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월 19일 주일 예배
돌무화과위의 삭개오 (누가19:1-10)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보기위해 돌무화과 나무위에 올라간 삭개오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도 유명한 스타들이 있습니다. 아이돌들을 보기위해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듭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스타들의 곁에서 그들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에 스타들의 주위로 정신없이 몰려듭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과 손이라도 한번 잡고 싶어하거나 사인이라도 한 장 받기를 원해서 스타들에게 열광하고 쫓아 다닙니다. 말 그대로 이때의 아이돌들은 저 하늘의 별들입니다.
너무나 찬란해서 도저히 그 빛이 다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별은 하늘위에 있지 않고 지상에 있기 때문에 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좋은 자리에서 이들을 보기위해 자리경쟁도 치열하고 주위로 몰려들고 심지어 넘어지고 압사 사고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들이 공항이나 어딘가로 갈 때는 경호원들이나 경찰들이 스타들을 보호하기보다는 팬들을 보호하기위해 질서유지에 신경을 매우 많이 쓰는 겁니다.
물론 스타들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기는 하지만 팬들에게 혹시라도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욕을 먹게되고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하므로 질서유지가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성경에도 이러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에서도 예수님이 스타였습니다. 오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뭄 끝에 세례자 요한이 나와서 ‘내 뒤에 오실 그이’를 위해 길을 예비하자 사람들은 400년만에 타나난 하나님의 선지자에 열광하면서도 그가 말한 진정한 스타가 누군지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다.
마침내 말씀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자신의 공생애를 거의 마치고 마지막으로 고난을 당하기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한마디로 죽으러 가는 길! 잘 아시겠지만 예루살렘은 아주 고지대에 위치해 있고 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의 초입에 여리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여리고를 지나시는 길입니다. 여리고는 아름답고 부유한 도시입니다. 물이 풍부하고 오렌지나무와 무화과의 고장입니다. 오랜 여행객들에게는 꿀보다 달콤한 휴식을 줄 수 있는 도시입니다.
이 여리고 성 안을 지금 예수께서 지나고 계시는데 바로 여기서 한 사람이 나옵니다. 삭개오.
당시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입니다. 당시 여리고에는 요단강 동편에서부터 들어오는 상품에 대한 관세를 걷는 세무서가 있었고 이들의 우두머리인 삭개오는 세리장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가난했습니다. 먹고 살게 없었기도 하고 마땅한 직업도 갈아 먹을 땅도 없습니다.
그래서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면 먹고 살길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가 돈을 잘 버는 직업이었습니다.
세금을 중간에서 착복하는 거지요. 물론 로마로 갈 돈을 떼먹었다가는 목이 달아날 것이기에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내는 방법을 사용하여 부를 쌓은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리장이요 또 부자였답니다. 큰 부자.
아마 부자여서 세리장이 된게 아니라 세리장이었기 때문에 부자였을 것입니다. 즉 그가 모은 부는 정직하게 노력해서 번 것이아니라 동족의 것을 거짓과 힘으로 빼앗고 수탈한 죄악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그냥 부자가 아니라 엄청난 부자입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이름 뜻은 현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깨끗한 자,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웃기지요?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죄인하고 동의어로 사용할 만큼 질이 나쁜이들입니다.
이들은 로마 식민당국의 압잡이로 적정 세율보다 더 걷어서 중간에 착복하는 아주 나쁜이로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을 가장 나쁜이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세무공무원은 이 나라의 재정을 위해 세금을 걷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로마의 재정을 위해 세금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세리를 침략자를 위해 동족을 수탈하는 로마의 앞잡이로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들과는 결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들과 상종한다면 자기도 더러워지고 그래서 종교법상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이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삭개오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삭개오가 주님을 만납니다.
의로운 자, 깨끗한 자로 살기를 원해서 부모가 삭개오라고 이름했지만 그는 지금 유대인들에게 원성을 듣고 있는 치욕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덕분에 엄청난 부를 모았지만 그는 항상 이러한 사실에 갈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자자한 예수님이 여리고성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 자신의 삶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며 갈등하고 있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렇게 인기가 많을까?
과연 그는 우리가 그렇게 꿈꾸던 메시야일까?
사람들을 낫게 하고 죽은이도 살린다고 하던데 나도 그에게로 가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도대체 왜 그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던 것 만은 사실입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리장입니다. 죄인.
당시 죄인과 접촉한 사람은 부정을 씻는 정결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과 접촉하려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군중사이로 파고 들 수가 없습니다. 그가 비록 세리장이기는 하지만 군중들을 칼과 창으로 위협해서 인파를 뚫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에 대해서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있기에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거든요.
앞에 예수님을 보려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삭개오 보다 키가 큽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앞에선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엄청난 부와 권세를 가졌지만 긴 키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가지 꾀를 냅니다.
뭔고 하니 인파를 뚫고 주님을 보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지나갈 길목으로 달려가는 거지요.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이쪽으로 오실거야라고 생각되는 지점으로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위로 올라 간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뽕나무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번 성경에는 바뀌었습니다.
이 나무는 잎사귀는 뽕나무와 비슷하고 열매는 무화과와 비슷한데 가지가 사람들이 올라가기 쉽게 뻗어 있다고 합니다. ‘시카모어 무화과 나무’라고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현재는 도저히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이 가실 길목으로 달려가서 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키가 작아서 어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예수님을 보기위해 사람들보다 앞서서 달려가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애도 아니고 어른이, 더구나 세리장이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이 나무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합니다. 게다가 죄인중에 대표 죄인인 세리장이 뻔뻔스럽게 유대민족의 해방자인 예수님을 볼려고 한다는게 도저히 말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낯짝도없냐, 니가 어디를 기어 들어오느냐?”며 사람들이 욕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세금을 걷는데는 군대의 힘을 이용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는 로마 군대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로마 군인들도 삭개오를 속으로 멸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서 아부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 경멸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창피를 당해도 로마군인들이 자신을 위해서 보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게 왜 그런 곳에 갔느냐?”라고 비웃음만 살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삭개오는 혼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기가막힌 방법을 생각해 내고 이를 실천에 옮깁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삭개오가 있는 나무쪽으로 걸어 오시다가 나무위에 있는 삭개오를 발견하셨습니다.
아마 이 나무가 상당히 높았나 봅니다. 예수님이 우러러 보셨답니다. 그리고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십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당시 세리는 죄인과 창녀와 더불어 유대의 경멸받는 죄인 의 상징입니다. 당연히 유대의 명망있는 랍비들은 세리들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이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과 접촉, 신체적인 접촉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멀리서 침을 뱉거나 경멸의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겠다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동족을 수탈하고 로마의 압잡이로 피를 빠는 더러운 죄인에게 주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당시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마태는 세리출신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는 삭개오는 그래서 더 주님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어떻게 해서 나같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지? 그는 과연 어떤 자일까?’ 너무 너무 그가 궁금했기에 그를 보려고 창피를 무릎쓰고 나무위에 올라갔지만 설마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는 멈추어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늘밤 자기 집에 머물겠다고 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냥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인데.....
여기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날 스타를 보러간 팬이 그곳에서 극적으로 스타를 만났을뿐만 아니라 그를 자기의 집에 초대까지 한다면 그는 아마 일평생을 그 스타의 광적인 팬, 마니아로 살아가겠지요. 게다가 일평생 그와 보낸 하루를 기억할 겁니다. 그리고 자랑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지요.
삭개오의 마음은 더합니다. 그는 이름대로 착하고 의롭게 살지 못하는데 대한 갈등과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세리장이라는 권력과 돈이 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갈등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으로 미리 예수님이 올 길목을 선점하여 무화과나무위로 올라갔는데 이제는 그가 꿈꾸던것보다 더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가 갈등하면서도 세리장으로 부자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통의 인간에게 권력과 돈은 자기의 묵숨만큼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원래 목숨을 이어가기위해 필요해야하는 돈이 이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돈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수군거립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여기서 뭇사람이란 말은 많은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원문으로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려고 열광하고 둘러싸고 같이가던 모든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하며 수군댄다는 말입니다.
이런거보면 예수님은 삭개오를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한 것입니다. 그만큼 삭개오는 기쁨도 컸지만 책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욕을 먹는구나!’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와같은 행동에 수군댄 이유는 무엇 때문에 주님이 이땅에 오셨는지를 알지 못한 무식의 소치입니다.
주님은 의롭고 착한자들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들과 가난한 이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죄인과 접촉한 사람 역시도 더렵혀 지는 것이고 그렇게 더럽혀진 주님과 접촉하면 역시 자신들도 더러운 죄인이 되는 것이기에 사실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모든 사람들이 불평함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죄인인 삭개오의 집에 가시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우리 주님은 소위 말하는 의로운 이들을 다 두고서 죄인 한 사람을 위해서 가시는 분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모시고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삭개오가 자기집으로 가기전에 길거리에서 말했는지, 자기 집의 식사도중에 말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일어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모신 기쁨으로 이제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내용은 실로 파격적입니다. 일단 먼저 자신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답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여기에는 네배로 보상하겠다’고 합니다.
돈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날 성경은 토색하다라고 표현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 아테네의 어떤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불법적으로 무화과를 밀수출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자들을 찾아내어 밀고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토색하는 자라는 말은 바로 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들은 밀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밀고하지 않을테니까 입막음조로 돈을 달라고 해서 밀수출업자로부터 돈을 강탈하기도 했는데 삭개오는 지금 내가 세리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탈법과 밀수출이나 밀수입을 하는 자들을 당국에 고소한다고 협박하여 돈을 빼앗았다면 네배로 보상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의미로 보면 삭개오는 토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상으로는 삭개오도 역시 이런 토색질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삭개오는 토갯을 네배로 변상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는 돈이 주는 압박과 유혹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입니다.
동족으로부터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삭개오, 키도 작고 세리장이라는 것 외에는 볼게 없는 이 사람에게 돈은 인생의 가장 큰 무기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주님을 모시고 새로운 사람이 되는 표시로 자기의 재산을 흩어서 증거를 삼은 것입니다.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갚겠나이다란 말은 임박한 미래의 사건을 생생하게 나타내기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삭개오가 선포하고 있던 그 시간 이미 삭개오는 하인들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과 토색당한 이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너무 놀랍지요.
재단을 설립해서 뭐 어쩌고 저쩌고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라 그는 즉각적으로 자기의 말을 실천한 것입니다. 바로 이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그만큼 삭개오는 새사람이 된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으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동족을 수탈하며 이방인처럼 사는 이가 아니라 이 사람역시 유대인이요 우리의 형제라고 선포한 것이며 삭개오의 온 집안 식구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제 본문은 끝을 맺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들,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 역시 잃어버린 자를 찾아 오신 주님을 본받아 세상의 낮고 약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해야 합니다.
매주 교회다니며 직분을 맡아서 내가 거룩합네하며 목에 힘주는 위선자들 말고 진정으로 나의 죄를 자복하고 현실에 갈등하며 어떻게 해야 내가 바로 살 수 있을가 고민하여 주님의 눈길을 애타게 갈구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다가가야 합니다. 이들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 이야기하는 용기도 있어야 하지만 불쌍한 것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어야 하며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회개와 그 열매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렇게 삽시다. 그래서 주님의 명령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힘써 행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월 1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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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갈등하는 삭개오를 생각해보면,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 생각납니다. 결단을 할 때는, 생각의 결단이 아니라, 반드시 행동하겠다고 결단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는 그 말. 삭개오는 한 번 만나볼까... 가 아니라, 반드시 한 번 만나고 말테다 라는 결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피와 비난을 감수하고, 나무 위를 찾았겠지요.
압권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입니다. 음, 한 번 믿어보겠어... 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이렇게는 앞으로 살지 않겠다 라는 결단이 있습니다. 저는 삭개오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감동 없이 살아가고 있는 메마른 성도보다 더 훌륭한 모습이지 않은가! 라는 감탄이 들기도 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꽤 있습니다. 진짜로 소유를 팔아서, 재산을 나눠준 사람들도 있고요. 어떻게 보면, 삭개오는 조금 바보 같아 보입니다. 아니, 부자인채로 성도가 되어서, 잘 믿으면 되지, 뭘 또 굳이 재산을 그렇게나 나눠주나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에는 중요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 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유로움과 기쁨이 들어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탓에, 워낙 우리는 돈을 과대평가하거나, 돈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은 돈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가, 같은 좀 더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최근 예술가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케치를 합니다. 나는 이런 집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며, 아주 마음에 쏙 들만한 집을 스케치 합니다. 그리고, 많은 인내와, 열정적인 노력이 더해지며, 그는 원하는 집을 설계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며, 행동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긴 시간 속에서 변함없이 인내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삶이 된다면, 그런 자에게 풍부한 미래가 그려진다는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의 순간이 있다는 것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삭개오를 보세요.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그릴 줄 알았으며, 그것을 위해서 포기할 줄도 알았습니다. 결심을 실행으로 옮겼을 때, 나타나게 되는 놀라운 일들. 어쩌면 어느 철학자의 표현처럼, 우리에게는 "희망이 부족하고, 그려보는 마음이 부족해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써놓은 것들, 그려본 것들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는가? 를 생각해보고, 거기에 맞춰서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삶의 새로운 차원을 만나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 2014.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