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3월30일/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야고보서1:12-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3. 31. 01:5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30일 주일 예배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야고보서1:12-18)

오늘 저는 야고보서의 두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본문의 첫절인 12절이 앞의 2절부터의 내용상 결론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냥 성경원문의 표기대로 12절부터 18절까지의 첫 구절로 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야고보는 앞절의 내용상의 결론이자 다음 단원을 위한 선언적인 구절로 12절을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저번에 야고보를 처음 설교할 때 저희 교회 청년 중에 한명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야고보서는 가톨릭에서 성경에서 빼려고 한 적도 있었고, 교회에서 이런 야고보서 설교는 잘 하지 않는데 신기하다”고.
저는 루터가 이 야고보서를 이류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했다고 말해주고 설교를 했습니다만 야고보서가 저평가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혹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참으로 편리한 제도를 버리고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야고보서가 마음에 불편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 잘 살아야 하나님이 나를 구원에 적합하다고 하실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1.시험을 참는 자
여하튼 오늘 본문의 첫 머리에 성경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무슨 뜻으로 쓰인 것일까요? 악마의 유혹, 달콤하면서도 극도의 쾌락으로 주어지는 강렬한 유혹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하게 나의 신앙상태와 하나님에 대한 충성도를 평가하는 시험을 말할까요?
아니면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어려운 시련을 뜻할까요?
여하튼 여기서 ‘시험’은 ‘시련’이기도 합니다. 바로 시험의 다음에 성경이 사용하고 있네요.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그래서 성경 본문의 구조상 ‘시험을 참는 자’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입니다.

‘참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아래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고통아래에서 그 고통이 주는 아픔과 괴로움을 묵묵히 이겨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가 주를 믿기에 받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주님 때문에 견디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진 짐이 너무 무겁고 고통스럽다고 내가 진 짐을 벗어 던지고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붕을 떠받치는 데에는 적어도 세 개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주 작은 지붕일 경우에는 한 개의 기둥이나 두 개의 기둥도 있지만 집의 구조를 갖추어서 안정감을 주려고 한다면 적어도 세 개의 기둥은 필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네 개나 다섯 개 또는 더 많은 기둥들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기둥들이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둥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 기둥들이 받는 무게가 더 적어지고 집은 더 튼튼하며 안정적일 것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기둥의 역할을 포기하고 이탈한다면 남아있는 기둥들은 내가 떠넘긴 무게까지 함께 떠안아야 합니다. 당연히 더 힘들고 무리가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남아 있는 기둥들도 그 역할을 견디지 못하고 벗어나고자 할 것입니다.

바로 본문에서 ‘시험을 참는다’고 하는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내 역할을 다 하는 것은 시험을 참는 것일뿐더러 이웃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충성된 자에게 더 많은 짐을 더 지라고 강요하기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이렇게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 복은 또 무슨 뜻입니까?
사실상 이 복은 예수님의 팔복에 나오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복은 세상의 황금과 권력과 명예가 아니라 영적 의미의 복입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 딱 그 정도의 복입니다.

2.생명의 면류관
그런데 이 말을 성경은 동일한 구절에서 다른 표현으로 다시 한번 되풀이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들이 실망할까 두려워서 뭔가 자세히 설명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우리는 ‘시험을 참는자’가 ‘시련을 견디어 내는 자’라는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는 ‘복이 있나니’와 같은 장소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는 표현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시험을 잘 참은 것에 대한 상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답니다.

생명의 면류관!
면류관이라고 하면 우리는 제일 먼저 싯누런 황금에 색색깔의 보석과 진주로 장식된 군왕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왕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이렇듯 떠올리는 모든 것들은 현실적인 복입니다. 번쩍번쩍하는 금은보화와 같은 물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본문에서 약속하신 ‘복’은 산상수훈에서 나온 죽어서 천국 간다는 정도의 영적인 복이라니!

글쎄요, 많은 이들이 이 상급에 허탈해 할 수 있는데 계속해서 한번 본문을 따라 가 봅시다.
원문에 사용된 ‘면류관’이란 말은 왕이 쓰는 월계수 모양의 금관이나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 명예로 씌워주는 월계수, 진짜 월계수 잎으로 만든 화관을 의미합니다. 만일 왕이 쓰는 금관이 아니고 진짜 월계수 이파리로 만든 관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명예가 있고 흠모의 대상이 된다고 해도 물질만능의 현대인들에게는 별로입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시험을 참는 것’은 실제적으로 너무 힘든데 약속하는 보상은 겨우 풀쪼가리 장식이라니!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현실의 삶을 사는 것은 너무 힘든데 그걸 이겨낸 자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 겨우 그정도라면.............

3.하나님은 시험하지 아니 하신다
자, 이래놓고 성경은 갑자가 사람이 시험을 받을때는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12절과 13절에는 뭔가 논리의 연결고리가 빠져있습니다만 주제는 같습니다. 인간의 시험 당함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서의 ‘시험’은 시련의 뜻으로 쓰인게 아니라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성경상의 표현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시험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연단하시기 위한 시험, 즉 성숙을 위한 연단 이란 뜻이지 결코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시험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은 사탄이 주는 것이지요.

왜냐면 우리 인간의 깊은 본능속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 욕심 같은것들이 꿈틀대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걸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건드리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우리를 성숙케 하려는 시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야고보는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라고 엄격하게 경계합니다.

하나님은 시험하지도 시험받지도 아나하시는 분이는 겁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아포 데우(하나님께)’라는 표현의 ‘께’에 해당하는 ‘아포’의 첫 글짜를 문장의 첫머리도 아닌데도 대문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 시험받는다고 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의 욕심 때문에 미혹되는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그를 시험에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상 욕심이란 말은 ~을 향하여란 말과 열망, 또는 뜨거운 감정이란 말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아주 강한 뜻을 가진 말이 된 것입니다.

일단 이 욕망에 휩싸이게 되면 사람의 연약한 성정으로 이걸 이겨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죽이고 죽고 울고 웃는 거의 대부분의 일들이 바로 이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도 인간들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 정신없이 설치고 다닙니다. 멈출 수가 없습니다.

소위 명품이라고 하는 가방 중에서 가죽도 아니고 비닐로 된 것들이 있습니다. 천으로 된 것도 있고. 솔직히 하품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이 생긴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여성들은 그런 명품에 정신줄을 놓습니다.
왜입니까? 비닐과 천쪼가리의 조잡한 물건위에 뭔가 요상한 마크가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크가 바로 명품임을 나타내는 표시거든요. 바로 그 문양 한 개가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순간 인간들은 감탄하고 부러워하며 질시하기 때문에 그걸 서로 가지려고 눈에 불을 켜고 설치는 겁니다.

그걸 아는 사탄이 우리를 가지고 놀 때 바로 이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지요. 인간 스스로가 자기의 욕심을 제어하지 못해서 시험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 탓을 한다면 웃기는 일이지요.

인간 내부의 깊은 원초적 욕망이 건드려진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양식도 아니고 옷을 만들 수 있는 옷감도 아니고 그냥 들고 다니는, 어쩌면 필요도 없는 조잡한 비닐 가방에 울고 웃는 일들이 사실은 안목의 정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게 죄를 불러 오는 가장 큰 원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런 사실을 글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 뿐입니다.

본문을 잘 보면 14절에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끌려’라는 표현은 마치 사냥감이 덤불에서 잡혀서 끌려 나오는 모습을 상기시키는 단어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욕심에 그 정도로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미혹됨이니’라는 말은 미끼로 잡다, 아첨으로 미혹시키다, 유혹하여 속이다란 뜻으로 쓰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낚시와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덫에 걸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게다가 원문은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하게 미혹된다는 점을 분명히 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지르는 범죄의 원인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5.욕심이 잉태한즉
드디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예수를 믿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결코 잊어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우리의 단순한 욕심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말은 너무나 엄청납니다. 그 엄청난 결과앞에 할말을 잃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 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에 지배당했을 때는 죽음을 도외시하고 뻔히 결과가 예상됨에도 애써서 결과를 외면하며 욕심에 지배당해서 행동합니다.
물론 이것 때문에 우리네의 삶은 파괴되고 결과적으로 인간들은 사망의 거대한 진군을 하는 셈입니다. 무저갱으로 이어지는 낭떠러지로 추락할 걸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고 나가는 인간군상을 보는 듯 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본다면 욕심이 잉태한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밭에 마치 수태하듯이 욕망의 씨앗이 뿌려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욕심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밭에 뿌려지면 그 씨앗이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자라서 마침내 뚜렷한 형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자가 기한이 차서 아이를 출산하듯이 욕심이란 씨앗은 자라서 마침내 죄라고 하는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 속에 있는, 그래서 아직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진 않은 마음속의 죄악이 이제는 우리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어서 더 이상 마음속의 죄악처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실제로 드러나서 알게끔 되고 해악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우리의 마음밭에 씨뿌려지는 것은 이미 우리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잉태한즉’이란 말은 ‘~와 함께’ 라는 단어와 ‘잡다,취하다’란 단어의 합성어이기 때문입니다. 즉 ‘수태하다’란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짐승을 잡거나 죄수를 감옥에 보내는 것과 같이 ‘붙잡다, 체포하다’란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우리마음에 뿌려지는 것은 이미 우리가 죄에 체포된다는 예고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참한 결과가 눈앞에 나타날때까지는 애써서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우리의 욕심에 휘둘려서 행동하고 맙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늦고 맙니다.

그러나 죄는 출산초기에는 갓난 아기와 같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제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점점 자라납니다. 힘이 세지고 마침내 완전히 자라납니다.
죄가 완전히 자랄 때까지 방치한 결과 죽음이 눈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죽음까지도 의미합니다. 결코 끝나지 않을 엄중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니까 앞에서 시험을 참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복이 굉장히 느껴지지 않습니까?
단순한 명예만 주어질 뿐이지만 생명의 면류관이 값져 보이지요?
그런 명확한 결과가 너무나 확연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우리들에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속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어도 그냥 나둬 버릴 겁니다. 그냥 냅두는 거지요. 죽든 말든 알아서 해라!

야고보는 오히려 우리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은사와 선물이 비슷한 뜻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은사는 주는 행위에 강조점이 있고 선물은 주어진 결과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은사보다 선물이 조금 더 큰 의미입니다.

그러한 은사와 선물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여러 가지로 주시고, 온전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물들이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는 겁니다.
이 말은 결코 사탄으로부터는 좋은 것이 올 수 없다는 말이며 또한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뿌린 욕심대로 행동한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의 내면이 요구하는 욕심과 욕망은 단순한 찰나의 쾌락과 만족을 줄지언정 영원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표피적  만족이 아니라 내면의 온전한 만족을 주지는 못합니다. 만족감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일시적인 만족감이 끝나면 이번에는 더 강한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기위해 점점 더 노력하게 되고 최후에는 더 이상 회생불가능으로 망가진 인간의 모습만이 남아서 사망으로의 전진을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제가 비닐 가방을 예로 들었지만 이번에는 보석을 예로 들어 봅시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진주
누구나 인정하는 보석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거 어디에 쓰는 거지요?
먹을 수도 없고 산업에 꼭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다이아몬드는 단단해서 유리 자르는데 쓰입니까? 몇몇 용도야 있겠지만 없어도 그만인 것입니다.

참고로 공업용 다이아몬드는 보석인 다이아몬드와 달리 아주 싸지요. 단지 유리처럼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 말고는 어디에 쓰이는 것일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유리는 수백년전에는 엄청난 고가의 보석이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유리는 오늘날처럼 흔하지 않았거든요.

쓸모가 아니라 희소성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 바로 숯덩어리의 용도입니다. 숯이 순간적으로 가해진 엄청난 압력과 열로 만들어지는 것이 다이아몬드지요. 웃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가지고 인간들은 죽고 죽이는 황당하고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는게 정말 기이한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욕심의 씨앗이 뿌려지면 그리고 그러한 욕심의 씨앗을 방치하게 되면 이런 웃기고도 처절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우리를 이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합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눈에 보이는 반짝이는 숯덩이와 노란 금속쪼가리보다 훨씬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영혼은 그 어떠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욕심을 완전히 버리는게 어렵다고요? 그래요,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욕심의 양을 조금씩 줄여 봅시다. 이미 잉태해서 죄가 되었다고요? 그렇다면 그 죄악의 싹을 잘라버리십시다. 죄가 제멋대로 장성해 지도록 탐욕을 제멋대로 저질러서 우리를 포로로 잡기 전에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눈을 뻔히 뜨고도 죽음에 이르게되기 전에 그 죄악의 길에서 돌이킵시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욕망에 물든 눈을 감고 마음을 추스르고 난 다음 형제의 곤궁과 딱한 사정을 조금은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각종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가득히 들어차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급한지를 생각해 보세요. 현실이 어려울수록 사탄이 준 욕심을 버리고 시험을 참고 이겨 낸다면 경주를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로운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 면류관은 영멸이 아니라 영생을 약속하는 것이요 영원한 만족과 평안을 또한 보장하는 증표가 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현실의 시험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 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방법은 여기 나와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욕망의 눈을 거두고 사랑과 하나님의 법의 눈으로 형제와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 갑시다. 빛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적인 능력으로 세상을 가득 채웁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3월 3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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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예전에 찬양 가사 같은 데보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종종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일단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주어진 것이 있다면 시간과 선택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먹을지 선택은 해야만 하니까요. 또한 하루는 누구나 24시간 같으니까요.

아무튼, 공평에 담긴 사전적 의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바르다" 입니다. 저울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한 쪽에 무게를 두면, 그 쪽으로 시선이 가고, 눈금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라서, 재밌는 이야기 같은 것도 많습니다.

저는 음악을 좋아하니까, 음악으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음악이든지, 헤드셋이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완전히 색다르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귀에 가깝다보니까, 평소 들리지 않는 부분까지도 잘 들리고요. 그러면 희망사항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정도의 사운드를 방 안에서 구현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지? 좋은 음악을 제대로 구현하는데는 헤드셋 가격의 10배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3대 로망인, 자동차, 오디오, 카메라 에 사로잡히면, 그 때부터는 엄청난 비용이 들어갑니다.

좀 더 멋진 사진, 좀 더 멋진 음악, 좀 더 시원스러운 자동차를 얻기까지... 그래서 언제나 이런 종류에는 초고가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 하나에 수백만원쯤은 그냥 넘어가고, 음향시설에 천만원이 훌쩍 넘어가기도 하고, 자동차야 뭐 얼마든지 억소리가 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그래서 가지기도 너무나 어렵지만, 어느새 남자의 로망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하나를 마침내 가지게 되면,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면서, 또 다시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누구나 그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런 인간의 약점,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아주 많이 고민했습니다. 의사결정 책들과 심리학 관련 책들도 참 많이도 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생각해보면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를테면, 타인의 존재를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것.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 들어갈 것. 그러면, 그 때부터 욕망 대신에 만족의 길로 다닐 수 있는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신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했을 때, 그 대신 쉽게 대리만족할 수 있는 물건을 추구하는게 아닐까 싶었던 겁니다.

빵 한 개, 커피 한 모금, 그리고 사람 한 명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참으로 자주 잊어버리기에... 이 덧붙임을 남겨보았습니다. / 2014. 시북.