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29일 주일 예배
은밀한 가운데 구제하라 (마태6:1-4)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들이 이웃에 나누기를 힘쓴 것을 듣고 있습니다. 몇몇 대형교회같은 경우에는 추문으로 기독교회를 상처주고 있지만 비록 신문이나 텔레비전에는 나오지 않아도 이웃을 잘 섬기고 있는 교회들을 알고 있습니다.
성탄절 헌금은 전액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하나님의 공의와 통치가 이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성탄절에 자기들의 먹을 것을 절약하여 성탄절 헌금에 보태서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들 덕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더 확장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으로 기쁩니다. 왜냐면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규례요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건전한 교회가 많아지므로 반드시 이땅의 교회는 다시 부흥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들 때문에 이 땅의 많은 이들이 행복해 질 것을 또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제할 때에 은밀하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이 제일 처음에 나옵니다. 그래요, 바로 이게 문젭니다. 아무리 우리가 의를 행하고 이웃과 나눈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나누는 것이거나 주님의 은혜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에서가 아니고 단지 내가 , 우리가 이렇게 착한 일을 한다는 소위 “사람에게 보이려고”이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상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교회의 착한 일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그래서 교회와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한다면 교회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나아가 전도의 귀한 씨앗을 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굳이 동네방네 자랑할 필요는 없지만 숨길 필요도 없지 않겠어요? 슬쩍 슬쩍 언론에 흘리거나 아는 언론인들에게 기사를 실어 주도록 할 수도 있는거 아닙니까? 좋은게 좋은거라고 교회에 대한 나쁜 소식들만 퍼지고 있는데 이런 멋진 일들도 좀 퍼지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여기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십니다. 허허, 참. 아니 우리가 우리만 좋자고 그렇게 광고합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서 광고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영광받으시도록 광고하는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상을 받았다고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실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엄격하게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율법엄수의 생활을 하는 바리새인들이 백성들로부터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지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바벨론과 앗수르에 멸망하고 포로생활70년을 겪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처럼 자기들이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오게 되자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이 더 강해졌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민사상은 민족적 배타주의로 흘렀고 율법을 엄수하려는 행위는 율법의 기본 정신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형식주의로 흘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왜 하나님이 자기들을 택하셨는지 왜 성경이 이웃에게 구제하라고 하신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자랑하기 바빴고 선민의 행동지침인 구약성경에 따라서 구제를 의무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게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법은 엄격히 지켰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게 율법이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소수의 부자들과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된 당시 시대상 소수의 부자들의 자선 행위는 가난한 이들에게 큰 칭송을 받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율법주의가 나아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칭송을 받으려는 위선으로 흐르게 된 것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라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아까워 벌벌 떨면서도 대범한척 은화를 뿌려대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라는 구절이 제일 먼저 나오지만 원문에는 “주의하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실생활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을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결국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러면 구제의 효과가 없다는 거지요.
이미 너희가 상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상을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껏 구제하고 아버지로부터 상을 못받을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글에서 우리는 구제를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상에 따른 부상, 즉 상품이 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상이 있는 것 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상을 안주신다는 겁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서는 구제를 말하고 있지요. 구약 외경인 토비아서에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해야 할 3대 경건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구제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해야 할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제에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답니다.
이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주의할 점대로 남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구제를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늬앙스를 풍깁니다.
우리는 앞에서 기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의 상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제도 하나님의 상이 있다고 합니다.
다음에 보겠지만 금식에도 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의를 행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을 주시네요. 너무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성경의 문맥상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는 분명히 상이 따릅니다. 주는 상을 안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에서는 구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요 여기에서 ‘구제할 때에’ 라는 말을 ‘만약 구제를 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그러므로 라는 말이 바로 ’확실히‘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식으로 새로 번역한다면 ‘각사람은 반드시 구제를 해야 하는데 구제를 할 때는’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유대교도들은 오늘날의 교인들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 사람들은 적어도 구제를 반드시 시행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당시에 구제를 하는 사람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구제하고 또 이를 남들이 알도록 나팔을 불 듯이 자랑까지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자기의 구제를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은 당시에 구제하는 자들은 자기가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때에 나팔 부는 사람들 데려다가 나팔을 불게 했다고도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광장이나 사람 많은 거리에서 갑자기 나팔이 울리면 ‘아 또 누가 구제를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어지는 말은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입니다. 여기서 ‘받았다’는 말은 ‘어떤 것을 받고 영수증을 주다’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떤 것을 의미하느냐면 본절에 등장하는 외식하는 자는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돌아오는 확실한 반대 급부가 없으면 구제를 하지 않는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사실 그럴 경우가 많습니다.
뭐라도 나에게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받으려고 하는 거지요. 이게 뭡니까? 뇌물이지요. 자기의 일을 잘되게 하기위해 기름을 칠하는 거지요. 외식으로 구제하는 자는 인간들의 즉각적인 칭찬을 원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정치꾼들은 이런 식의 보이는 봉사를 많이 합니다. 연말이나 선거철만 되면 불우이웃 시설들이 미어터지도록 봉사하러 다니다가 연말이나 선거철이 지나면 언제 그랬드냐는 듯이 조용합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방송용 카메라가 돌아 가야 부드러운 웃음과 가식적인 미소가 나오지 평소에는 가난하고 병약한 자들을 벌레 보듯 하는 이들이 바로 외식하는 이들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름보일러가 대세로 자리잡은 시절에도 여전히 이들의 봉사는 연탄을 나누는 것인 이유가 바로 이런 겁니다. 연탄을 배달하는 것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지요. 쉽게 말하면 이게 바로 사람들에게 더 진실되고 힘든 봉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름을 필요로 함에도 굳이 연탄을 나누어 주는 이유인 것입니다.
물론 외식으로 구제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좋습니다. 이들에게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상’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 보시면 2절의 끝에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 정말 구제를 많이 하네!”
“어떻게 저렇게 자비가 많은지 저런 사람이 한자리 해야지!”이렇게 칭송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상이라는 말입니다.
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어가며 구제하지 말라고 하신 우리 주님은 어떻게 구제해야 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런데 원문에는 ‘손’이란 말이 없습니다. 즉 ‘너의 왼쪽 너의 오른쪽’이란 말입니다. 손이란 말은 우리 성경번역자들이 첨가한 말입니다. 그런데 원문에 손이란 개념이 생략된 이유는 추상적인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행위로 이루어지는 구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동정이나 혹은 구제의 계획 조차도 은밀히 하라는 말입니다. 좀 웃깁니까?
자기의 마음조차도 속일 정도로 은밀히 하라는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일반적으로 오른편은 선한 쪽을 왼편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이는 일시적으로 선한 충동이 일어나서 구제를 하려고할 때 은밀하고 신속하게 구제를 하지 않으면 어느틈엔가 구제를 아까워해서 못하게 하는 악한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악한 충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은밀하고 신속하게 구제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딱한 것을 보고 일시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구제를 결심했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물질이 아까워져서 구제를 하기 싫어지는 일들이 충분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생길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구제를 하라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남이아니라 내배만 불리면 된다고 하는 쪽으로 몰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제를 은밀하게 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은밀한 중에 계시고, 은밀한 중에 보시며, 은밀한 중에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칭송이라는 상을 받지 않았기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더 크고 놀라운 복으로 상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의 칭찬 몇마디하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상과 바꿀려는 어리석은 이들은 안계시겠지요?
그러면 은밀한 중에 구제하십시오.
마지막 본문을 다시 해석한다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뭐냐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 그가 공개적으로 네게 갚으시리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 역본에는 생략된 ‘공개적으로’ 라는 말이 더 들어간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를 행하면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게 갚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상주신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약속입니다.
상은 상품도 정해지지 않았고 상 주는 사람이 임의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냥 공적을 적은 증서인 종이 쪼가리 상장만 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빚을 갚을 때는 반드시 빚진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자가 포함되니까요.
그리고 이 빚은 상보다 더 엄격한 개념입니다. 돈을 빚졌으면, 돈으로 목숨을 빚졌으면, 목숨으로 곡식을 빚졌으면, 곡식으로 건강을 빚졌으면 건강으로 갚아야 하며 더 가치 있고 넘치게 갚아야만 합니다.
이 말은 앞에서 ‘상 준다’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복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구제했다면 더 크고 놀라운 것으로 더 가치있는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가난한 이나 억울하고 약한 이에게 구제한 것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빚진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얘야, 내가 주기 전에 구제함으로 네가 먼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구나! 고맙다. 내가 이번에 너에게 빚진 걸로 하자. 그리고 머지 않은 장래에 내가 너에게 더 크게 갚아 주리라! 아주 센 이자를 포함해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제해야 합니다. 그것도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의 마음속에 구제에 대한 충동이 떠오르면 혹시라도 악하고 아까운 마음이 생기기전에 은밀하게 구제하시면 그 구제가 바로 하나님에게 빚을 지우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상도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빚을 지워서 그 빚의 원금과 아주 넉넉한 이자까지 받게 될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구제하시고 은밀한 중에 기도하시고 은밀한 중에 금식하십시오. 내 아버지의 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고 우리가 그곳에 사용한 시간과 노력과 재물을 아주 높은 이자까지 쳐서 풍족하게 도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의는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는 것이 더 상이 큽니다. 그러므로 당장 이 일로 인하여 나에게 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결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에게 빚을 지워두는 행위이고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부유하시고 자비하시며 긍휼이 넘치는 분이기에 차고 넘치도록 이자까지 쳐서 퐁족하게 갚아 주실테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오늘 내 눈에는 이게 정말 별볼일 없이 보여도 우리 주님은 은밀하게 보시면서 우리에게 더 많고 더 좋은 것으로 주실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하십시오. 그것도 은밀하게 남이 모르게 구제하십시오. 구제 역시 우리가 쌓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의가 될 것이며 그 의가 우리에게 놀라운 복을 가져다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복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며 특별한 것으로 한정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돈이나 금은보화가 아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 내용이 풍성하고 가치가 귀할 것입니다. 건강, 사랑, 행복, 영예, 승진, 합격 등등...
하나님의 상이 한정된 것이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원금에 아주 넘치는 이자가 포함되어서 우리에게 돌아 올 거라는 사실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의도 행하고 경건한 성도도 되고 하나님에게 빚도 지워두고 마지막으로는 우리 아버지의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2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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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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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목사님이 설교 중에 강조한 대목 중에는, 마음이 들 때, 바로 즉시 하라 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조금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어 내가 언제 그렇게 멋진 일을 했지?" 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만큼, 바로 즉시 선한 일을 해버리라는 것입니다. 망설이고, 갈등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이미 늦습니다.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줄줄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하고도 후회가 들 때는? 당연히 있습니다. 솔직히... 아까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경험이 쌓이고 나면,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더 크게 되돌아 온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선의가 악의로 돌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조금 고생스럽더라도, 타인을 생각하는 결정을 한다면, 그것이 곧 축복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2013년 연말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오래도록 잘 쓰던 펜이 낡았는지, 더 이상은 깨끗하게 나오지 않아서,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 괜찮은 펜을 하나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목사님이 새해를 기념하며(?) 난데없이 펜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껏 글쓰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오랜 꿈이 2014년 새해 첫 날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어찌할 바 없이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조금 과장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찔끔찔끔, 소박하고 작은 정성 정도일 때가 대부분인데, 저는 너무 과한 것을 받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새해에는 주어진 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1세기는 흔히, 컴퓨터 한 대와 작업공간이 있으면, 산업사회의 공장을 소유한 것과 같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어떤 청지기가 될 것인가? 같은 중요한 질문 앞에 마주서게 됩니다. "좋았어! 열심히 공장을 돌려서, 거대하게 만들어서, 위엄스럽게 보일 것인가?" 글쎄요, 이건 너무 유혹적인 것 같습니다.
이십 몇년을 연락하고 지내온, 오랜 절친이 전혀 뜬금없이 "올해가 인생 최고의 기회로 보내기를 바란다"며 과격한 애정을 표현해 옵니다. 하여간, 너무 많이, 너무 자꾸만, 그저 받기만 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고, 잘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 축복스러운 관계 속에 동참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피하지 않는 것. 거기에서 도망치지 않는 것.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들 때마다, 해보는 것. 가장 중요한 일들을 해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게 은밀하게 남을 위하는 장면 장면을, 하나님께서 너무 기뻐하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를 키워나가며, 그 아이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커가는 것을 직접 목격할 때의 벅찬 감동 같은 거랄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라는 말에는,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14.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