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월 12일 주일 예배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애굽기20:12)
오늘 신년 둘째 주를 맞이하여 제가 볼 말씀은 십계명 중에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효도
한때 우리나라에서 충성과 더불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녔던 효도란 말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 효도는 매우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경의 기본 개념인 늙음에 대한 찬미는 시대착오적인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백발 앞에 일어서라’느니 수염이 난 사람을 뜻하는 장로(자켄)의 의미는 이제 빛이 바랬습니다.
모든 이들은 젊음을 찬미하여 불노를 꿈꾸고 있습니다. 최소한 노화를 지연시키려고 별별 노력을 다 합니다.
심지어 얼굴에 늘어나는 주름을 펴기 위해 보톡스 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젊어진다고 하면 가격을 생각지 않고 사서 바르고, 먹고, 운동을 합니다. 요즘 인간의 모든 활동은 늙지 않는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한말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세상에서 한국의 노인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외친 그 아름다운 모습은 이제는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직도 효부에 대한 표창이나 칭찬이 간간이 있기는 하지만 효부에 대한 표창과 칭찬이 기사화된다는 자체가 이미 그런 효를 찾아보기가 어려워 졌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은 늙게 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늙음을 우리는 애써 부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해 아래 사는 우리들은 그 누구도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하려 하고 회피하려 해도 결국 어느날 흰머리와 주름진 얼굴을 마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늙음에 대한 비관과 젊음에 대한 숭상에는 인간의 쾌락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숨어 있습니다.
자 이건 천천히 보기로 하고 일단 성경의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먼저 오늘 본문은 “공경하라 네 부모를”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공경하란 말은 원문 상으로는 ‘반드시 존경하라, 절대적으로 존귀케 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공경하라’는 말에서 ‘공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경외한다’는 문맥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부모를 경외하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굉장하지요?
성경의 관념으로 부모는 이땅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권위를 지닌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대함에 있어 하나님을 대함처럼 해야 하고 섬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만 유일하게 네 부모를 공경한다면 어떠한 보상을 받을지에 대해서 적어 놓았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굉장하지요?
‘길리라’고 되어 있지만 길어 질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원문 상으로는 ‘길게 하여 주겠다’는 뜻입니다. ‘연장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장수하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장수란 말은 단순히 생명이 길어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돈도 없는데 고독하고 병들고 돈없이 오래 살면 그런 딱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생명이 길어지는 장수와 그 기간 동안에 충분히 사용할 재물까지도 그리고 그걸 잘 사용하게 건강도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도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뭘 하면요? 효도하면.
네 부모를 공경하면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여기 십계명에 당당하게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부모 공경에 대한 기록은 신약성경 에베소서6:1-3절까지에도 나와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는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제 5계명입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려 4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4개는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계명입니다. 인간사이의 계명으로는 바로 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첫 번째라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도 보면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우리가 십계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에 관한 계명말고 인간에 관한 계명은 바로 이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지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고.........모두 하지 말라는 말로 끝이 나는데 유일하게 이 계명만은 ‘~하라’고 끝이납니다.
그리고 하면 복을 준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건 그만큼 성경이 효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우리를 주시는 수단으로 부모의 출산을 사용하십니다. 출산으로 우리는 비로소 이땅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출산은 하나님의 행위를 대리하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함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법도 배우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눈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섬긴다는게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계명을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해서 설명하십니다
부모님께 드릴 것을 제대로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의미의 ‘고르반’이라고 말하는 유대인들을 크게 꾸짖으셨지요. 그러니까 부모님에게 드려야할 생활비를 안드리고는 부모님께 드려야할 생활비는 이미 하나님께 드려서 없다고 말하는 그 뻔뻔함을 주님은 질책하신 겁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건데 혹시라도 십일조나 헌금을 하면서 부모님에게는 소흘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것이고 우리 주님의 질책을 받을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서 내가 아닌 타인(다른 몸)의 첫 번째가 바로 내 부모이며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며 가치있는 계명입니다.
기독교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 중에서 기독교가 제사를 반대한다고 “너는 애비 애미도 없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게 바로 기독교입니다. 왜냐면 기독교야 말로 인간사이의 가치 중에서 효를 제일 첫 번째로 강조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시면서까지 장려하고 있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님에게 잘못하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오늘 새해 둘째 주를 맞이하여 우리 성도들은 모두 부모를 공경하며 효도하는 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는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월 1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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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래전, 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공경이라는 의미에는, 무거움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의 이야기를 무겁게 받아들이라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참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예컨대, 차 조심해라, 공부 열심히 하라, 방을 깨끗이 정돈하라, 돈을 귀중하게 사용하라 등등은 흘려듣기 쉬운 잔소리 입니다만, 무겁게 받아들이고 지키는 경우, 하다못해 정말 수명이 연장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차 사고로 죽는 사람이 종종 있었으니까요 :)
그러고보면, 목사님은 꽤 자주, 가까운 사람부터 "우선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재밌는 말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가족이 웬수다, 지옥의 시월드, 같은 기싸움과 끈덕진 요구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어쩐지 편안한 가족이 하나의 이상향 처럼 그려지고 있는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여간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려는 노력은 결국 삶을 보다 가치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위선적으로 살아가면서 가까운 곳을 외면한다면, 그런 삶은 속된 말로 "뒤가 씁쓸한" 인생이 될테니까요. 앞모습은 그럴싸한데, 뒷모습은 영 충격적이라면... 자신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도, 어딘지 초라해질 것 같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이 어떨지라도, 앞으로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십계명이기도 하고, 변할리는 없겠지요. 결국 부모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은 정해져있기 때문에, 늦게 후회하기 보다는, 최대한 기회를 내고, 시간을 내며,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귀를 기울여보는 게 필요하겠지요. 그러면 코멘트는 여기에서 끝. / 2014.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