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국외 이주민의 삶 - 간도나 하와이로 이주하는 조선인

시북(허지수) 2014. 2. 5. 19:55

 커피와 호떡이 유행하였다 까지, 지난 주에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 다음 편을, 금방 올린다는 것이, 명절도 끼고, 이래저래 정리하다보니, 한참 또 시간이 흘렀네요. 매번 죄송합니다 ㅠ_ㅠ! 여하튼, 개항 이후 옷과 식습관만 바뀐게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건물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를테면,

 

 주거의 경우는 갑오개혁 이후에 건축규모의 제한을 풀게 됩니다. 그래서 1890년대 후반부터는 서양의 건축물들이 하나씩 들어서게 됩니다. 잘 알려진 건축물로는, 프랑스 파리 개선문을 본따서 만든, 독립문(1896)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동성당(1898)도 아주 오래된 건물이에요.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은 1910년에 건축되었고요. 석조전의 경우 정원도 있고, 분수대도 있고, 정말 조선의 궁궐 맞아?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이색적입니다. 한편! 서양건축물과 비교해서는,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원구단도 있었다는 점을 시험 대비용으로, 체크해두면 됩니다!

 

 지금까지 쭉 살펴보니까, 삶의 모습이 참 많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강화도 조약 이전의 조선과, 그 이후의 조선은 정말 모습이 상당히 달라집니다. 예컨대, 1900년쯤오면, 옷은 양복(서양식 옷)을 입고 있고, 온가족이 밥을 먹지요. 식후 커피를 즐기고, 서양건축물들이 줄줄이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즉,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의 풍경과 이래저래 유사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간단히 정리한다면, 1876년 개항 이후는, 현대의 삶과 가깝구나. 정도를 이해해 두면 되겠습니다.

 

 이제 개항기 사회파트의 마지막 주제로, 해외 이주민의 삶을 조명해 볼까 합니다. 19세기 말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당시 수도 한양인구가 약 20만명이었다면, 국외로 이주한 인구는 그보다 더 많았습니다. 국외인 만주 지역에만 해도 여기저기 합해 20만명이나 살고 있었고, 연해주로 8만명, 또 하와이로도 수천명씩 이주하게 되었으니까요. 그 세세한 이야기들도 살펴보아요.

 

 먼저 한반도 북쪽으로, 동북쪽 국경을 넘으면 연해도, 북쪽 국경을 넘으면 간도 지역이 있습니다. 덧붙여, 간도 지역은 어디까지나 만주 지역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실제 지명으로 있는 건 아닙니다. 위치적으로 만주 지역 안에 있는 곳이, 간도구나 라고 파악해 두면 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간도에는 굉장히 많은 조선인들이 넘어가서 살게 됩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870년대 함경도 대흉년 때는, 먹고 살려고 국경을 넘어가고, 80년대는 아예 청에서 조선인 이주를 사실상 허용하면서, 계속해서 만주 인구가 증가. 20세기 초에는 항일운동을 하기 위해서 국외로 넘어가고 등등...

 

 십만이 훌쩍 넘어갈만큼 인구가 워낙 많다보니, 조선에서는 이참에 1902년 간도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간도가 과연 누구의 땅이냐? 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에서 간도관리사가 파견되어서 이 곳 주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일 정도였다면, 조선행정력이 간도지역까지 어느정도 닿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계속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 분쟁이 일어납니다. 세금 문제도 걸려 있고, 이 땅을 누구 땅으로 표시하고 인정할 것인가? 어? 요즘과 좀 비슷한가요? 네, 역사는 그래서 배우는 겁니다. 가령 나라가 힘이 없을 때, 어떻게 땅이 넘어갈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도 있겠고요.

 

 간도는 1909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분쟁이 종결되었고, 청나라 땅으로 인정됩니다. 조선과 청이 간도 지역을 두고, 영토 분쟁까지 펼치다가, 결론이 이렇게 나버린 이유가 뭘까요. 그러면 질문을 조금 바꿔서, 이 결론을 조선이 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최종 결정한 것을, 조선은 순순히 따라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은 듭니다. 아니, 분쟁은 조선이 해놓고, 결정은 청과 일본이 한다? 이것이 핵심 키포인트 입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보면,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간도에 대해서 할 말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간도협악을 통해, 일본은 청나라에게 간도땅의 지배권을 인정해주었고, 대신에 안봉선 철도부설권을 냅다 얻어냅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만주 땅에 일본이 철도를 깔고, 조선과 만주 땅을 통해 점차 나아가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계획이었음은 뭐 뻔한 일이겠지요. 자, 어쨌건, 우리로서는 협상 자체도 못 해보고, 간도는 잊혀진 땅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 이 점은 을사조약이 준, 막대한 피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한반도 북동쪽 국경 넘어 연해주 지역에는, 사람들이 많이 가서 살았기에 신한촌이라고 불립니다. 신한촌이라는 말이 보이면, 아 연해주 지역을 떠올리면 충분합니다. 연해주에도 을사조약 이후에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넘어가서 활동하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해서, 약 8만명 이상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1902년 인천을 통해서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국가가 주선을 해서 해외로 간 최초의 이민자들이에요. 미국인 알렌이 주도했고요.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서 이민갈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대략, "하와이에 가서 행복하게 사세요." 같은 느낌입니다. 다만, 광고처럼 새로운 세상에서 잘 살았던 것만은 아니겠지요. 이주민들은 머나먼 곳에 와서, 사탕수수 일 등을 하며, 저임금과 고된 노동으로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예전에 등장했었던, 장인환, 전명운 같은 사람들도 이런식의 절차를 거쳐 외국으로 가게 된 사람들입니다.

 

 여담으로, 하와이로 간 사람들은 결혼을 해야 하는데, 타국에서 영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이게 큰 문제다 싶어서, 조선에서는 사진 결혼 프로젝트를 준비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주민들이 직접 조선에 다시 오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급한대로 사진만 찰칵 찍어서 조선으로 보내는 겁니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남자의 얼짱(?) 사진을 유심히 보게 한 후, 마음에 들면 결혼을 결정하고, 하와이에서 사세요." 라고 했던 겁니다. 얼짱각도 및 뽀샵처리 금지!

 

 그렇게 조선의 처자들이 부푼 꿈을 안고, 어렵게 결심을 굳히고, 하와이로 갔건만! 정작 사진과 많이 다른(!!!) 남자의 모습에 당황하고 마는 겁니다 ㅠ_ㅠ... 왜냐하면, 사진이 너무 낡았어!!! 알고보니, 옛날 사진이었던 거야!!! 그렇게, 나이 많이 들어 고생한 남자들과 함께, 이국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여성들의 에피소드 같은 것들도 당시 나오곤 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국외 이주민들이 고생을 하면서도, 열심히 돈모아서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했습니다. 후에, 독립 운동 단체의 중요한 자금줄이 되어주었고요. 여기까지가 개항기 사회의 풍경들. 이제 다음 문서부터는 개항기 문화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 계속...

 

 오늘의 영감 - 저는 근래 의사결정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놓고, 긴 고민에 잠겨 있었습니다. 이것만이 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생각을 해보기에는 좋은 역할극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동설계 전문가인, 히스 형제의 책에서 가져온 상황극 입니다. ① 말기 암에 걸려서 이제 5년, 길어봐야 최대 10년 밖에 살지 못합니다. ② 운 좋게도 숨겨둔 재산 10억을 받게 되었습니다. ③ 이제 무엇부터 포기할 건가요? 안 하면 반드시 후회할 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이 중요한 것이며, 무엇을 버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질문들은 인생에 있어서 "돈 버는 행위"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전부이거나 혹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힌트를 주고 있으며, 돈이 아닌 자신의 가치관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영화 설국열차 등에 등장한 여배우 틸다 스윈튼이 말하길, 성공은 "문 밖에 자기 자신을 세워둘 필요가 없는 것" 이라고 정의합니다. 나의 감정은 내팽겨 쳐놓고선 문 밖에서 남이 원하는 모습대로 살아가고자 지쳐가는 삶이 지속된다면 참 많이 힘들지 않겠어요. 따라서, 다만 실제로 내가 원했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성공이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요약하자면 "자신에게 충실하기"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도 김두식 선생님의 강연에서 가져온 대목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충실함이란, 어디까지나 잘 반사하기 정도 입니다;;; 제 경우라면, 5년뒤에도, 설령 10년뒤에도, 내가 이뤄보고 싶은 것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데까지는 열심히 노력했었다 라는 살아온 흔적들 만큼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