걸로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바로 그 밤에 유대인의 생사를 쥐고 있는 왕은 잠이 오지 않아서 역대 일기를 가져다 신하로 하여금 읽게 합니다.
어떻습니까?

성경본문은 너무나 자세하게 각각의 개인들을 찾아 다니며 이 일의 전개과정을 자세하게 기술합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여기에는 하나님이나 기도나 성령의 은총같은 말은 일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자기들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기위해 머리를 굴리고 음모를 꾸미며 불안에 떠는 내용만 나와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가 흐르고 있음을 압니다. 무엇하나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일어 날 수 없습니다.

잠이 오지 않은 왕이 궁중의 잡다한 일들을 기록한 역대일기를 가져다가 읽게 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 정말이지 우연히 그러나 철저하게 하나님이 계획하신바 대로 신하는 역대일기 중에서도 모르드개가 일전에 세운 빅단과 데레스의 왕 암살음모를 적발한 부분을 읽게 됩니다.

빅단과 데레스는 왕궁문을 지키는 내시로서 국왕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는데 이를 모르드개가 알게 되었고 사전에 고발함으로 왕을 구한 공로를 역대일기에 기록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모르드개는 대단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반란음모의 뒤처리에 급급하여 미쳐 모르드개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단 것을 뒤늦게 인식한 왕은 신하에게 묻습니다.
“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당시에 모르드개에게 뭔가 해준게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신하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
바로 이 말이 중요합니다. 당시 모르드개가 아무리 적은 상이라도 그 일로 인하여 상을 받았다면 왕은 “아, 그래, 그 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갈 수가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원한은 오래기억해도 은혜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 버리고 자기가 받은 원한은 아주 크게 생각하고 받은 은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 때문이지요. 아니할말로 자기의 목숨을 살린 일이지만 ‘신하가 당연히 그리해야지’라는 말로 넘어 갈 수도 있는 일입니다.
자기위주로 생각하는 폭군의 경우에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앞의 2:23에 “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지 궁중 일기에 기록은 했지만 어떠한 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하만은 벼락출세를 하고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당시 모르드개는 많이 서운했을 것입니다. 왕의 암살음모를 미리 적발해서 왕의 목숨을 구한 큰 공을 세웠음에도 아무러한 상도 없이 다만 역사에 기록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그런데 5년이 지난 이날 밤에 , 모르드개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바로 이 구절을 읽게 된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가장 극적인 영예를 모르드개에게 주고 또 모르드개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를 주께서 기다리신 거지요. 즉 가장 좋은 때를 골라 모르드개의 지난 공적이 알려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공을 세웠는데 세상이나 직장이나 교회가 알아 주지 못해서 섭섭한 분들이 있다면 아마 이 일로 인하여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려고 때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르드개의 이 공은 매우 큰 것입니다. 자그마치 왕의 목숨을 살린 은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이 일을 듣자마자 바로 물어 보는 것입니다.
모르드개에게 어떤 상을 베풀었느냐?

왕은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살린 모르드개에게 가장 좋은 포상을 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이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냥 물어본 것입니다. 당연히 엄청난 포상을 해주었겠지하고 물었는데, 그런데 들려오는 대답이 신통치 않습니다. 이렇게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어떠한 보상도 없었다고 합니다. 모든 전제국가는 마찬가지겠지만 당시 페르샤에서는 이러한 공신들은 명부에다 기록하고 특별히 높은 포상을 하며 이를 왕은 반드시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에도 반역을 고변하는 자는 엄청난 포상을 해주었습니다. 페르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자기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누가 뜰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게 아무도 없느냐?”
자, 그런데 그때 뜰에는 누가 있었느냐 하면 바로 모르드개를 죽여서 오십규빗높이의 장대에 달려고하는 하만이 바로 그 계획을 승인받기위해 바깥 뜰에 당도했습니다.
얼마나 모르드개를 증오했으면 새벽에 여하튼 정무를 시작하기도 전의 시간에 왔을까요?

임금님이 정무를 시작하자마자 들어와서 허락을 맡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만은 스스로의 권세와 영화에 취해서 자기의 눈에 가시인 모르드개를 죽이지 않고는 도저히 한시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그렇게 빨리 왕의 침천 바깥 뜰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성경 5절에 보면 왕의 시신이 “보소서, 하만이 뜰에 섰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보소서’라는 말에서 신하의 기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찍 하만이 올 리가 없는데 그가 와 있으므로 왕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어서 기쁜 것입니다. 보통은 이 시간에는 하만이아니라 여느 중신도 나오지 않을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시신(내시)은 하만 만을 언급하기 때문에 다른 중신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때를 맞추어 올 수가 있을까요?

왕은 아마 바깥 뜰에 하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당직을 서는 신하나 내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인데 마침 하만이 그곳에 있다가 왕의 부름에 응해서 왕앞에 나옵니다.
하만은 마치 잘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왠일이냐? 내가 한시라도 빨리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는 마음이 하늘에 닿았나?’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하만은 마침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모르드개의 처형계획을 승인받기위해 왕앞으로 나왔습니다. 모르드개 역시 왕궁의 고관이므로 함부로 모르드개를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왕의 허락이 받드시 필요하지만 어차피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집행날짜 이전에 한명을 빨리 죽이는게 뭐 대숩니까?
쉽게 허락이 떨어질걸로 예상한 하만은 자기의 용무를 이야기하려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왕이 묻습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요즘 왕이 가장 총애하는 사람은 하만 바로 자신입니다. 하만은 왕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고 하는 줄 알고는 자기 생각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앞에 왕이 내시에게 물었던 질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관작”이란 말이 없거든요. 만일 이 말이 있었다면 하만은 자기가 아니라 다른 이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았겠지만 관작이란 말이 없이 다만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만 언급했기에 착각을 한 것입니다. 총리대신이 높아 오르면 왕좌밖에 없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나 말고 누가 있겠느냐?’고 생각한 하만은 가장 멋진 포상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자기의 관점에서지요.

하만이 요구한 것은 크게 대중들 앞에서 명예를 뽐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약간은 불순합니다.
왕복을 입히고 왕의 어마에 태워서 가장 높은 신하가 그 고삐를 잡고 성중을 돌며 외치게 하는 것이지요.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이때 그가 타는 말은 어마임을 상징하는 머리 장식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왕이 타는 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앞터이니까요.

게다가 이를 왕의 가장 존귀한 신하가 말고삐를 잡고 다니며 성중에서 외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니라”
페르샤의 기록을 보면 왕은 왕복을 총애하는 신하에게 내리는 일이 있었지만 이를 입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고합니다.

성경에서 애굽의 왕복을 입은 요셉과 요나단의 태자복을 입은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 예가 있기는 합니다만 페르샤에서 이는 매우 드문 일이고 그만큼 굉장한 영예였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왕이 지금 입고 있는 왕복을 입히고 왕이 타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왕의 어마라는 표시 장식을 한 말을 태워서 가장 존귀한 신하가 끌고 다니게 한다면 이는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하만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이가 자기라고만 생각했기에 정말 어마어마한 포상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말고삐를 잡은 말구종을 왕의 가장 존귀한 신하에게 맡기고 또 소리를 외치게 하는데 백주 대낮에 성중을 돌아 다니면서 하게 한다는 것은 이건 너무 파격적입니다.
이만하면 왕과 동급의 영예입니다. 신하가 바라기는 너무 과분합니다. 그런데도 하만은 이러한 영예를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자기가 그 영예를 받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간밤에 왕후가 신하중에서는 자기만 초대했잖아요. 왕과 하만 만 초대해서 연회를 베풀었고 다음에 또 왕과 하만 만을 초대한다고 했기에 이런 착각이 더해진겁니다. 왕후가 나의 영예와 권세를 인정했구나!

이렇게 보면 왕은 왕후의 이런 이상한 일에 대해서 번민했기에 잠을 이루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왕후가 개인적인 연회에 왜 하만을 초대했을까?
그것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왕실 법도를 어기면서까지 그러한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혹시 왕은 하만과 왕후의 불륜을 의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왕은 왕후마저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하만의 권세에 위협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왕은 매우 변덕쟁이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때로는 지나치게 잔인했다고 합니다. 이런 폭군들은 보통 남을 잘 의심하고 남이 자기의 존엄을 해치는지에 과민합니다.
그런데 왕의 대답은 어떻습니까?

그 영예를 받을 사람이 모르드개이고 그 말고삐를 잡고 외치는 사람으로는 자기가 지목되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나 죽이려고 하고 지금 그를 죽이려고 계획을 세워서 왕의 허락을 구하려고 들어온 그 자리에서 자기의 원수는 왕복을 입고 왕의 어마를 타고 영예를 얻고 그 말고삐를 자기가 잡고 외쳐야 한다는 것은 정말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악몽이지요. 자연히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는 계획을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왕이 말하는 10절을 보세요. “대궐 문에 앉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
분명히 왕은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왕은 지금 며칠 있으면 죽게 될 모르드개를 위해서 생명을 살려 주는 것이 아니라 말에 태우고 왕복을 입히고 하루 유세를 떨게 하고 마는 포상을 내린다는게 좀 이상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왕이 그렇게나 고마워한다면 응당 유다인을 멸하려는 계획을 포기해야지!
음 왕이 폭군이라서 변덕이 죽끓듯한다고 했지요?
어쩌면 왕은 하만이 말한 한 민족이 유다민족인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뭐 이런 황당한 일이 다 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경 본문에 하만은 유다인을 멸절할 계획을 세울 때 한 민족이라고만 말합니다.

이게 엄청 큰 일 같지만 모두 127개의 도와 민족이 있는 나라에서 한 민족을 없애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왕은 뭐든지 즉흥적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전혀 앞뒤를 생각지 않습니다.

아마 왕은 이때 이미 하만을 내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드개의 민족에 대해서는 왕실 일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알았다 하더라도 모르드개에 대해서 왕의 내시들이 이야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르드개와 하만간의 갈등과 이로 말미암은 유다인의 멸절계획. 지금 모르드개가 베를 입고 재를 뿌리고 대궐 문에 앉아 있기에 이는 당연히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왕은 하만을 더 모욕주기위해 일부러 모르드개의 말고삐를 잡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만은 여기에 어떠한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게 자기가 자기 입으로 “왕의가장 존귀한 자의손에 맡겨서...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보면 단지 왕은 자기와 모르드개의 갈등을 알지 못하고 모르드개에게 영광을 주기위해 왕의 신하중에서 가장 높은 하만에게 그 일을 시킨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만입장에서 이는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자기와 모르드개의 갈등관계를 아는 사람들이 보기에 자기의 권세가 모르드개에게 뒤쳐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니 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모르드개는 왕후가 준 새옷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제는 왕후가 준 옷이 아니라 왕이 준 옷, 그것도 왕이 입는 왕복을 입게 생겼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고난을 무릎쓰되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일하면 더 큰 영광으로 옷입히십니다.

여하튼 그날 하루종일 하만은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그를 왕의 어마에 태운채 자신이 직접 말고삐를 잡고 성중을 돌아 다니며 왕의 명령대로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것이라고 외치고 돌아 다녔습니다. 아마 난생처음 하는 일이라서 창피하고 피곤하고 부끄럽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의 원수를 말에 태우고 종처럼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다니며 소리를 질렀으니 그날 하만은 최고의 자리에서 최악의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12절에 성경은 “하만은 번뇌하여 머리를 싸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서”라고 말합니다. 모드르개의 반응은 여기 기록에 없습니다.
성경은 보면 어떤 곳은 너무 자세하고 어떤 곳은 너무 대충넘어 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뭔가 현상이 바뀐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유세가 끝나고 모르드개는 원래의 자기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왕궁 문으로. 그는 왕궁 대문의 수문장입니다. 아니면 조금 더 높여서 근위대장?
그에게는 영예만 주어졌지 더 높은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다인을 멸하려는 왕의 조서가 폐하여 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이 눈에 보입니다.

왕이 아무리 막나가는 막가파라고 해도 설마 자기가 이렇게나 영예를 주어놓고는 몇일만에 죽일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일을 직접 왕에게 고한 이는 왕후 에스더입니다. 유다인들이 자기의 목숨을 구한 일에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 아무리 독재자라도 이를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유다인을 전부 멸절시키고 모르드개까지 죽인다면 백성들이 누가 있어 왕에게 충성하고 왕의 암살 음모가 다시 일어날 때 이를 고발하겠습니까?
왕이 왕자리를 제대로 보존하려면 당연히 이러한 큰 공을 세운이를 박대할 수 없는 법입니다. 이게 통치의 기본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본문을 더 이상 나가지는 않고 한주를 더 기다리려고 합니다. 대미를 장식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란한 승리를 남겨두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말 극적인 한편의 드라마를 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렇게나 극적입니다.
가장 최악의 나락에서 하나님은 들어 올리시는데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절망 중에 좌절하며 하나님께 울부짖는 이가 있다면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나를 가장 영화롭게 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소망 중에 하나님을 붙드시고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나를 외면하시고 잊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위해 지금 면밀하게 모든 때를 조율하고 기다리고 계실뿐임을 믿으십시오.

나는 어려움가운데서도 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의 놀라운 능력이 나를 보호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원망하며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너무 낮게 떨어졌다면 내가 오를 자리는 너무 높을 것입니다.
내가 너무 불행한 것 같다면 나에게 닥칠 행복은 너무나 굉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1월 2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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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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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미래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흥미로운 소설책과 비슷한 것이 인생이라면, 그 결말을 미리 엿볼 수가 없으니까요. 초반부가 지루하거나, 비극적이라고 해서, 책을 당장에 덮어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습니다.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축구를 시작해서 전반전에 한 골 먹었다고 해서, 좌절하고 후반전을 포기해 버린다면, 그건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지요.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 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거창한 계획이나, 거대한 날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오히려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그 어느 날, 놀라운 일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조금만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오늘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더 행복해 질 수 있기를... 불확실한 미래와 통제되지 않는 환경 앞에서도 꿋꿋하고 성실할 수 있기를... 요즘의 저의 희망사항 들입니다. 추운 날이 있기에 따뜻한 날의 소중함을 더 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 어려운 날이 있기에, 그 속에서도 삶의 초점을 발견해 나간다면, 그렇게 의미 있는 하루가 매순간 이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 201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