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디어 개항기 이야기의 종착역에 이르렀네요. 문화 파트 이야기 입니다. 앞의 문서까지는 여러 번 복습을 겸해, 흐름을 즐겁게 살펴봤습니다만... 여기서부터는 파편화 되어 있는 내용들도 상당하고, 외울 게 제법 많다보니, 약간은 고비이기도 합니다. 저도 업데이트가 엄청 밀리는 바람에 무척 고비였습니다 -_-;;; 푸핫. 그러나, 힘을 내서 부담없이 출발해 보아요~ 우리 모두 지금껏 열심히 해왔는데,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럼요!
우선은, 한창 개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1883년으로 들어가봅시다. 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이고요, 1880년 무렵의 조선은 개화전담기구인 통리기무아문도 설치하고, 신식 군대도 만들고, 변화를 위해 힘쓰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추진되는 개화에 확 뚜껑열린 (열받은) 군인들이 임오군란 일으킨 것도 1882년이었고 말이지요. 개화기 무렵의 이야기들 기억나지요? 근대사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
그러면 왜 1883년을 기준으로 문화사를 살펴보려고 하는가 하니, 이 무렵부터 세상에 없었던 새롭고 신선한! 근대적 시설들이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문자를 찍는 박문국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인쇄를 담당하는 기구이고, 덧붙여 박영효의 건의로 인해 만들어졌고요. 그럼 박문국이 뭘 찍어냈을까요? 아 제목보고 벌써 눈치 챘다고요? 센스쟁이! (오랜만에 여유를 되찾고 문서를 정리하니 정말 신나네요~하하)
네, 박문국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을 발행합니다. 이름하여, 한성순보 입니다. 순한문이며, 관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체크해두면 됩니다. 참고로 신문 뒤에 붙어 있는 순보, 주보, 일보 같은 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순보는 10일마다, 주보는 7일마다, 일보는 매일매일 발행한다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다시 풀어써본다면 한성순보는, 한성에서 10일에 1번씩 발행하는 나라이야기 라는 느낌?
이 시대에는 당연히 TV나 맛폰이 없으니까요, 신문은 더욱 중요했겠지요. 한성순보에 실리는 다양한 개화 이야기는, "우와, 세상에 이런 것도 있어!" 라는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순한문이라서, 기층민중들이 읽기엔 힘들었다는 점은 염두해야겠고요. 따라서 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려가는 신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1884년에 꽤 굵직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갑... 네, 정답! 갑신정변이에요. 사실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하나의 반란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일본의 은근한 후원까지 받으며 독자적으로 세상을 바꿔보려 했었던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그 후폭풍은 만만찮게 여운을 남깁니다. "뭐야? 개화한다면서, 자기네들끼리 나라를 뒤엎고 말아먹는거야?" 같은 불안감도 적지 않았지요. 이후에는 여러모로 개화의 바람은 한풀 꺾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개화가 중단까지 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제는 다소 느슨한 개화로 진행되어 나갑니다.
갑신정변이라는 커다란 굴곡을 지나면서, 개화는 주춤해졌고, 박문국도 잠깐동안은 문을 닫게 됩니다. 공백을 잠깐 거치고, 한성순보에 뒤를 이어, 한성주보(1885~88)가 등장합니다. 한성주보는 상업적 광고도 싣는 등 특색이 있었지만, 재정적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3년만에 폐간. 아, 이대로 신문의 명맥은 끊기고 마는걸까요.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르면, 드디어 아주 유명한 신문이 나옵니다.
1896년경 발행되는 독립신문이 있습니다. 순한글이면서도, (1면 정도는) 영자신문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영문이 들어간 이유는, 외국에게 우리 모습을 제대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 영문 내용도 같이 썼습니다. 또한 최초의 민간신문이라는 역사적 의의도 있고요. 독립신문은 계몽적인 성격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으니, 우리도 빨리 바뀌어야 한다 등등...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논조가 많습니다. 독립신문의 경우 1899년도에 문을 닫습니다. 배경으로는 독립협회가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미움받으며 탄압받고 해산되는데, 이로 인해 독립신문 역시도 끝내 폐간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90년대 말에는 신문이 몇 개 더 있었어요.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시기가 되면, 여러 신문들이 등장합니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이 있습니다. 이름만 봐도 어딘지 모르게 포스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황"자가 들어가고, "제"자가 들어가니까, 이 이름만으로도 아 대한제국시기에 발간된 신문이구나를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신문은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요.
황성신문의 경우 한문도 많고 내용이 좀 어렵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로 상류층에서 읽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논조도 보수적인 편이고요. 흥미롭게도, 반면에 제국신문은 중하류층들이 즐겨 읽었다고 합니다. 제국신문은 순한글이라서, 아녀자들과 서민들이 읽기에도 부담이 적었고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어? 그 때에도 벌써 독자층이 달랐던거네요! 하기야, 요즘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분들이 주로 읽는 신문과, 진보적인 분들이 주로 읽는 신문들이 약간은 다르다는 거지요.
참, 그리고 황성신문하면 잘 알려진 이야기도 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황성신문에 사설으로 딱 실렸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통곡의 목소리가 전해지지요. 간단히 정리해봅시다. 황성신문-상류층,시일야방성대곡 / 제국신문-중하류층,순한글 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 줄로 정리 딱!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는 신문이 탄생합니다. 1904년 대한매일신보의 등장입니다. 그 당시 1등 신문이기도 했고요. 대한매일신보는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았을까요? 더 나아가, 신문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자가 왜 어려운 직업인 걸까요? 신문이라면, 비판적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부의 입맛에 맞게끔 글을 써주고, 정작 중요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싣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신문이겠어요. 기자가 어려운 까닭은 단순히 전달자가 아니라, 견해를 가지고, 무엇이 중요하고, 또 이것이 왜 중요한지, 비판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더 좋은 사회를 위해서 때론 욕먹어가면서 합리적 비판을 감당해 나가는 것, 이 시대의 기자와 언론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발표된 언론자유순위에서 한국과 일본은 57와 59위를 기록하면서 국제적으로 초라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일본은 2012년까지만 해도 22위까지 유지되었으나, 끔찍한 방사능 유출 사건 이후, 계속되는 언론 통제가 이어지면서, 국민의 알 권리가 처참하게 실종되는 코스를 밟았지요.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 점수가 그와 맞먹게 낮다는 것은, 말을 마음껏 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점은 조금 곱씹어볼 대목입니다)
다시 근대사 이야기로 돌아와서, 대한매일신보가 대단한 인기를 자랑했던 비결은, 바로 기본적인 언론의 역할을 정말 충실히 수행했던 멋진 신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1904년쯤이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며 청나라에 이어서 러시아까지 싸워서 이기던 때 아니겠어요. 또한 조선은 일본의 강력한 영향력(고문정치, 통감정치, 차관정치 등등)에 시달리고 있었고요. 이 뒤부터는 각종 조약으로 하나하나 국권도 피탈되고 말이에요. 그렇게 거의 식민지로 추락해 가는 분위기 속에서, 대한매일신보는 "여러분, 이건 정말 아니잖소!" 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속이 다 시원한 겁니다.
다른 신문들이 빙빙 둘러가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일제 권력의 횡포가 무서워서 몸을 사리고 있을 때, 그렇게 돌직구로 할 말을 하는 대한매일신보가 있었던 겁니다. 어쩐지 참 감동적이지 않나요. 한 번쯤 질문을 던져봅시다. "우와! 대박! 대체 왜 그랬을까요!? 망국의 징조 앞에, 침묵하지 않고, 이야기를 해나갔던 배경은!?"
대한매일신보가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신문을 운영하는 사람 중에 양기탁 외에도 베델이라는 영국인이 있었어요.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도 처음부터 함부로 건드리기가 까다롭고 어려웠습니다. 이렇게 베델이 일종의 바람막이를 해주었기 때문에, 시원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덧붙여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 신민회 등과도 연결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에요)
끝으로 경향, 만세보 같은 종교와 관련된 신문이 있습니다. 경향은 천주교, 만세보는 천도교와 관련된 신문입니다. 어? 경향신문은 지금도 있잖아요? 네, 물론 지금 현재는 천주교쪽에서 운영하는 신문은 아닙니다만, 역사적 맥락으로는 경향이라는 말 자체가 천주교용어에서 비롯된 말이니만큼, 경향신문의 초기 유래를 본다면 천주교와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는 거 정도는 확실합니다. 뭐, 어디까지나 여담으로 알아두시면 좋을 내용들이에요.
자, 이렇게 신문들이 활발히 활동하니까, 당연히 일본이 가만히 있질 않아요. 일제가 볼 때 얘네들 신문부터 당장 탄압해야 겠거든요. 그래서 악법인 1907년 신문지법을 제정하기에 이릅니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신문들이 줄줄이 폐간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독한 신문지법은 국외의 언론까지도 통제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어 국외인 연해주에서 발행되는 신문까지도 규제하는 등, 언론을 입맛대로 장악하고자 많은 공을 들입니다. 다시 말해, 구한말 국권피탈이 절정에 이르고 저항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자, 곧장 목소리를 먼저 막아버리는 조치부터 취한 것입니다.
언론이 기능을 잃어버리자, 일제는 자기네들의 만행들은 슬쩍 숨기고, 저항하는 소리들은 아예 사라진 것처럼 소식조차 전해지지 않습니다. 예컨대, 저항적 성향의 대한매일신보는 의병투쟁을 상당히 호의적인 시각으로 실어주며 지지했었지만, 이렇듯 신문지법에 의해서 본격적인 언론 탄압이 시작되자, 투쟁하는 조선 대신에 조용한 조선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싶습니다. 권력 앞에서, 외압 앞에서, 자신의 비판적 의견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면, 그렇게 당당한 목소리를 가진 언론인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면, 사회가 얼마나 더 멋있어질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여기까지 구한말 신문이야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개항기의 여러 문화 이야기들 다음 문서에서 계속됩니다~
오늘의 영감 - 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 지의 창간자인 뵈브 메리의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을 다루겠다"고 말했던 이야기. 진실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거짓이 여기저기 떠다니고, 오늘날 심지어 국가기관이 외교문서까지 조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실이 얼마나 중요한가 싶습니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론 날선 비판도 해가며, 또한 진실만을 전달하려는, 투명하고 맑은 언론이 있다면, 사람들 속이 시원하고, 충분히 숨을 쉴 만하겠지요. 좋은 공기가 없어지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듯이, 국가 역시도 언론이 통제되면서 몰락해 가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