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2월23일/나팔을 불매 그의 뒤를 따라(사사기6:33-8: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2. 24. 18:47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2월 23일 주일 예배

나팔을 불매 그의 뒤를 따라 (사사기6:33-8:1)

우리가 종종 듣는 영웅들의 업적 뒤에는 그가 영웅적인 일을 하도록 그를 뒤따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불장군이 없다고 혼자서는 큰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업적은 남길 수 있지만 나라를 구하거나 하는 큰 일에 혼자의 힘으로는 모든걸 다 할 수 없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속담처럼 뭔가 그를 도와주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주며 힘을 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천하의 이순신 장군도 그를 믿어주고 그를 끌어준 유성룡이란 정승이 있었기에 전라좌수사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 그를 도와주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를 도와주는 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우리가 성경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드온은 정말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로 겨우 300명의 용사만을 거느리고 나라를 구한 큰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를 일러 ‘큰 용사’라고 합니다.
사사기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로 나아온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각종 시험을 통하여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최후로 남은 300명의 용사를 데리고 큰 일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자,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온이 나라를 구할 큰 꿈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어떻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서 “내가 이제부터 이 나라의 지도자다 . 내가 나라를 구하려고 하니 나를 따르라” 이렇게 외친다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예이, 당신은 우리의 지도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복종하며 따르는 일은 단언하건데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왕이 없던 사사시대라고 하더라도 잘 보면 사사들이 된 자들은 사사가 되기 전에도 이미 어느 정도의 명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저사람 정도면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다’라고 인정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초대 사사인 옷니엘은 유명한 갈렙의 형제였습니다. 가나안땅을 여호수아와 함께 정탐한  갈렙, 그 갈렙의 형제였기 때문에 그도 나름대로 저명한 사람입니다.
에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당시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모압 왕에게 공물을 바칠 때 이스라엘의 대표자였습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였고 바락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명장이었습니다. 사사 입다도 사사로 부름을 받을 때 이미 그를 따르는 수많은 잡류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길르앗의 장로들이 그에게 지도자가 될 것을 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당대의 저명한 인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가 처음 등장할 때 그는 당시에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미디안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위해 밀을 포도주틀에서 타작하고 있었고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기드온의 말을 겸손의 표현으로 본다고 해도 미디안 사람들에게 양식을 뺏길까봐서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당시에는 별 볼일었거나 아니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어떻게 지도자가 되었습니까?

1.영웅은 난세에 일어난다
6:33에 보면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이스르엘 골짜기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었고 군사 요충지입니다. 애굽에서 페니키아로 통하는 연결 통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므깃도 평원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미디안 사람들이 혼자서 온 것이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과 연합해서 쳐들어 옵니다. 이들은 비옥한 곡창지대에 그들의 약대와 가축을 풀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어놓은 곡물들을 다 뜯어 먹게 할 것입니다.

안그래도 강력한 미디안이 무서워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이 쳐들어오면 집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동굴과 산성에서 숨어 살며 미디안인들이 자기들의 곡물을 미디안 가축의 먹이로 주고 또 자기들의 가축을 싹쓸이 해가는 것을 보고도 숨죽이며 엎드려 있는 상황입니다. 한나라도 아니고 주위의 나라들이 작당을 해서 이스라엘을 뜯어 먹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나 완고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그에게 간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살려 달라고.
그러한 비상한 시국에 하나님은 기드온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요 영웅은 평화시에 나는 것이 아니라 난세에 태어납니다.

2.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여기에 보니까 여호와의 영이 즉 성령님께서 기드온에게 임하셨다고 합니다.
강림하다는 표현은 원래 옷입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께서 기드온에게 임하셔서 그를 휘감고 덮어 버려서 온전히 성령의 장중에 사로잡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소시민에 불과했던 기드온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사명감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지요.
동포들이 미디안과 아말렉에게 양식을 뺏기고 못살겠다고 울부짖을 때에도 자기는 곡식을 몰래 숨겨서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던 심약한 소시민인 기드온은 성령이 임하시자 나라의 위기를 목도하고 분연히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니라 비로소 형제와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여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3.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여기서 나팔은 수양의 뿔을 말합니다. 고대인들은 수양의 뿔을 잘라서 나팔 대신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기드온이 나팔은 분 이유는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호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나팔을 불었는데도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기드온은 혼자서 미디안 군대의 표적이 되어서 더 지독한 꼴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반란의 종자를 없엔다고 기드온의 온 집안을 몰살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기드온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나팔을 불었는데 이제 뭔가 사람들이 그에게 호흥을 해야 합니다.
이때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호응해서 그를 따른 사람들이 ‘아비에셀’입니다. 아비에셀은 일 개인이라기 보다는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므낫세 지파의 ‘오브라’에 몰려 살던 집안이 바로 ‘아비에셀’입니다. 바로 이 집안이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호응한 것입니다.

만일 아비에셀이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호응해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기드온의 거사는 실패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기드온은 일가친척을 망친 사람이 되어서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을 피해서 도주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담대히 일어나 수양의 나팔을 불었을 때에 하나님은 역시 아비에셀 집안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로 하여금 나팔소리에 호응해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대의명분의 부름에 응하여서 일어나 함께 나라를 구원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남들 따라 분위기에 잘 휩쓸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더 많이 모이고 거대한 무리와 함께 할수록 더 용감해집니다. 신나하기도 합니다. 군중심리지요.

그러나 그러한 군중도 처음부터 군중인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그 많은 무리의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무리의 수가 더해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따르고 난 다음에는 나 하나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이 제일 어려운 것이지요. 그리고 혼자만으로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따라서 일어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큰 집을 기둥하나로 버틸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둥 두 개로 버티는 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적어도 세 개의 다리를  가진 것을 솥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구조를 가장 안정된 구조로 보았습니다. 한자로 솥발 鼎은  ‘세 개의 다리로 된 솥’을 말합니다.

한 개의 기둥이 더해져 네 개의 기둥이 완성되면 이때부터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끄떡거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도서관의 의자 중에서 네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아서 끄떡거리는 일이 많습니다. 저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그런 의자 때문에 정말 괴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다섯이 되면 둘과 셋으로 나뉘어 파벌이 됩니다. 이때부터는 균형뿐만 아니라 조화가 요구되어집니다. 여하튼 기드온은 처음 자신이 살던 오브라 성읍의 아비에셀 족속 사람들을 얻었고 이들을 사자로 삼아서 므낫세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아비에셀이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제일 처음 호응했기에 기드온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분연히 일어서서 나라를 구할려고 했지만 기드온 혼자서는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사람의 연합군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그를 따르는 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함께 힘을 합쳐 싸울 수 있는 이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4.사자들을 두루 보내매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한명의 사자를 보낸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사자들을 온 므낫세 지파에 보냅니다. 므낫세 지파는 기드온이 속한 지파입니다. 기드온은 처음 몸을 일으켜 자기의 고향에서 시작해서 자기의 지파로 그리고 인근 지파들에 사자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모집합니다. 이렇게 해서 총 32,000명이 모이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잘 보면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람들이 기드온을 따른 순서가 있습니다. 고향 오브라의 아비에셀 집안이 따르자 사람들이 여유가 있게 되고 이들을 사자로 삼아서 온 므낫세 지파에게 사자를 보내어서 이들을 모집하게 됩니다. 이들은 ‘모여서 기드온을 따르게’ 됩니다.

므낫세 지파가 기드온을 따르자 기드온은 새로 합류한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을 사자로 삼아서 인근 지파에게도 호응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므낫세 지파가 일어섰다는 소식을 들은 세 지파들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드온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처음이 사실 제일 중요하지요. ‘아무도 나와 뜻을 함께 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은 소시민들을 머뭇거리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나만 피보는 거쟎아!’
이러한 두려움과 귀찮음과 피곤함을 이기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기드온은 소시민에서 큰 용사로 일어선 것입니다. 자기만을 아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이웃과 동포를 살피는 인물, 큰 용사가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큰 용사인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과 어려움을 무릎쓰고 앞장서는 자만이 큰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구원하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5.야비한 사람들
이렇게 모집한 사람들을 고르고 골라서 기드온과 300용사는 놀라운 일을 이뤄냅니다. 그 악독하고 무서운 메뚜기떼처럼 많은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사람들을 물리칩니다. 그런데 진짜로 사람들이 웃깁니다.
기드온과 삼백 용사가 미디안 연합군을 크게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군을 추격합니다. 마침내 군대가 요단강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미디안군대는 요단강을 건너서 도망을 치려고 합니다.

이때 인근의 지파인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기드온과 300용사와 함께 미디안 연합군을 공격합니다.
아마 처음 기드온의 모집에 응해서 달려왔다가 해산된 그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스불론지파도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빠져있네요.

어쨌든 이들은 패주하는 미디안과 연합군을 추격합니다.
이제 이들은 가나안 북쪽에서 퇴각을 시작하여 가나안 중부까지 왔고 여기서요단강을 건너서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이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기드온은 또 사자들을 에브라임의 여러 지역에 보내서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이 내려와서 미디안을 공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원문에는 단지 요단의 수로를 점하고 있다가 미디안이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미 미디안은 기드온의 군대에 크게 패하고 목숨을 구하려고 요단을 건너려 도망하는 중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공격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요단 나루턱을 지키고 앉아서 적들이 도망하지 못하게만 해달라는 말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의 요청에 응했고 미디안의 두 방백이 잡혀서 죽었습니다. 방백은 군주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왕.
에브라임 사람들은 도망가는 적들을 막아서 싸우다가 도망가는 적들을 따라 요단강을 건너가서 적들의 두 왕인 오렙과 스엡을 죽여 이들의 목을 가지고 기드온에게로 옵니다.

‘오렙’은 갈가마귀 ‘스엡’은 늑대를 뜻합니다. 이들의 이름으로 보아 매우 잔인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악독하게 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좋게 끝이 난 것이지요?

그런데 8:1에 보면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다 이긴 싸움에 막판에 참여해서 어부지리를 취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에브라임 지파는 자기들이 가나안을 정복한 영웅 여호수아의 동족 지파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암암리에 자기들이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가장 우월한 대표적 지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를 므낫세 지파에게 빼앗긴게 속이 상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니 자기들이 그렇게나 자긍심이 높고 앞장서서 싸우고 싶었으면 기드온이 부르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기드온 보다 먼저 군대를 일으켜서 미디안과 싸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는 겁이 나서 찍소리도 못하다가 상황이 유리하게 돌아가니까 대세에 편승할려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지나가고 나면 항상 말합니다. “그때 나에게 말하지. 그랬으면 내가 너를 도왔을 텐데...”
그렇지요, 물론 그때 말했다면 도왔을 수도 있고, 몰랐기 때문에 안 도왔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들은 이웃의 희생으로 독립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이웃들에게 감사를 해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혹시라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웠으면 미리 미리 행동을 취했어야지요. 우리 말로 “있을 때 잘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위기의 상황에 이것이 나에게 승산이 있는가? 아니면 불리한가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의’라고 굳게 믿고 일어선 기드온과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처음 호응한 아비에셀 사람들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그것도 한나라가 아니라 여러나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이 힘든 법입니다. 그리고 그 힘든 처음을 시작한 사람을 지지한 이들이 중요한 법입니다. 공연히 다 이긴 싸움에 생색을 낼려고 설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아니라 고독한 기드온의 나팔소리에 제일 처음 호응해 일어난 아비에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에 응해서 제일 먼저 일어나 따르는 이들이 됩시다.

이미 기틀이 잡히고 나면 늦습니다. 다 이긴 싸움을 거들고는 기득권을 뺏길까봐 헛소리해도 이미 늦습니다. 여기 영광된 무리에 참여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수양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힘이 합쳐져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응답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이를 통하여서 자기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응답해서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 일어섭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는 큰 용사가 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2월 23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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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종종 있다보니,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왜 하필 무명의 기드온을 불렀을까? 그리고 어째서 기드온은 용기를 내어서 나팔을 불 수 있었을까? 압제에 대하여 침묵 대신에 무엇인가를 바꿔보려는 모습은 무척이나 감동적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리프킨이라는 학자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먼저 가서 깃발을 꼽으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거기에 호응하며 따라갑니다. 그리고 불과 1% 남짓의 사람들이 외치는 이상들이 언젠가 현실이 되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나중에 따라와서는 딴소리를 하곤 하지요. 사실상, 저는 오래도록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명 정도가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앞장서는 전위보다는, 뒤를 따르는 후위가 더 편안해 보이기도 하고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 아무리 인간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도토리의 키가 17cm 인지 19cm 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걸까요. 그런데 간혹 사람들은 이를 두고 특급이니, C급이니 나누고 서로 부러워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본다면, 다만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용기 있는 사람은 어디 있는가?" 라고 찾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나의 능력이 어떤가가 아니라, 나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 2014.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