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2월 2일 주일 예배
칠십인이 돌아오다 (누가10:17-20)
오늘은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이면서 음력으로 새해를 힘차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아마 내일부터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삶을 위해서 일해야 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오랜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설을 쐬고는 있지만 음력으로 표준을 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연휴 마지막 날이면서 새롭게 한해를 시작하는 여러 성도들에게 올 한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예수님에게 제자라고 한다면 12제자가 생각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12제자 외에도 70인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한참 전성기 때의 일이었겠지요. 우리말로 하면 잘나갈 때.
예수님에게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 그리고 오순절 다락방의 120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허다한 무리니, 수많은 무리’ 가 따랐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단 한번도 떠난적이 없었던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70명의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와서 기쁨으로 주님에게 전도여행의 성과를 보고하는 글이 나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제자들의 전도여행에 상당한 성과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서 주님에게 자랑스럽게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70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들에게도 귀신들을 내어 쫓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속으로 ‘귀신들을 우리가 과연 내어 쫓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기도와 축사를 하자 귀신들이 내어 쫓기는 것을 보고 큰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도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제자들에게 놀라운 이적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의 “항복하더이다”라는 말은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복종하고 있습니다 또는 굴복되고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지금 현재도 계속해서 귀신들이 굴복이 되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너무 너무 기뻐서 그때의 감격이 지금도 너무 너무 생생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래 너희들 참으로 수고했구나’ 아니면 ‘내가 너희들도 분명히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다고 했잖아’라거나 ‘내가 너희에게 그런 권세를 주었으니 당연한 일이지’같은 응답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보았노라’의 ‘보았다’는 말은 깊은 흥미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주님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세밀하게 영계의 모습을 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지상에서 귀신을 내어 쫓을 때마다 사단이 하늘에서부터 쫓겨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졸개인 귀신들이 내어쫓기자 이를 방해하기 위해 사탄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탄의 권세가 하늘에서도 패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는 미가엘이 하늘의 용, 즉 사탄과 싸워 이기고 그 용을 땅으로 내던졌다고 하는데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점점 확장되면서 영적으로도 사탄의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상에서의 일과 천상에서의 일이 전혀 별개가 아니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지상에서 귀신을 쫓아낼 때마다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진다면 우리가 지상에서 귀신을 숭배하면 사탄은 하늘에서 더 큰 권세를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귀신을 숭배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은 사탄을 더욱 의기양양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형상을 한 아이콘들이 자신에게 동시에 엎드려 경배하는 엄청난 장관을. 아이콘은 원 대상을 형상화한 것이기에 이는 하나님에게는 엄청나게 모욕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도저히 이기지는 못하지만 꿈에도 차지하고 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일이 벌어지는 것에 하나님은 통탄하시고 사탄은 의기양양하게 될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나라, 전국적으로 자기를 향해서 엎드려 경배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뿐이 없을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은 오래전에 그러한 관습들이 약해져서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만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돈과 하나님이 주신 휴식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몸뚱이의 건강을 가지고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는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 때문에 제사음식에 반드시 필요한 과일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올해 대풍이 들었다고 하던 사과와 배도 몰라보게 가격이 올라버렸습니다.
실제로 명절의 제수음식을 가지고 매점매석을 함으로써 거부가 된 주인공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허생. 뿐입니까? 신문과 방송에 시월드니 명절 증후군이니 하는 황당하지만 현실적인 병폐들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아마 명절이 끝나고 나면 부부싸움뿐만 아니라 이혼이 부쩍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은 일들에 기뻐하고 자랑하자 다시 이와같이 응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뱀과 전갈은 성경에서 사탄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힘을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에서 원수가 바로 사탄을 말하는 것이지요.
결코 인간 사이의 원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되면 예수 안믿는 나의 원수인 아무개를 이길 권세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 다음에 나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어때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는 거꾸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우리가 천국시민이 되고 나중에 천국에 가고 이런게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부유하고 귀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어쩌면 ‘하늘나라에 이름이 기록되면 뭐하냐? 천국이고 지옥이고 그런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다만 이 땅에서 내가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리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안수기도 함으로 사람을 낫게 하고 귀신을 내어 쫓고 능력을 행하면 명예와 부가 자연적으로 따르니까 좋은 것인데 돈도 안되는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건 나에게 전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우리 인생들에게 주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우리가 이 말씀을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면 먼저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귀신을 내어 쫓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굉장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나아가서 귀신을 내어쫓는다고 해서 반드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뭐시기 일파가 자랑하는 그 일이 결코 천국행 티켓을 보장하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좀 조용합니다만 한때는 이 사람이 굉장했었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것 이 보통 인간들의 눈에는 굉장해 보일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하늘 명부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보다 보잘 것 없다는 말입니다.
귀신을 아무리 쫓아내면 뭐합니까? 정작 자신이 귀신처럼 영멸에 처해진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를 주지 못하는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야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할 말로 귀신들의 왕 바알세붑을 힘입어서 귀신을 이사람에게서 내어 쫓아서 다른 이에게 들어가게 하는 일이 안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이 더 중요하지요?
왜냐면 생명책에 우리가 이름을 우리 스스로 기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자격요건을 갖추고 신청하면 반드시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임의대로 내 이름을,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나 귀하고 또 어려운 것이며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쫓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가지는 권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가지고 큰소리치고 기뻐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지는 것이지 내가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귀신을 내어 쫓은 것을 가지고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는 우리의 ‘헌신’이 ‘업적’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헌신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수천명짜리 교회의 목사가 되었거나 유명한 신학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선교사로 수많은 교회를 척했거나 하는 것이지 아무런 열매가 없는 이는 헌신했다고 말할 수 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이지 결코 우리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나 사랑하신다면서 왜 저모양 저꼴인가?
저꼬라지로 있는거보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가봐?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만 사랑하다가 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전혀 이렇다할 업적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유명하지도 않고 이 세상에서 명예를 얻지도 못했고 오히려 가난하며 무능하다고 멸시받았지만 저 천국에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위로받고 칭찬받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듣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보이는 것을 더 숭상하고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비록 자기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함으로서 자기들의 위신이 올라가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정한 종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함으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인치심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사람으로 인정받았음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귀신을 내어쫓는 일이 사람들의 멸시를 받거나 아무런 대접이 없는 일이었다면 70명의 제자들이 그렇게나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 각종 능력을 행하면 뭐합니까?
그들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단 한사람도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패거리로 몰릴까봐 다 주를 부인하며 그를 욕하고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생각을 우리네 생활가운데서 찾는다면 가령 내가 목사가 되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목사가 되어서 수천명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능력을 행함으로 이 땅의 가난하고 힘든 자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 정말 능력있다. 그래서 돈과 적어도 영예를 얻을 수 있어서 기뻐하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열심히 주를 따른다고 해도 ,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천국을 소망하며 산다고 해도 결국 출세하고 업적을 남기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거나 심지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경계하셨던 생각이고 본문의 주제입니다.
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지만 이 본문에서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부분이 아니고 18절과 19절입니다.
왜냐면 이건 설날용 설교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귀신을 내어쫓을 때 하늘에서도 사탄이 땅으로 내어던져지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일을 하게 된다면 사탄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설날을 기해서 전국적으로 우상숭배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이 됨과 동시에 사탄을 영광되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이 힘을 얻으면 얻을수록 지상의 우리는 더 힘겹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이 오늘 설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설날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이미 행해진 범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이제 앞으로는 다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는 우리 민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한반도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일을 바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2월 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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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덧붙이는 게 좋을지 조금 망설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설교 자체에 거부감은 없지만, 외부에서 본다면 상당히 거북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업적 대신에, 의지 대신에, 단지 하나님 뜻대로 타인을 사랑하며 살았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대목이 그렇습니다.
개인사인데, 올해 91살이신 할머니 이야기를 잠깐 한다면, 설날 때, 할머니께서 15여년전에, 1년 정도 걸려서 베껴쓴 성경책 필사본을 선물로 건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의 세 아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두 딸은 예수를 믿는데,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라는... 아마 평생의 교훈 같은 걸 손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나 봅니다. 열심히 해봐도,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건, 상당히 당혹스럽기도 하고,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들기도 해서, 조금 슬픈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종종 착각하는 경향 중 하나가, "하나님, 내가 이렇게 전도도 많이 하고, 열심으로 행했으니까, 사랑 받을만 하지요. 어깨에 힘이 들어갈만 하지요." 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만 합니다. 내세울 게 없어도, 얼마든지 괜찮은 문화. 그것이 기독교의 모습이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이 영 아닐지라도, 단지 선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구나 같은 사람이니까,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은 거의 근대에 들어와서야 자리잡은 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서,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능성으로 대하고, "사람"으로서 대할 수 있다면, 최대한 존중할 수 있다면, 명절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만남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마음대로 현실이 풀려가지 않을 때, 그럼에도 타인을 아끼고,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는 한 켠의 여유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은 이쯤에서 덧붙임 끝. / 201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